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수면등에 드러난 린델의 얼굴은 단 하루 만에 엉망이 되어 있었다. 식은땀이 맺힌 이마에는 머리가 달라붙어 있고, 힘없이 감긴 눈 밑은 퀭했다. 바짝 말라붙은 입술로 겨우겨우 숨을 내쉬는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약을 먹었는데도 왜 열이 안 내리는 거지?”
“단순한 열감기가 아니라, 과로까지 더해진 거니까요.”
“과로?”
뜻밖의 대답에 카시어스는 옆에 선 애쉰 부인을 돌아봐야 했다. 그녀는 서글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두 달 동안 제대로 쉰 적이 단 하루도 없어요. 새벽같이 일어나서 낮잠 한 번 자지 않고 밤늦게 잠드시는데 어떻게 버티겠어요. 겨우 그거냐고 그러지는 마세요. 모두 폐하처럼 강철 체력은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
“게다가 낯선 곳이잖아요. 실수하지 않으려고 계속 긴장하고, 또 폐하께 인정받으려고 더 그러셨고요.”
린델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애쉰 부인이었다. 그의 성향도 성격도 모두 알고 있었다. 무리하고 있다고, 이만하고 쉬어야 한다고 해도 린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짐이 악덕 후견인이로군.”
“린델 님이 노력파에다 완벽주의자라서 저도 말리지 못했어요.”
카시어스는 소리 없이 동의했다. 린델은 입버릇처럼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했다.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무리를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어쨌든 휴식이 필요한 거로군. 알았어. 린델은 잠시 내가 돌볼 테니까, 잠시 자리를 비워줘.”
“어머나. 폐하께서 간병을 하시겠다고요? 방법은 아세요?”
“필요하면 부를게. 아주 큰 목소리로.”
“꼭 부르셔야 해요.”
마른 수건으로 땀을 닦아주는 게 좋겠다고 조언을 한 애쉰 부인이 물러났다. 카시어스는 마른 수건을 챙겨 들고는 린델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마음이 좋지 않았다.
길을 걷고 있었다. 우중충한 하늘만큼이나 어두운 회색 벽으로 둘러싸인 거리는 어딘가 황량했다.
린델은 이것이 악몽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의 악몽은 언제나 길을 헤매는 것으로 시작했다. 생전 처음 보는 골목을 낯선 사람들을 지나치며 하염없이 걷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걷고 또 걸으면서 막막해질 뿐이었다.
단단한 바닥을 밟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밑은 마치 바닷물처럼 출렁거렸다. 그래서 균형을 잡을 수가 없었다.
길을 헤매는 악몽은 심적으로 불안할 때나, 육신이 고단할 때 많이 꿨다. 이번에는 감기가 원인이었다.
그저께 밤에 머리에 물을 쏟아붓고는 찬바람을 한참 동안 맞은 결과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사실 사냥대회 동안 내내 열이 났지만, 밤늦게 저택에 돌아와서 침대에 누울 때까지만 해도 상태는 괜찮았다. 오늘 새벽에 일어날 때도 조금 몸이 무겁다고 느꼈을 뿐이지 별 이상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말에서 내리는 순간에 어지러움을 느끼다 못해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몸이 아프면 마음이 약해지게 마련이었다. 문득 잉그란이 보고 싶어졌다. 이곳에서의 삶은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하고 재미있었지만, 자신은 아직 이방인이었다. 로벅이 그리웠다.
이방인이 되어 헤매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다시 악몽이 반복되었다.
낯선 거리. 낯선 사람들. 허공을 걷고 있는 듯한 감각.
린델은 악몽에서 깨고 싶었다. 얼른 깨어나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어보지만 눈이 떠지지 않았다. 열이 오른 머리는 익을 것 같았고, 숨을 쉴 때마다 목이 따가웠다. 모든 게 서러웠다.
이대로 다시 악몽에 시달리기 싫었다. 얼른 깨고 싶어서 버둥거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손을 잡아왔다. 잉그란은 아니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주름지고 거칠고 따스한 손이 아니라, 크고 강한 남자의 손이었다.
