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제국의 수도이자 꽃의 도시라고 불리는 닐르에는 하루를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이 존재했다. 권력과 부가 모여드는 대륙 최고의 도시에는 없는 게 없었다. 수많은 극장과 비밀 클럽, 살롱, 서커스, 검투 대회. 많고 많은 놀이 중에 일반 평민들이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는 것은 거리 축제였다.
7월 말. 여름이 건조한 닐르는 밤이 되면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축제를 즐겼다. 길을 따라 이어진 가판대에는 온갖 종류의 물건들로 가득했다. 동대륙의 비취와 비단 끈이, 남대륙에서 왔다는 수상쩍은 부적이 사람들의 발길을 끌었다. 맛있는 향기가 나는 간식거리는 어린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재주꾼이 묘기를 부리는 와중에, 악사들이 흥겨운 가락을 연주했고, 그에 맞춰 누구는 춤을 추었고, 또 누구는 주먹질을 하며 싸워댔다.
카시어스와 함께 한바탕 축제를 즐긴 린델이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올라탄 것은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다.
축제를 구경하며 처음 보는 간식거리를 맛보던 린델은 마차를 타기 직전에 사탕을 한 꾸러미 샀다. 저택의 요리사는 엄청 예쁘고, 폭신하고, 달달한 간식은 잘 만들었지만 이런 값싼 사탕의 맛은 내지 못했다. 아껴두고 먹기 전에 카시어스에게도 맛을 보라고 몇 개 건넸는데 반응이 좋지 못했다.
“단 걸 싫어하신다고요?”
“그래. 끔찍해.”
“이렇게 맛있는데.”
청빈한 삶을 살았던 린델에게 간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과일이 대부분이었다. 아주 가끔씩 사탕도 과자도 먹긴 했지만 그건 특별한 경우였다. 그래서 린델은 달콤한 것을 꽤나 좋아하는 편이었다.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안 좋아져.”
“또 싫어하시는 건요?”
“그것 말곤 딱히 없어. 어지간한 건 다 먹어.”
린델이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카시어스는 진짜 어지간한 건 다 먹었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하신 분께서는 신분과 아름다운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소탈하셨다. 흙바닥에 앉아 공연을 보기도 했고, 평민들이 우글거리는 낡은 식당에서도 음식을 시켜 먹었다.
“그럼 도마뱀 같은 것도 먹으세요?”
“도마뱀? 설마, 먹어본 적 있는 거야?”
“네. 맛있어요.”
마을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숲속에 있는 온갖 것을 잡아 먹어본 적 있던 린델은 맛있다고 피력했다. 그러자 카시어스의 표정이 괴괴해졌다.
“도마뱀을 먹을 생각을 다 하다니. 강심장이잖아.”
“맛있다니까요.”
“숲에는 토끼도 있고 사슴도 있어.”
“의외로 이런 데 약하시구나.”
“감히 짐을 놀리다니. 무엄해.”
무엄하다는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너는 어떻게 도마뱀을 먹었느냐고 물어보는 카시어스에게 숲속의 경험담을 이야기하자 저택까지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내일 보자.”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린델을 벨룬드 공작 저택에 내려놓은 카시어스가 내일 보자고 인사를 한 후에 떠났다. 마차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던 린델은 애쉰 부인의 마중을 받으며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축제는 재미있으셨어요?”
“네. 재미있었어요.”
“에스더에게 욕조를 채워두라고 일렀어요. 얼른 씻고 주무세요. 내일 일찍 나가보셔야 하잖아요.”
내일은 사냥대회가 있었다. 봄의 황실 사교 시즌은 끝났지만, 여름의 축제는 한창이었다. 특히 내일은 황제가 사냥으로 잡은 짐승으로 손님을 대접하는 전통 때문에 많은 수도 귀족들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린델은 배행 마법사로 황제를 따라다녀야 했지만 별 걱정하지 않았다. 황제를 따라다닐 만큼 능숙하게 말을 타지 못했기 때문에, 내일은 거점에서 얌전히 기다리면 그만이었다.
그래도 애쉰 부인은 얼른 쉬라고 재촉했다. 그녀를 이길 수 없었던 린델은 욕실로 직행해야 했다.
침실은 이미 불이 대부분 꺼진 채 수면등만 하나 켜 있었다. 린델이 침실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애쉰 부인이 좋은 꿈을 꾸시라는 인사를 하며 사라졌다.
혼자가 된 린델은 그대로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몸은 피곤한데 잠은 잘 오지 않았다.
린델은 수면등의 불빛을 바라보다가 인상을 썼다. 선스톤을 제작하게 되면 더 이상 배행 마법사를 안 해도 될 줄 알았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했는데 그게 아니랬다. 혹시나 싶어 카시어스에게 확인을 했는데, 역시나 안 된다고 했다.
“어쩌지.”
린델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카시어스와 떨어져 있고 싶은데 방법이 없었다.
그와 함께 닐르를 돌아다니는 것은 즐거웠다. 연주회, 오페라, 연극, 축제. 세상을 알아가는 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그의 존재 자체가 문제였다. 카시어스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얼굴을 마주하면 때때로 심장에 이상이 생겼다. 마치 겨울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시리고 아팠다. 깜짝 놀라기도 하고, 그래서 심장이 멈출 것처럼 얼어붙기도 했다.
