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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40/137)

-40화-

“폐하!”

기이한 정적 속에 카시어스를 부른 것은 세투아였다. 그는 지금 황제가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었다. 당장에 반지를 껴야 했다.

칼을 갈무리하고 천천히 뒤돌아선 카시어스가 린델을 불렀다.

“아셰리드엘.”

린델은 홀린 것처럼 카시어스에게 다가갔다. 기세가 사납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형히 빛나는 황금색 눈은 늑대를 닮은 것이 아니었다. 카시어스 그 자신이 위험한 생물이었다. 그래도 그가 무섭지 않은 것은 곧 괜찮아질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폐하. 잠시 손을…….”

카시어스는 자신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반지를 끼우는 린델의 뒷머리를 내려다보았다. 온몸에 넘치는 마력을 제어하는 반지의 존재는 혐오스러웠다. 하지만 린델의 손이 닿는 순간에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다.

이토록 완벽한 순간이라니.

그건 더없는 기쁨이었다. 쾌락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의 존재가 이렇게나 매혹적인 것인가 하는 의문이 문득 들었다.

거리를 두고 지켜보겠노라 마음먹고는 열흘 동안 보질 못했다. 그동안은 별문제 없었다. 자신을 보고 반가워하는 녀석을 보며 덩달아 기뻐졌다. 거기까지는 순수한 호의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을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녀석을 느끼자니 그대로 끌어안고 싶어졌다.

곤란했다. 안 그래도 사랑스러운 녀석인데, 정말로 반해버릴 것 같았다.

“다 됐습니다.”

손가락에 다섯 개의 반지를 모두 끼운 린델이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손을 놓으려고 했다. 떨어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자마자 카시어스는 반사적으로 잡은 손에 힘을 주고는 잡아 당겼다. 린델이 도망가지 못하게 어깨를 붙잡고는 꽉 껴안았다.

“폐하?”

“널 어찌해야 할까?”

뜻밖의 상황에 린델은 어리둥절하다가 곧 민망해졌다. 방금 전까지 엄청난 무위를 보여준 황제 폐하께서 자신을 끌어안고 계셨다. 등 뒤로 지켜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기는요.

“끌어안고 계십니다.”

린델은 작게 속삭였다. 카시어스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맞닿은 몸으로 그가 소리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맞아. 그러고 있지.”

카시어스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린델을 끌어안고 있는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 알고 있었다. 더 이상의 인내를 할 생각은 없었다.

카시어스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린델을 품에서 풀어주었다. 그러나 손은 놓지 않았다.

“밀레농 후작. 며칠 더 지켜보고, 문제가 없다면 감시 인원만 남기고는 철수해라.”

“예, 알겠습니다.”

“가자.”

가자고 하면서 발을 뗀 카시어스는 여전히 손을 놓지 않았다. 얼떨결에 몇 발자국 따라가던 린델이 손을 슬쩍 빼려고 했다. 하지만 카시어스가 손을 더 단단히 잡았다.

“폐하?”

“왜?”

이쪽을 돌아보는 카시어스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해맑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린델은 작게 속삭여야 했다.

“손을 놓아주십시오.”

“싫은데.”

“……!!”

“무어라 할 사람 아무도 없다.”

카시어스는 가볍게 말했지만 린델은 그건 아니다 싶었다. 둘이 사귄다고 소문이 나긴 했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어쨌든 비공인이었다. 황궁에서도 사적인 공간에서만 애정을 과시했다.

“지금 저는 폐하의 배행 마법사입니다.”

“짐이 총신의 손을 잡고 걸을 수도 있지.”

궤변이었다. 하지만 궤변이라고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한 린델은 손을 잡아끄는 카시어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 걸었다. 동굴을 빠져 나와 다시금 예를 표하는 군인들 사이를 황제와 손을 잡고 걷게 된 린델은 창백하게 질리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결국 카시어스의 에스코트까지 받으며 그리핀에 올라타서야 손을 놓을 수 있었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그리핀에 올라탄 린델은 눈빛으로 물었다. 그러자 카시어스가 웃었다.

“그러고 싶어서.”

“폐하.”

“좀 더 다른 걸 하고 싶은데, 참고 있는 거야.”

무엇을 참고 있으시냐고 묻기가 어려웠다. 왠지 참고 있다는 걸 카시어스가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베르 백작.”

카시어스가 시베르 백작을 불렀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그가 품속에서 금속으로 된 작은 병을 하나 꺼내 카시어스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 카시어스가 그것을 린델에게 내밀었다.

“위스키다. 한 모금만 마셔라.”

“위스키요?”

“몸을 데워줄 게다. 이대로 돌아가면 진짜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니까. 한 모금만 마셔야 해.”

“감사합니다.”

몸을 따뜻하게 해준다는데 마다할 건 없었다. 불행히도 위스키는 지독하게 독해서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기분을 맛보았다. 겨우 한 모금을 마신 린델은 얼굴을 찡그리며 기침을 하는 재주를 보이면서 금속 병을 카시어스에게 돌려주었다. 위스키가 독하다고 경고를 해주지 않은 카시어스를 원망스럽게 쳐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독한 모양이지?”

