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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31/137)

-31화-

모양이 좋은 하얀 손이 수인(手印)을 맺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마법사의 손동작에 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마법사에게 손동작은 집중을 도와주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주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태양의 한 줌. 작·은·빛.”

린델이 주문을 외우자마자 그의 손에서는 달걀만한 작은 빛이 떠올랐다. 아직 해가 높이 떠 있는 오후라서 방이 밝아진 게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밤의 어둠을 물리치기에는 충분한 불빛이었다.

“작은 빛은 이제 능숙하게 불러낼 수 있어요. 그리고 잘 보세요.”

가벼운 손짓으로 작은 빛을 없앤 린델은 탁자 위에 올려둔 레드크리스털을 집어 들었다. 평범한 보석들과 달리 레드크리스털은 광산에서 채굴하지 않았다. 특별한 수정 연못에서 씨앗을 넣고 증식시켜 만들어내는 레드크리스탈은 기본 마법석으로, 빛의 주문을 새겨 넣으면 썬스톤으로 변모했다.

영롱한 붉은빛의 레드크리스털을 손에 쥔 린델은 정신을 집중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마법은 수인도 주문도 필요 없었다. 주변의 마력을 끌어 모아 약속된 문양을 만들어내는 것이 전부였다.

린델에게는 재능이 있었고 대기에 떠도는 마력을 느끼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약속된 문양을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문양이라고 했지만 그림처럼 평면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건 마치 마력을 벽돌처럼 쌓아 입체적인 작품을 만드는 과정과 비슷했다. 그것이 정교하면 정교할수록 고위 마법이 되었다.

그걸 깨닫기까지에는 시간이 걸렸지만 그 다음은 쉬웠다. 작은 빛을 불러내는데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그 다음은 응용이었다. 레드크리스털은 딱딱한 고체였고 그곳에 마력을 배열하는 것은 신중한 요령이 필요했다.

“태양의 한 줌. 작·은·빛.”

다시 주문을 외우자 린델의 손안에 있던 레드크리스털이 빛을 발했다. 이제 이것은 썬스톤이었다.

“스승님 보세요. 성공했어요.”

린델은 썬스톤을 들고 세투아를 불렀다. 몇 번이고 실패를 하다가 어젯밤이 되어서야 겨우 성공했다. 세투아는 고체에 마법을 고정시키는 것은 꽤나 어려운 작업이라고 했다. 그걸 해보였으니 꽤나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잘…하셨습니다.”

“그렇죠? 스승님 말씀대로 고체에 고정시키는 게 정말 까다로웠어요.”

자신이 해낸 것이 자랑스러운 린델은 활짝 웃었지만 세투아는 따라 웃지 못했다. 린델이 정식으로 마법을 배운 것은 이제 겨우 한 달이 넘었다. 그런데 작은 빛을 성공시키다 못해 레드크리스털에 고정을 시켰다.

세상에.

세투아는 감탄과 비명을 내지르고 싶은 것은 겨우 참았다. 마법사의 실력은 대기 중의 마력을 얼마나 자유자재로 다를 수 있냐로 갈렸다. 그런 의미에서 린델은 천재였다.

마법사는 대대로 특정 가문에서 배출했고, 대체로 태어나자마자 재능의 여부를 알 수 있었다. 마법사의 재능을 타고난 아이들은 글을 읽고 쓸 수 있을 때부터 마법의 기초를 배웠다. 어렸을 때의 실력은 대체로 비슷비슷했다. 그러다 열 살 전후로 격차가 생겼다.

단순히 배운 대로 외우고 따라하는 것과 원리를 이해하고 응용하는 것은 또 다른 재능의 영역이었다.

린델이 한 달 만에 작은 빛을 성공시킨 것이야 그럴 수 있었다. 그는 성인이었고 아무 생각이 없는 어린 아이들과 달리 이해력이 뛰어났으니 말이다. 하지만 레드크리스털에 빛의 주문을 고정시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죽을 때까지 주문을 고정시키지 못하는 마법사도 많았다.

천재라고 불린 자신도 레드크리스털에 빛의 주문을 고정시킨 것은 열네 살 때였다. 지금의 린델보다 훨씬 어리기는 했지만, 그때 자신은 7년이나 체계적으로 마법을 배우고 난 후였다.

사실을 직시한 세투아는 머리를 굴렸다. 린델의 실력이 진짜라면 자신 혼자서만 가르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마탑에 사실을 알리고 린델이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마법을 배울 수 있게 해야 했다. 거기까지 생각을 뻗어가던 세투아는 금방 현실을 떠올렸다. 황제가 좋아하지 않을 게 뻔했다.

황제는 비공인 애인을 무척이나 아꼈고, 마탑이 린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했다. 덕분에 황제의 총신인 자신이 린델의 스승 노릇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마탑의 늙은 원로들이 끼어들면 무엇보다 자신의 은퇴 계획에도 차질이 생길 수 있었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이제 저도 마탑에 가서 썬스톤 제작에 참여해야 하겠죠?”

이걸 어쩌나 하고 있던 세투아는 린델의 물음에 얼른 정신을 차렸다. 빛을 발하는 썬스톤을 들고 있는 린델은 기대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무슨 말이십니까?”

“마법을 고정시킬 수 있게 되면 마탑으로 차출된다고 하셨잖아요. 세공 마법사로요.”

그제야 세투아는 자신이 린델에게 설명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할엔라드 제국에서 마법이란 고수익을 창출하는 사업이었다. 레드크리스털을 이용해 마탑에서 제작하는 썬스톤은 할엔라드 제국 최고의 수출품이었다.