“린델.”
카시어스였다. 부름을 들은 린델은 천천히 눈을 떴다.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고 나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해가 진 듯 주위는 어두웠다. 그리고 수면등에 비친 카시어스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잠들기 직전에 애쉰 부인이 카시어스가 찾아올 거라고 알려주었다.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뜨며 눈을 감았는데, 진짜 그를 보자 기뻐졌다.
“카시어스 경.”
목소리가 엉망으로 갈라져 있었다.
“정신이 들어?”
“네.”
“악몽을 꾸는 것 같아서 일부러 깨웠어. 괜찮아?”
“괜찮아요.”
웃으며 대답하려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이 엄청 말랐다. 린델은 카시어스를 멀뚱히 바라보다가 반쯤 일어나 앉으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죄송한데…… 물을 좀…….”
“눈치가 없었군. 내가 이런 걸 잘 못 해.”
린델은 카시어스의 변명을 이해했다. 고귀하신 분께서 언제 다른 사람의 시중을 들어봤겠나 싶었다. 다행히 카시어스는 별 실수 없이 물잔을 내밀었다. 그리고 다 마신 물잔도 깔끔하게 치웠다.
“얼굴이 말이 아니야.”
혀를 쯧쯧 찬 카시어스가 손을 뻗어 린델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린델은 멍한 머리로 카시어스의 손이 시원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손이 떨어져나갔을 때는 아쉬울 지경이었다.
“수업을 몇 개 조정하고, 입궁은 나흘에 한 번으로 바꿔. 사흘 중에 하루는 온전히 쉬고.”
“네?”
멀어지는 카시어스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린델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애쉰 부인의 말로는 과로라고 하더군.”
“과로요? 제가요?”
“그래.”
“감기인 걸요. 그저께 밤에 찬바람을 쐬어서 그래요.”
감기의 원인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린델은 과로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찬바람만 맞은 게 아니라 머리에 물을 부어버렸다. 차마 그 이유를 말할 수 없긴 했지만 어쨌든 과로는 아니었다.
린델은 강력하게 부인했지만 카시어스는 과로가 맞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그를 밀어붙였다. 어디까지 해내는가 싶어서 한계까지 쥐어짰다. 제가 무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녀석은 힘들다는 말을 하는 대신에 쓰러져버렸다. 성실한 완벽주의자가 둔하기까지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카시어스는 자신의 과오를 고백했다.
“짐이 성실한 피후견인을 너무 몰아붙였어.”
“폐하.”
“새벽같이 일어나서 낮잠 한 번 자지 않고, 밤늦게 잠드는데 몸이 어떻게 버티겠어.”
“하지만 폐하께서도 그러시잖아요.”
애쉰 부인이 했던 말을 그대로 린델에게 해주던 카시어스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린델이 자신과 비교하고 있었다. 린델의 말간 얼굴에는 마치 그게 당연하다는 듯 아무런 의구심도 없었다. 정말 무모한 녀석이었다.
카시어스는 웃음을 터트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린델. 자랑은 아니지만 내 경우는 특별해.”
“?”
“강대한 마력이란 끊임없이 샘솟는 체력과도 같은 말이야. 그리고 내게는 디비티에가 있지.”
조용히 설명하는 카시어스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린델은 같이 웃어주지 못하고 시선을 비꼈다.
“저에게도 디비티에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런 감기는 금방 나아버리게요.”
린델은 뚱하게 말했다. 면전에서 네 체력이 약하다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별로였다. 그게 사실이긴 했지만, 그래서 자존심이 상했다.
“이런. 너무 상심하지 마. 감히 단언컨대, 날 당해낼 놈은 아무도 없어.”
“폐하?”
“사석이니까 카시어스라고 불러야지.”
“카시어스 경.”
“대인전투에서는 무적이야. 그래서 황제가 되기 전부터 어느 누구도 내게 결투를 신청하지 않았지.”
