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137)

-33화-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다시 그날이 돌아온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할 터였다. 그래도 그리움이 쌓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향수병인가?”

린델은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뺨을 문질렀다. 오랜만에 울창한 숲을 마주했더니 로벅이 계속 떠올랐다.

어쩌면 어젯밤에 잠을 설쳐서인지도 몰랐다. 하룻밤 못 잔 거야 별거 아니었지만, 그래도 물을 뒤집어쓰고 바람을 쐰 탓인지 열이 조금 있었다.

이게 다 카시어스 때문이야.

린델은 애꿎은 카시어스를 원망하다가 머리를 휘휘 저었다. 꿈속에까지 찾아들어서 괴롭힌 남자를 대낮에 떠올릴 순 없었다. 그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또 자존심 문제이기도 했다. 린델은 눈에 힘을 주고 녹색으로 가득한 숲을 바라보았다. 숲의 녹음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카시어스는 겨울이 되기 전에 끝날 거라고 했다. 그때가 되면 잉그란을 만날 수 있었다. 이제 린델 시어드라는 이름으로 살 수는 없겠지만, 사제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많은 것을 잃은 만큼, 많은 것을 얻었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언제나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었다.

탕.

열심히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멀리서 총성이 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더 멀리서 경쟁이라도 하듯 여러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린델은 반사적으로 왼쪽 어깨를 움찔거렸다. 왼쪽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도 벌써 두 달 전의 일이었다. 도적이 쏜 눈 먼 총알은 끔찍하게 아팠고 그대로 죽는 줄만 알았다. 그 자리에 치유 마법을 쓸 수 있는 세투아가 없었더라면 정말 생사가 불투명했을 터였다.

목숨 빚은 카시어스뿐만 아니라 세투아에게도 있었다.

“아.”

린델은 문득 치유술을 배우면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찢어지고 갈라진 살을 붙이고 피를 멈추게 하는 치유술은 가장 까다로운 고위마법 중에 하나였다. 마탑에서도 치유술을 쓸 수 있는 마법사는 한 손에 꼽는다고 했다. 그만큼 익히기 어렵다는 소리였지만, 치유 마법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치유 마법이라.”

확실한 목표가 있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카시어스는 유능한 수행원이 되기 위해 노력하라고 했지만 린델은 좀 더 확실한 형태가 있는 걸 좋아했다.

사제가 되려고 노력했던 것은 가장 선량하게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잉그란에게 구원을 받았던 것처럼 자신도 누군가를 구원하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 마음은 아직도 변함이 없었다.

치유 마법을 배워두면 어떤 형식으로든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훌륭하고, 명예롭고, 좋은 일이었다.

“흠. 흠.”

치유 마법을 배우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 지를 가늠하던 린델은 옆에서 들리는 헛기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한 남자가 가까이에 서 있었다. 린델은 그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한 달 전에 황태후의 가든파티에서 만난 제라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셰리드엘 경.”

“제라르 경.”

린델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제라르에게 인사했다. 황태후의 가든파티에서 나비를 쫓아줄 때는 몰랐는데, 그는 재상의 늦둥이 막내아들이라고 했다. 올해로 스물다섯 살인 남자는 셋째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작위를 물려받을 훌륭한 신랑감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어쨌든 그는 알렉스 도련님과 많이 닮아 있긴 했다.

“한참 동안 서 계시는 것을 봤습니다. 저쪽에 재미있는 거라도 보입니까?”

“잠시 새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세뤤 남작께서 준비가 끝났다고 하셔서요. 남작께서 제 고종사촌 형님이시라 심부름꾼으로 써달라고 졸랐습니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려고 말입니다.”

“감사요?”

“한 달 전, 태후마마의 파티에서 곤경에 빠진 저를 도와주신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비가 아주 독했어요. 세수를 했는데도 귀 끝에 발진이 났었습니다. 경이 아니었으면 큰일이 날 뻔했습니다. 그 나비가 위험하다는 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라르의 목소리는 유쾌하기 짝이 없었고 그래서 린델은 조금 신기한 기분이었다. 황제의 배행 마법사로 황궁을 드나들어도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시종단의 일원뿐이었다. 정무회의와 알현식을 제외하면 공식적인 행사에도 거의 참석하지 않은 탓에 다들 적당한 거리에서 눈짓으로만 인사를 보내곤 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부딪혀 온 사람은 제라르가 처음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황태후의 가든파티에서 통성명을 했으니 그다지 무례는 아니었다. 린델은 부드러운 어조로 답했다.

“아시는 분이 고생하신 적이 있습니다.”

“아하. 그렇군요. 그분께는 죄송스러운 일이지만 덕분에 제가 살았습니다. 지금 제가 너무 말이 많죠? 긴장해서 그렇습니다. 이드나카 형님께서 노려보고 계실 테니 이제 가시죠.”

제라르가 가리킨 곳에는 과연 이드나카가 서 있었다. 황제의 명령을 받은 이드나카는 자신에게서 절대 눈을 떼지 않았다. 그래서 린델도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늘 눈에 띄는 곳에 있었다. 린델은 제라르와 함께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예정은 어떻게 되십니까? 만찬까지 남아 계실 건가요? 경은 보통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만찬에서 폐하를 배행할 예정입니다.”

“그때 다시 인사를 드려도 될까요?”

“?”