레드크리스털을 만들어내는 수정 연못은 오로지 제국에만 존재했고 황제의 재산이었다. 그리고 황제는 썬스톤과 관련된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할엔라드의 황제는 썬스톤을 팔아치운 돈으로 대륙 제일의 부자가 되었다.

그런 탓에 황제는 대대로 마탑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철저하게 관리했다. 특히 썬스톤을 제작할 수 있는 수준 높은 마법사 배출에 신경을 썼다.

마법을 고정시킬 수 있게 된 린델은 원래라면 마탑에서 썬스톤 제작에 투입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황제가 반대할 것이다. 눈치가 빠른 세투아는 황제를 대신해 린델을 말렸다.

“린델 경은 황제의 배행마법사니 차출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런가요? 아쉽네요.”

어깨를 살짝 늘어뜨린 린델이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보며 세투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지켜본 린델은 성실한 노력파였다. 그리고 몸을 움직여서 성과를 만들어내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황제의 배행 마법사로서 황궁 권력의 핵심이 되는 것보다는 썬스톤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게 분명했다.

황궁에서는 웃지 않는 냉철의 마법사라고 불리는 그였지만 실제는 다정하고 착한 성격이었다. 내도록 긴장해야 하는 황궁은 그에게 맞지 않을 수 있었다.

세투아의 짐작은 반만 맞았다. 그러나 나머지 반은 그가 차마 상상도 못할 것이었고 그래서 세투아는 자신의 나름대로 린델을 위로했다.

“비밀을 알려드리죠.”

“?”

“솔직히 썬스톤을 제작하는 과정은 아주아주아주 지루합니다. 산더미 같은 레드크리스털을 쌓아두고는 작은 빛을 외쳐야 하거든요. 하다 보면 신경질이 나서 집어던질 때도 있습니다.”

“설마요?”

“경험자의 말이니 믿어도 됩니다. 린델 경에게만 드리는 말씀이지만 집어던진 적도 꽤 있습니다. 오, 진짭니다. 이 스승이 어려서부터 천재 마법사라고 불리긴 했는데, 말이 좋아 천재지, 실상은 가루가 될 때까지 쥐어짜이는 말단 행정관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그건 착취라고 마탑의 원로들과도 대거리까지 했습니다. 말하고 보니 추억이네요. 그때는 젊었지요. 겁도 없었고 말입니다.”

입담이 좋은 세투아의 솔직한 고백에 린델은 웃음을 터트렸다. 말재주가 좋은 세투아 덕분에 린델은 마법 수업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수업이 이어졌다. 설명과 토론, 질문과 대답, 읽기와 쓰기가 반복된 수업이 끝난 것은 해가 질 때쯤이었다. 그리고 그때에 맞춰 카시어스가 나타났다. 린델과 세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아직도 수업 중인가?”

“이제 막 끝났습니다.”

카시어스의 물음에 답한 것은 세투아였다. 하지만 카시어스는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린델에게 말을 걸었다.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 시간이 있지 않습니까?”

“라우라디까지 가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 가는 길도 많이 막힐 거고. 중간에 내려서 걸어야 할지도 몰라.”

“좀 천천히 가도 됩니다.”

“그러다가 멋진 공연을 놓쳐버릴 거야.”

부외자가 되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세투아는 그들이 라우다리 축제에 갈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제국의 수도인 닐르는 매년 여름이면 다양한 축제가 열리곤 했다. 그 중에서도 콴 강을 따라 동쪽 끝에 있는 라우라디에서 열리는 축제는 다양한 볼거리들이 많기로 유명했다.

황제의 수석 마법사로 그의 꽁무니를 쫓아다녔던 세투아는 묘한 기분을 맛보았다. 황제가 연인을 데리고 서민들이나 갈 법한 축제에 참석한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분명 황제가 린델의 이중 신분을 만들어주었을 때는 그들 사이에는 연인이라고 할 만한 느낌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황제의 숨겨진 애인이라고 소문이 나면서 그들의 관계가 조금 달라졌다.

한 달 전, 린델이 최음약에 취해 정신을 잃고 나서부터는 좀 더 명확해졌다. 그때를 떠올리면 세투아는 오금이 저렸다. 황제를 아주 오랫동안 알아왔지만 그렇게 흉흉한 기운을 흩뿌린 적은 얼마 없었다.

어쨌든 그때부터 황제는 린델을 끼고 돌았다. 거의 매일 저녁에 린델을 데리고 수도 곳곳을 돌아다녔다. 황제를 지척에서 모시는 시종장이 세투아의 술친구였다. 그는 폐하께서 하루가 멀다 하고 황궁을 비우신다고 한숨을 내쉬는 것을 들었다.

두 사람의 사이는 더없이 좋아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연인 같아 보이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황제는 린델을 살뜰히 보살폈고, 린델은 황제를 무척이나 신뢰했다. 연인보다는 후견인과 피후견인의 분위기에 더 가까웠다.

그게 이상하단 말이지.

나름 사교계에서 구를 대로 구른 세투아는 궁중식 연애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이 되지 않았다.

“옷만 갈아입으면 돼요.”

“얼른 준비해.”

“스승님.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세투아. 나중에 보자.”

그렇게 세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에 카시어스와 린델이 저마다 작별 인사를 남기며 사라졌다. 홀로 서재에 남은 세투아는 괜히 서러워졌다.

두 사람만 연애하냐.

자신도 집에 돌아가면 어여쁜 부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름 애처가인 세투아는 자신도 부인과 함께 라우라디 축제에 가고 말겠다고 다짐하며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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