마치 비밀을 이야기하듯이 속삭인 카시어스 때문에 린델은 다시 그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진짜냐고 눈으로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린델은 카시어스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기억해냈다. 그는 칼이 아니라 지팡이를 벽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디비티에가 있다고 해서 병이나 상처가 낫지는 않아. 마력을 진정시켜 회복에 도움을 주긴 하지만.”
“만능인 줄 알았는데요.”
“만능이라기보다는 최후의 오아시스에 가깝지.”
카시어스가 손을 내밀었고 린델은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린델이 디비티에에 대해 아는 것은 모두 카시어스에게 들은 것뿐이었다.
카시어스의 말에 의하면 제어되지 않는 마력이란 등 뒤에 꽂힌 비수와 같다 했다. 컨디션이 나쁘면 칼날이 살을 파고드는 기분이 든다면서 인상을 썼다.
단순히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날이 선 감각이 안정이 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찌푸려진 미간이 서서히 풀리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매우 특별했다. 무례한 비교였지만 영주님의 도도한 사냥개였던 테메른이 슬며시 옆에 기대어 왔을 때와 비슷한 만족감이었다.
카시어스는 좀 더 위험한 생물이긴 했다. 린델이 떠올릴 수 있는 맹수는 늑대가 최고였지만 붉은 늑대는 본 적이 없었다. 그를 어떤 동물에 비교해야 할까 싶었다.
“손에서도 열이 나는군. 뜨거워.”
“그런가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너는 좀 둔해.”
“예?”
“힘들어도 힘든 것도 모르지.”
열 때문에 린델은 평소보다 반응이 조금씩 느렸다. 둔하다는 말에 눈을 크게 뜨는 와중에 카시어스가 잡은 손을 놓고는 이마를 짚어왔다. 확실히 그의 손은 상대적으로 시원했고, 그래서 의식하고 말았다. 카시어스가 너무 가까이 있었다. 린델은 심장의 상태가 심각하게 나빠지는 것과 뺨이 달아오르는 것을 동시에 느꼈다. 이미 열이 오를 대로 오른 상태라 얼굴이 빨개지는 것이 티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카시어스가 잠시 열을 재고는 곧 손을 뗐다.
“열이 심해. 어서 자리에 누워.”
“이미 누워 있어요.”
“제대로 누워.”
카시어스가 깐깐하게 지적하는 바람에 반쯤 앉아 있었던 린델은 몸을 움직여 베개를 베고 편하게 누웠다. 시야가 낮아지니까 카시어스를 올려다봐야 했다.
“이제 자. 늦었어.”
“너무 많이 자서 잠이 올까 모르겠어요.”
“열 때문에라도 자야 해.”
“네.”
순순히 대답을 한 린델은 눈을 천천히 깜빡이면서 카시어스를 계속 바라보았다. 그러자 카시어스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왔다.
“물을 마시고 싶어?”
“아니요. 그것보다는……. 손을 잡아주시겠어요?”
“응?”
“아까 악몽을 꿔서, 그러니까 다 큰 어른이 이러면 안 된다는 건 아는데. 그래도…… 잠들 때까지만이라도.”
린델은 열 때문에 마음속의 말을 막 해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려니 부끄러웠지만 본심을 숨기려면 그럴듯하게 둘러대야 했다. 악몽을 꾼 건 맞으니까 진심처럼 들릴지도 몰랐다.
“짐의 피후견인은 어리광쟁이군.”
“원래 그러지 않는데, 아파서 그런다고 생각해 주세요.”
“손을 잡아주는 거야 힘든 일도 아니지.”
언젠가 린델이 했던 말을 그대로 한 카시어스가 웃으면서 린델의 손을 잡았다. 서늘한 느낌이 좋아서 린델은 기분 좋게 눈을 감았다.
열이 오른 머리로 손을 잡는 게 아니라 그를 꽉 끌어안고 싶다고 생각했다. 무엄하고 무도한 욕망이었지만 진심이었다.
난감하고, 설레고, 아프고, 기쁘다.
이 마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가 좋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