적당히 예의 바르게 대답하던 린델은 뜻밖의 청에 제라르를 쳐다봐야 했다. 나란히 걷고 있던 그가 싱긋 웃어보였다.

“너무 경계하지 마십시오. 친해지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네. 맞아요. 친해지려면 인사부터 해야 하는 법이죠. 안 그렇습니까? 인사를 하다가 기회가 되면 차도 마시고 산책도 할 수 있지요.”

제라르는 자신이 노골적으로 들이대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황실사교계의 기준으로 보자면 애송이도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하지만 고종사촌 형님의 조언에 따르면, 황제의 배행 마법사께는 돌려 말하는 것보다는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했다.

황제의 배행 마법사. 아셰리드엘.

그의 등장은 시작부터 요란했다. 서커스 공연장에서 종이 반딧불이를 끌어모은 것으로 마법사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린 그의 옆에 황제가 앉아 있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서 통속소설의 소재로 쓰이고 있을 정도였다. 거기다 황제는 그를 자신의 피후견인이라고 공언하고는 유별나게 챙겼다. 아셰리드엘이 황제의 비공식 애인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마침 서부를 주유하고 돌아온 제라르가 아셰리드엘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는 화려했던 임명식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다. 주변의 지인들은 황제의 비공식 애인이 요정처럼 생겼다고 떠들어댔다. 과연 철혈이라고 불리는 황제의 애간장을 녹일 만큼의 미모였다는 말에 흥미가 일었다.

황태후의 가든파티에 그가 참석할 거라는 이야기에 재상이신 아버지의 이름을 빌어 초대장을 얻었다. 아셰리드엘은 소문대로 꽤나 눈길을 끌게 생겼다. 웃지 않는 냉철의 마법사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어서 더욱 그랬다.

그러나 제라르를 사로잡은 것은 아셰리드엘의 미모가 아니라 기묘한 감각이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와 손을 뻗었을 때는 애송이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유 모를 호감이 당혹스러웠지만, 그의 존재가 어떤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것만은 분명했다.

고전에 정통한 카시어스와 달리 디비티에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제라르는 자신의 본능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자신이 느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졌다.

혹시나 싶어 아셰리드엘의 주위를 서성였지만 인사를 건넬 기회조차 오지 않았다. 3일에 한 번, 황궁을 찾는 그는 정무회의와 공식 알현식에 참석만 하고는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알현실과 복도에서 아셰리드엘과 가까이 했을 때에 특별한 감각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나란히 걸어가고 있는 그의 존재를 또렷하게 인지했다.

사교계의 귀공자인 제라르는 자신이 첫눈에 반한 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졌다. 오늘 사냥대회는 아주 중요한 기회였다. 그에게 자신의 존재를 피력해야 했다.

린델이 바로 대답을 못 하고 망설이는 것을 보며 제라르는 좀 더 밀어붙였다.

“훌륭한 신사에게는 훌륭한 친구가 필요한 법이죠. 제 입으로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저는 꽤나 괜찮은 친구가 되어드릴 수 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든다면 황제 폐하께 여쭤보십시오. 제 평판은 소문이 자자해서 폐하께서도 알고 계실 겁니다. 저 녀석은 천하에 둘도 없는 한량이라고 말입니다.”

“제라르 경.”

괜찮은 친구가 될 거라면서 자화자찬을 하다가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제라르는 초지일관 유쾌했다. 그 모습이 알렉스의 그것과 무척 닮아서 린델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오. 제가 경의 미소를 본 첫 번째 목격자가 되겠군요. 아주 영광입니다. 그러니까 폐하께……. 조심하십시오.”

매력적인 미소와 입담을 뽐내던 제라르가 놀란 얼굴을 하고 린델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제라르의 강한 팔 힘에 속절없이 끌려가던 린델은 도대체 무슨 짓이냐고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등 뒤에서 들리던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곁을 스쳐 지나갔다. 반쯤 제라르에게 끌어안긴 린델은 정신이 없었다.

“데스탄!!”

제라르가 커다랗게 외쳤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 옆에 선 린델은 그제야 말을 타고 선 무리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냥복 차림을 한 사내 셋과, 그들의 종자로 이루어진 조합이었다. 린델은 자신이 저들이 모는 말에 치일 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정의 외곽에는 사냥용 천막이 늘어섰고, 분수 주위에는 태양빛을 가릴 천개가 드리워졌다. 그리고 별궁의 정문에서 중정까지는 말을 몰고 내달리기 넉넉한 공간이 있었다. 물론, 지나가는 사람을 피하기에도 충분했다.

그러니까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린델은 선두에 서서 자신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를 보며 확신했다.

데스탄 볼라 아레트스마.

그는 루미아나 대공주와 쥴란 공작의 둘째 아들로, 황제의 조카이기도 했다. 린델은 오늘 그의 얼굴을 처음 봤다. 황제에게 인사를 할 때는 멀쩡했던 그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뭐야? 제라르였잖아. 거기서 뭐 해?”

“속도를 줄이는 건 상식이야. 그걸 모른다고 하지 않겠지?”

“뭐. 시시덕거리다가 말이 달려오는 것도 모르는 멍청이는 여기에 없잖아.”

거의 말에 치일 뻔했던 린델은 데스탄이 말하는 멍청이가 자신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데스탄은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가볍게 말했지만, 그에게는 분명 악의가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