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137)

-39화-

짧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하녀가 다과를 그들 앞에 차렸다. 여름에 어울리는 냉차와 셔벗이었다. 양해를 구하고 냉차를 길게 들이켠 제라르가 다시 대화를 이었다.

“감기도 위험합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치유 마법은 외상만 고칠 수 있으니까요.”

“금방 나았습니다. 보시다시피 아주 건강하지요.”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아셰리드엘 경. 혹시 데스탄 경이 북관으로 발령받은 것은 알고 계십니까?”

“아니요. 모릅니다.”

갑자기 데스탄의 이름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린델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이후에 이어지는 제라르의 설명은 놀랍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사냥대회에서 데스탄이 린델을 말로 위협했다는 것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 널리 퍼졌다. 그리고 다음 날 황제는 데스탄을 장교로 임명하고 북관으로 보낸다는 칙명을 내렸다. 신체 건강한 황족은 군에서 경험을 쌓는 것을 명예로 여겼다. 지금껏 루미아나 대공주의 비호로 데스탄의 발령이 미뤄졌던 상황에서 급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감히 황제의 배행 마법사를 위협한 질책성 발령이었다.

제라르의 설명을 들은 린델은 살짝 인상을 썼다. 결투에서 져서 망신을 당한 데스탄에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가, 카시어스가 내린 결정이라 그냥 수긍해 버렸다. 그리고 조금 통쾌한 기분도 들었다.

“놀라신 모양이군요.”

“아뇨.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조금 통쾌하긴 합니다. 제라르 경께서 결투에서 이긴 것만큼은 아니지만요. 이건 친구니까 말씀드리는 거예요. 저는 공식적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답니다.”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듯 작게 속삭인 린델은 마지막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러자 제라르가 웃음을 터트리며 당연히 비밀은 지키겠노라고 맹세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대화가 이어졌다. 제라르는 린델의 검술 스승이 될 하스넨 남작의 말을 전했다.

“아셰리드엘 경의 얼굴을 보고 제자로 삼을지 말지 정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너무 마음 상해하지 마세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스승님께서는 좀…… 괴팍하신 편이세요. 아, 저도 친구이자 동문이니까 말씀드리는 겁니다. 비공식적인 거예요. 스승님 귀에 들어가면 두들겨 맞을지도 모릅니다.”

제라르는 훌륭한 이야기꾼이었고 검술 수업에 대한 이런저런 정보를 재미있게 풀어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제라르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애쉰 부인이 다급히 나타났다. 그녀는 약속에 없는 방문객이 나타났음을 알렸다.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황제의 내방 소식에 린델도, 제라르도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1층의 응접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기사단 정복을 입은 황제가 서 있었다. 그 옆에는 근위 기사단장인 시베르 백작도 자리했다.

린델은 카시어스를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감기에 걸려서 앓았던 그날 이후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열흘 만이었다. 단숨에 카시어스에게 다가가려고 한 린델을 멈추게 만든 것은 제라르였다. 앞서 있던 제라르가 자리에 멈춰 서서는 무릎을 꿇는 것을 보고 린델도 허둥지둥 따랐다.

황제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린 것은 제라르였다.

“위대한 불꽃의 지배자이시며, 열하나의 강과 일곱 산맥의 군주이시며, 법과 정의의 수호자이신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빛나는 영광이 무궁하기를.”

“일어나라.”

카시어스의 명령에 린델은 제라르와 함께 일어섰다.

“제라르 경이 선객이었군. 무슨 일이지?”

“스승님의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하스넨 남작에게 들었다. 그의 기준이 까다롭긴 하지. 제라르 경, 만남을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아셰리드엘은 짐과 함께 갈 곳이 있다. 아셰리드엘, 옷을 갈아입도록 해. 그리핀을 타고 갈 테니까 복면도 챙기고.”

“명 받들겠습니다.”

