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눈을 감은 린델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바뀌는 것은 금방이었다. 카시어스는 애쉰 부인을 부르는 대신에 계속 자리를 지켰다. 잡은 손은 계속 뜨거웠다. 계속 열이 나는 것은 육신이 병마와 싸우고 있는 증거였다. 그러나 린델의 상태가 어떻든 간에 디비티에로서의 효용은 변함이 없었다.
정신은 맑아지고 감각은 선명해졌다. 모든 것이 또렷해지는 것만큼, 복잡한 기분 역시 가눌 길이 없었다.
녀석에게 끌리고 있단 말이지.
카시어스는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끌어안고 싶다. 입을 맞추고 싶다. 애틋한 연정이 아니라 시커먼 애욕에 가까운 충동이긴 했지만, 끌리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발단은 한 달 전에 있었던 사고였다. 최음제에 취한 린델을 보고 욕정을 느낀 것이 문제였다. 그때는 분명 후견인으로서 그를 보호하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마음이라는 것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도록 제대로 얼굴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시선을 비끼는 린델에게 계속 눈이 갔다. 표정 관리를 한답시고 바짝 긴장을 한 주제에 눈이 마주치면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모습은 귀엽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그때 매끄러워 보이는 입술을 보며 입맞춤을 하고 싶어졌다. 정확하게는 농밀하게 혀를 빨고 입술을 핥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버렸다.
이래서야 무슨 보호자 노릇을 하겠느냐고 스스로를 욕했다. 그러나 욕망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매력적인 상대에게 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금껏 남자에게 눈길이 간 적은 없지만, 린델이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린델의 외모는 누구나 인정하는 바였고, 성격은 다정했다. 아무렇지 않은 말로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재주도 가지고 있었다. 뚱한 표정도, 활짝 웃는 얼굴도 사랑스러웠다.
그렇게 자신의 욕망을 인정했다. 그래도 처음 다짐대로 믿음직한 후견인의 위치를 지켰다. 밤마다 닐르를 돌아다니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것만으로 만족하자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감정이 제멋대로 튀었다.
방금 전만 해도 린델에게 말도 안 되는 자랑을 해버렸다. 제라르를 향해 열렬히 박수를 치던 린델을 보며 가졌던 유치한 질투가 원인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에도 이렇게나 노골적인 자화자찬을 한 적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신뢰를 담아 올려다보는 린델의 눈가에 입술을 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하아…….”
잠든 린델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제 감정을 더듬던 카시어스는 한숨이 나오는 것을 막지 않았다.
지금껏 카시어스의 상대는 사교계의 룰에 능숙한 귀부인들이었다. 서로에게 바라는 것은 명확했다. 가볍게 만나고, 원하는 것을 손에 쥐고는 웃으면서 헤어졌다. 재회의 순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리고, 순진한, 그리고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들에게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양심과 책임의 문제도 있었지만, 감정이 넘쳐나는 상대는 취향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린델에게 속수무책으로 끌렸다. 이제 막 데뷔한 숙녀들처럼 손등에만 입술이 닿아도 얼굴이 빨개지는 순둥이에게 말이다.
신전에서 자라 사제를 지망했던 녀석이었다. 섹스는커녕 여인에게 연정을 품은 적조차 없는 게 분명했다. 그런 녀석을 상대로 무얼 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니지. 마음이야 충분히 있잖아.
카시어스는 자신을 객관화하는 데 능숙했고, 그래서 스스로를 기만하지 못했다.
린델이 열기를 품은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눈치챘다. 단순한 혼란인지, 어설픈 욕망인지는 린델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다. 흔들리고 있는 그를 꾀어내는 거야 일도 아니었다. 우리는 이미 사귀는 사이라면서 진짜 연애를 해보자고 할 수도 있었다.
사교계의 흔한 연애 놀음을 직접 가르치는 것도 괜찮지 않느냐고 머리 한쪽에서 속삭이기까지 했다. 일국의 군주란 훌륭한 악당이었다.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얼마든지 파렴치하게 굴 수 있었다. 철혈이라 불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특기였다. 우아하게 유혹하고 달콤한 쾌락을 즐기는 것은 손쉬웠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단 말이지.”
카시어스는 린델이 듣지도 못할 고백을 했다. 마음은 반반이었다. 정확히는 린델을 품고 싶은 욕심이 더 앞서 있었다.
가는 어깨, 곧은 목덜미, 부드러운 피부, 날씬한 허리.
그날, 손안에서 느껴졌던 감촉이 그대로 남아 있다. 옷을 벗기고 매끄러운 피부를 어루만지면 달콤한 신음을 흘릴 것이다. 눈가를 핥고,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어, 깨끗한 얼굴을 쾌락으로 물들이면 황홀하겠지.
“이런.”
제멋대로 뻗어나가던 생각의 끝에 다다른 카시어스는 혀를 찼다. 감기에 시달려 정신을 잃듯 잠든 상대를 보며 야한 상상이나 하고 있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이러다가 진짜 몹쓸 놈이 될 것 같았다.
“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린델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말이었다. 머릿속은 여전히 실타래가 엉킨 것처럼 복잡했다. 살면서 이렇게 갈팡질팡한 것은 처음이었다. 형제들이 모두 죽고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이렇게까지 고민하지는 않았다.
한숨을 삼킨 카시어스는 욕망도, 망설임도 털어냈다. 일분일초를 다투는 시급한 일도 아니고, 목숨이 걸린 일도 아니었다. 당장에 결정을 내릴 수 없다면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것도 방법이었다.
그렇게 정한 카시어스는 린델의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손이 살짝 떨어지자마자 린델이 다급하게 잡아챘다. 무의식적인 행동이라 안타까움이 일었다.