최악은 따로 있었다. 카시어스는 잊어버리라고 했지만 그날 밤의 기억이 종종 떠올랐다. 꿈속에까지 찾아드는 바람에 소스라쳐 놀라 깬 적이 두 번이나 있었다. 그럴 때면 몸이 달아올라 있어 민망해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카시어스의 얼굴을 보는 게 힘들 때가 있었다.
“진짜…….”
한숨을 푹 내쉰 린델은 몸을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여름이라 활짝 열어 놓은 창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흘러들었다. 풀 내음을 품고 있는 바람이 뺨에 닿는 것을 느끼며 린델은 눈을 감았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랬던 적은 처음이었다. 신전의 아이로 자라면서 사제를 지망한 린델은 성욕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늦되기도 해서 열일곱 살이 되어서야 몽정을 했다. 그리고 아침에 발기한 성기를 보고는 병에 걸린 것 같다고 잉그란에게 고백한 적도 있었다. 그 후로 아주 가끔씩 스스로 만져 사정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알렉스는 고자나 다름없다고 놀렸고, 잉그란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니까 괜찮다고 했다.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껏 욕망을 의식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심각했다.
평소에는 괜찮았다. 일과가 바쁠 때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과제를 하다가, 혹은 책을 읽다가 잠을 청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곤란할 때는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이었다.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면 그때의 감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린델은 손끝부터 열이 오르는 것을 무시하며 눈을 꼭 감고 잠을 청하려고 했다.
넌 잠을 잘 수 있어. 잠을 자야 해.
마치 주문이라도 외듯이 잠을 자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승마에, 예법, 댄스, 마법, 그리고 축제까지. 하루 종일 바빴다. 그러니까 잘 수 있었다.
필사적인 노력에 보답하듯 머리가 무거워졌다. 잠이 든 것도 깬 것도 아닌 기분은 그날 밤과 닮아 있었다.
정신이 오락가락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몸은 쾌락의 감각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지러운 열기에 숨이 막혔다. 심장은 세차게 뛰었고 등줄기는 소름이 돋으면서도 떨렸다. 카시어스의 손이 맨살에 닿았을 때는 마치 불꽃에 타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파정의 순간은 황홀하기만 했다.
“헉.”
저도 모르게 그때의 쾌락을 더듬던 린델은 눈을 번쩍 뜨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손끝이 아니라 심장과 머리에 열이 올랐다. 이래서야 카시어스를 떠올리며 자위를 할 판이었다.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린델은 그대로 침대를 박차고 나가 물병을 집어 들고는 테라스로 향했다. 활짝 열린 창을 지나 테라스 끝에 선 린델은 그대로 물병의 물을 머리 위로 쏟았다. 잠옷이 물에 젖는 것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차가운 물이 머리를 적시고 목을 타고 흐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
린델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물에 젖은 뺨을 쓸었다. 바람이 젖은 피부를 스치자 열이 식었다.
젯타스시여.
스스로가 한심한 린델은 신을 찾았다. 하지만 신은 언제나 그렇듯 아무런 응답을 해 주시지 않았다.
스무 살이나 먹고서야 소년들이나 겪는 야한 방황을 하게 된 린델은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테라스에 서 있었다.
다음날 이른 새벽. 린델은 눈 밑이 퀭한 것을 채 감추지 못하고 식당에 섰다. 린델의 식사를 챙기던 애쉰 부인이 깜짝 놀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그의 모습은 엉망이었다.
“린델 님. 안색이 나빠요.”
“네. 잠을 잘 못 잤어요.”
“어디 불편하신 건 아니죠? 이래서야 사냥대회에 갈 수 있겠어요?”
“말을 탈 것도 아닌데요. 괜찮아요.”
카시어스를 상대로 야한 꿈을 꿀까 봐 잠을 못 잤다고는 할 수 없었던 린델은 적당히 대꾸했다.
“혹시 수면제가 필요하시면 주저 말고 말씀하세요. 세투아가 그래 보여도 약은 잘 짓는답니다.”
“필요하게 되면 꼭 말씀드릴게요.”
진한 홍차를 들이키던 린델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진짜로 수면제가 필요할 때가 올지도 몰랐다.
잠을 설치면서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고 의연해지는 것뿐이었다. 그날 밤의 기억은 강렬했고, 그래서 자신은 지금 발정 난 망아지가 되고 말았다. 린델은 우울한 마음에 홍차를 꿀꺽꿀꺽 삼켰다.
그 상대가 카시어스라는 것은 미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닐르에서 북쪽으로 1시간 거리에 위치한 황실 소유의 광대한 숲은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여름 숲의 꽃들은 싱그러웠고 하늘 높이 솟은 나무들은 푸르름을 자랑했다. 새들이 저마다 지저귀는 소리가 숲의 생명력을 더했다.
숲 안쪽에 위치한 별궁의 끝자락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던 린델은 묘한 그리움에 사로잡혔다. 마치 로벅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로벅은 산세가 험했고 숲의 녹음이 더 짙고 울창했다. 그래도 숲이 주는 향수는 린델을 감동시키기 충분했다.
황궁은 화려했지만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닐르의 거리는 볼거리가 넘쳐났지만 복잡하고 소란스러웠다.
고요한 숲을 마주하고서야 린델은 자신이 얼마나 로벅을 그리워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고 언제나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했지만 언제나 마음은 로벅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잉그란이 보고 싶었다.
넌 맹세를 했어. 린델.
린델은 스스로를 일깨웠다. 로벅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자신은 카시어스에게 모든 것을 바치겠노라고, 무엇이든 하겠노라고 맹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