카시어스의 명령은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나던 린델은 바짝 긴장했다. 린델이 그리핀을 탄 적은 카시어스와 동행하여 몬스터를 사냥하러 갔던 그때 딱 한 번뿐이었다. 분위기는 그때보다 더 무거웠다. 게다가 근위 기사단장인 시베르 백작이 동행했다는 것은 공무라는 뜻이었다.

린델은 애쉰 부인의 도움을 받아 재빨리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응접실로 돌아왔다. 그러자 카시어스가 지체 없이 걸음을 옮겼다. 린델은 카시어스를 뒤따르며 제라르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제라르 경, 다음에 뵙겠습니다.”

“네. 다음에 뵙지요. 그리고 하늘 위는 춥습니다. 감기 조심하십시오.”

별장의 앞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리핀은 모두 다섯 마리였다. 카시어스가 나타나자 그리핀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근위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린델의 자리는 황제의 뒤였다.

10명이 모두 올라타자 그리핀이 날갯짓을 하며 지체 없이 날아올랐다. 제라르는 그리핀이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자리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오늘의 방문을 아주 고대하고 있었다. 제일 좋은 옷을 준비하고는 어린아이처럼 밤잠을 설쳤을 정도였다. 예상대로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황제가 방해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린델은 황제의 배행 마법사였다. 황제가 직접 찾아와서 데려가겠다고 하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그를 황제에게 빼앗겼다는 기분이 들어버렸다. 그가 자신의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대륙의 동남쪽 대부분을 차지한 할엔라드 제국을 가로지르려면 말을 타고도 15일이 걸렸다. 가장 빠른 소식을 전한다는 파발로도 7일이 걸렸다. 하지만 그리핀이라면 하루 낮이면 제국을 종단할 수 있었다.

빠르고 신속한 그리핀의 단점이 하나 있다면 하늘 높이 날기 때문에 찬바람을 온전히 맞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린델은 3시간 넘게 찬바람에 시달린 얼굴을 문지르며 그리핀에서 내려섰다. 옷을 따뜻하게 입고, 눈 아래를 가리는 복면도 쓰고, 카시어스의 등 뒤에 바짝 붙어왔지만 얼굴과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몬스터 토벌에 따라나섰을 때보다 상태가 심했다. 그나마 그때는 1시간 남짓 걸렸던 것에 비하면 이번에는 3시간이 넘었다.

“이러다가 다시 감기에 걸리겠군.”

같이 그리핀을 타고 온 카시어스가 추위 따위는 느끼지 못했다는 얼굴을 하고는 한마디 했다. 찬바람을 온몸으로 맞고도 진짜 멀쩡해 보였다. 린델은 그가 원망스럽고도 부러운 마음을 감추며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폐하의 은혜 덕분에 편히 왔습니다.”

“감기에 걸리면 다시 휴가를 주겠다.”

“황공한 배려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허나 이제 휴가는 괜찮습니다. 열흘이나 쉬었더니 힘이 넘쳐납니다, 폐하.”

휴가는 끔찍했다. 제발 일을 하게 해달라고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었기 때문에 린델은 절박하고도 간절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되돌아온 카시어스의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나중에 알려주겠다. 뒤를 따르거라.”

“폐하를 따르겠습니다.”

린델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렸다. 카시어스는 미욜 산맥으로 간다는 것만 알려주었다.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린델이 아는 것이라고는 나무로 둘러싸인 이곳이 미욜 산맥의 어디쯤이라는 것뿐이었다. 인가라고는 하나 보이지 않는 깊은 숲속에 수백 명의 군인들이 바글거리는 것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황제의 뒤를 따르는 것은 배행 마법사인 자신의 일이었다. 린델은 바짝 긴장한 채 카시어스와 함께 움직였다.

무장을 한 군인 무리가 나타나 카시어스 앞에서 가슴에 손을 얹고 예를 올렸다. 자신을 북관의 밀레농 후작이라고 소개한 중년 사내는 카시어스를 안내했다.