연민과 욕정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카시어스는 린델의 신뢰받는 후견인이라는 지위를 잃고 싶지 않다는 바람도 인정했다.
“악당에, 욕심쟁이로군.”
스스로에게 혹독한 평을 내린 카시어스는 린델의 손을 한참 동안이나 잡고 있었다.
활짝 열어 놓은 창문 밖은 여름이 한창이었다.
린델은 환한 정오의 태양빛을 조명 삼아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지난 두 달 동안 매일같이 거울을 보며 옷을 갈아입었다. 한여름에도 베스트와 코트를 입고, 크라바트를 매는 것도 이제는 일상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귀족 청년처럼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그다지 어색하지 않았다.
어디 한 군데 모자람 없다는 것을 확인하며 의도적으로 싱긋 웃어보았다. 그러자 거울 속의 청년도 같이 따라 웃었다.
감기 때문에 크게 앓고 깨어난 린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휴식을 취하라는 황제의 명령이었다. 정확히는 황제로부터 공식적으로 여름휴가를 받아 수도 근방의 호수 마을에 위치한 벨룬드 공작의 별장에 머무르게 되었다.
평생을 부지런히 살아온 린델은 휴가라는 것에 도통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별장에 오게 되면서 마법도, 춤도, 승마도 그리고 각종 예법과 교양 수업도 모두 금지당했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독서나 산책, 그리고 편지를 쓰는 것뿐이었다.
혼자서라도 춤 연습을 할까 싶어 오르골을 틀었더니 애쉰 부인이 나타나 그러지 말라고 말렸다. 심심하다고 해도 통하지 않았다. 휴가니까 온전히 쉬어야 한다는 말만 되돌아왔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애쉰 부인은 시도 때도 없이 간식을 권했다. 기력을 보충해야 한다면서 저녁마다 진수성찬을 차렸다.
평소 린델은 사색을 즐겼다. 조용한 것도 좋아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을 소중하게 여겼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이 하루 종일 책만 읽는 것은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편하기야 엄청 편했지만 왠지 너무 과보호를 받는 것 같았다. 겨우 감기 때문에 한 번 쓰러진 것뿐인데, 다들 자신을 다섯 살 먹은 어린애처럼 취급했다.
“너무하세요.”
린델은 황궁에 계실 황제 폐하께서 듣지도 못하실 불만을 중얼거렸다. 휴가 일정은 보름이었다. 닷새가 지나자 지루함을 참지 못한 린델은 황제 폐하께 춤 연습만이라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는 편지를 썼다. 한 달 넘게 연습을 하고 있었지만 춤 실력은 크게 늘지를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춤만큼은 절박했다.
다음 날 돌아온 황제의 폐하의 인장이 찍힌 답장에는 애쉰 부인의 말을 잘 들으라는 내용만 적혀 있었다. 제 뜻을 이루지 못한 린델은 불쌍한 피후견인을 굽어 살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다시 써서 보냈지만 황제의 두 번째 답장은 처음 그대로였다.
그리고 황제의 두 번째 답장이 도착한 그날, 제라르 경이 보낸 편지도 도착했다. 안부 인사와 함께 방문을 청하는 것이었다. 린델은 흔쾌히 응했고 애쉰 부인도 이번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린델이 주인이 되어 손님을 초대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애쉰 부인은 첫 인상이 중요하다면서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그리고 린델은 오랜만에 아셰리드엘의 인적 사항을 다시 점검했다. 사람을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훌쩍훌쩍 잘 지나갔다. 그리고 드디어 약속의 날이 되었다.
“린델 님. 제라르 경께서 도착하셨습니다.”
하녀가 찾아와 제라르의 도착을 알렸다. 린델은 한 번 더 거울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열흘 만에 만나는 대화 상대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2층 계단을 내려가자 제라르 경이 이제 막 현관 홀로 들어서고 있었다. 린델은 얼른 그에게 다가갔다.
“반갑습니다, 제라르 경. 오시는 길은 편하셨습니까? 날씨가 너무 덥죠?”
“마차로 편하게 왔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셰리드엘 경.”
“저야말로 제라르 경께서 찾아주셔서 아주 기쁘답니다. 시원한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린델은 잔뜩 들뜬 상태에서도 귀한 손님을 맞이한 주인 역할을 착실히 해냈다. 그가 제라르를 안내한 곳은 2층의 소응접실 테라스였다.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테라스는 나무 그늘과 바람으로 별장에서 가장 시원한 곳 중 하나였다.
린델이 권한 자리에 앉은 제라르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감탄했다.
“풍경이 훌륭합니다. 시원하기도 하고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입니다. 밤에는 약간 쌀쌀할 정도의 바람이 불어서 여름의 더위는 느껴지지도 않는답니다.”
제라르의 맞은편에 앉은 린델은 능숙하게 말을 받았다. 호수에서 부는 바람 덕분에 밤에는 아주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휴양하고 계신다기에 걱정하였습니다. 지금은 무탈한 듯 보이시는데, 어디가 안 좋으셨던 겁니까?”
“그게……. 부끄럽지만 감기에 걸려서 쓰러진 것뿐입니다. 이제 다 나았는데, 휴가를 보름이나 받아버리고 말았습니다. 다들 너무 과하게 걱정하셔서요.”
린델은 솔직하게 자신의 상태를 말하면서 마지막에는 사감을 섞었다. 그리고 눈치 빠른 제라르는 린델이 말한 다들이 누군지 대충 알아들었다. 황제가 배행 마법사를 유난히 챙긴다는 것은 이미 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