방진을 짜고 대기하고 있던 군인들이 황제를 알아보고는 가슴에 손을 얹는 예를 올렸다. 린델은 군인들이 모두 한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밀레농 후작이 그쪽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도착한 곳은 수직 절벽으로 가로막힌 막다른 곳이었다. 정확히는 사람 몇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동굴 입구였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은데, 동굴 안에서 사람이 한 명 튀어나왔다. 세투아였다.

“제국의 지존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들어가자.”

린델은 카시어스가 권하는 대로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선스톤으로 환하게 밝혀 놓은 동굴 안은 밖에서 봤을 때보다 넓고 깊었다. 동굴 안에도 군인들과 근위 기사들이 있었고, 마법사도 몇 있었다. 그들 역시 황제를 알아보고는 소리 없이 예를 표했다.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마법사가 더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다르자 린델이 예상하지 못한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선스톤이 집중적으로 비추는 벽면에 시커먼 구멍이 뚫려 있었다. 물리적인 구멍이 아니었다. 린델은 불길함을 느끼며 그대로 멈춰 섰다.

“차원의 틈이다.”

“!!”

“신들께서 짐에게 천벌을 내린다는 소문의 근원지이지. 이곳을 찾는 데 오래 걸렸어.”

카시어스의 혀 차는 소리에 린델은 불길한 구멍을 바라보았다. 미궁이나 폐허에 비정상적으로 마력이 고이면 차원이 비틀려 차원의 틈이 생긴다고 배웠다. 그리고 틈을 통해 저쪽의 생물인 몬스터가 건너온다고 했다. 즉, 이곳이 동부를 습격한 몬스터가 시작된 곳이라는 뜻이었다.

“수호 결계는 성공적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버틸지는 미지수입니다, 폐하.”

세투아가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

“차원의 틈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그중에 하나는 자연스럽게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인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지. 또 하나는 차원 반전 마법이라는데, 이게 뭔지는 아무도 몰라. 흑마법으로 분류되어 실전된 지 오래거든. 마지막은……. 직접 확인하는 게 낫겠군.”

직접 확인하라고 한 카시어스가 장갑을 벗고는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냈다.

“아셰리드엘.”

카시어스의 부름에 린델은 그가 내민 반지를 두 손으로 받았다. 린델에게 넘어온 반지는 모두 다섯 개였다. 카시어스의 손가락에는 모두 여섯 개의 마력 제어 반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누구보다 강력한 마력의 소유자라는 증거이자, 그의 힘을 억누르는 족쇄이기도 한 반지는 이제 하나만 남았다.

린델은 그제야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인지 깨닫고는 얼른 장갑을 벗었다.

“모두 세 걸음씩 뒤로 물러나라.”

카시어스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반지를 다섯 개나 뺀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컨디션이 바닥이었어도 세 개 이상을 뺀 적이 없었다. 반지의 존재는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아무런 방해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지가 없어지자 몸이 가벼워지다 못해 힘이 넘쳐났다. 그것은 온전한 기쁨이었다.

차원의 틈이 발견되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때까지 내버려 두는 것이 보통이었다.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년 동안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군대를 파견하여 몬스터를 토벌했다. 카시어스는 일을 키울 생각이 없었다. 특히 동부에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돌고 있을 때는 더욱 그랬다. 무엇보다 자신에게는 디비티에가 있었다.

카시어스는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들고는 마력을 집중시켰다. 마력을 머금은 칼이 푸른색으로 일렁거렸다.

“세 걸음 더.”

카시어스의 명령에 다들 다시 뒤로 물러났다. 그들과 달리 카시어스는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거침없이 차원의 틈에 검을 꽂아 넣었다.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린델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몸이 뒤로 밀려나는 것처럼 느꼈다. 엄청난 힘이었다.

“세상에.”

“헉.”

주변 사람들이 저마다 신음과 감탄을 흘렸다. 린델 역시 반지를 손에 꽉 쥔 채 굳었다. 강력한 마력의 소유자라고 듣기만 했을 뿐, 그게 무엇인지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제라르와 데스탄이 결투에서 보여주었던 투기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굉장하다고 감탄을 거듭하는 사이에 시커먼 구멍이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순간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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