“예. 독합니다. 쿨럭.”

입에서는 독한 알코올 향이 풀풀 풍기는데, 카시어스가 즐겁다는 듯 웃어서 더 원망스러워졌다.

“장갑을 껴라. 그대로라면 손이 시릴 게다.”

그리핀에 올라탄 카시어스가 린델의 목에 걸려 있던 복면을 코끝까지 끌어 올려주었다. 장갑을 착용하라는 명령에 착실히 따르던 린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했다. 심장이 뛰어서 더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리핀이 별장 후원에 내려섰을 때는 이미 해가 서쪽으로 한참 기운 다음이었다.

“잡아.”

먼저 그리핀에서 내린 카시어스가 손을 내밀었다. 린델은 그의 손을 잡으면서 이상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까부터 카시어스가 뭔가 달랐다. 딱 꼬집어 뭐라 할 수는 없었지만 확실히 달라졌다.

그렇게 의구심을 품고 그리핀에서 내려서던 린델은 다리가 풀리는 바람에 순간 휘청거리고 말았다. 카시어스가 손을 잡고 힘을 주지 않았다면 주저앉았을지도 몰랐다.

“어지러우냐?”

카시어스가 손을 잡은 채로 물었다. 린델은 좀 많이 부끄러웠다. 잘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꼭 카시어스 앞에서 못난 꼴만 보였다.

“괜찮습니다. 오래 앉아 있어서 그랬습니다.”

그리핀을 타고 왕복 여섯 시간을 이동했다. 위스키 덕분에 추위는 별로 느끼지 못했다. 그저 한 자세로 움직이지 못한 탓에 몸이 굳은 것뿐이었다. 괜찮다고 하는데 카시어스가 손을 뻗어 복면을 끌어 내려주었다.

“괜찮다고만 하면 안 돼.”

“조금, 조금 몸이 굳은 것뿐입니다. 금방 나아질 거예요.”

“얼굴이 상기되었어.”

장갑을 낀 카시어스의 오른손이 앞머리를 살짝 넘겨주는 것을 린델은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손등으로 뺨을 쓸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둔하지.”

혀를 찬 카시어스가 엄지로 입술을 살짝 누르고서야 린델은 눈을 크게 떴다.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뭉글한 감촉이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린델은 황망한 기분으로 카시어스를 봐야 했다. 그는 웃고 있는지 찡그리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래도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거절하려면 피하라고 했었을 텐데.”

“폐하께서 그러실 줄은…… 몰랐어요.”

린델은 멍하니 대답했다. 피하라고 배우기는 했지만 카시어스가 그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둔하다니까.”

“자꾸 둔하다고 하시면 속상합니다.”

나름 눈칫밥을 먹고 자란 린델은 둔하다는 소리가 싫었다. 용기를 내서 항의를 하는데 그때 카시어스가 뒤를 향해 손짓을 했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근위 기사들이 그리핀에 올라타고는 하늘 높이 올랐다.

별장 후원에는 이제 린델과 카시어스뿐이었다. 애쉰 부인이 뒷문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지만, 그녀는 다가오지는 않았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카시어스가 입을 열었다.

“네가 사교계에 익숙했다면,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을 거야. 돌려 말하지 않겠다. 너는 눈치도 없고, 둔하기까지 하니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못 알아들을 테니.”

“?!”

“짐이 그대를 은밀히 욕망하고 있어.”

뜻 모를 화제 전환에, 눈치도 없고 둔하기까지 하다는 비난 끝에 욕망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린델은 아연해졌다. 순간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었다.

“애석하게도 그대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지. 특히 여기가.”

카시어스가 검지 끝으로 린델의 심장 위를 살짝 눌렀다. 그 순간 린델은 심장이 멈춘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득해진 머리로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머리로, 가슴으로, 짐의 구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봐. 짐과 무엇을 하고 싶은지 말이야.”

“저는…….”

“당장에 거절하지 말고. 여기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부터 깨달아.”

카시어스가 다시 한 번 심장 위를 톡톡 두드렸다. 그때마다 린델은 심장이 바닥에 툭툭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욕망에 이어 구애란다.

눈앞에 웃고 있는 카시어스가 있는데도 아무래도 현실감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오만한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정말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의심하고 있는데 호수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뺨을 쓸고 지나갔다. 그제야 정신이 아주 조금 돌아왔다.

“짐은 꽤나 좋은 애인이 될 거야. 그리고……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매달리지도 않지. 그러니까 진지하게 고민해.”

“네…….”

숫제 강요였다. 하지만 카시어스는 진지했고, 린델은 거절을 할 수 없었다. 짧게 대답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카시어스가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손을 줘.”

린델은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카시어스가 손을 잡아 올리고는 손등에 입을 맞췄다. 린델은 장갑을 끼었음에도 불구하고 카시어스의 입술이 닿은 곳에서 열기가 퍼지는 것을 느꼈다.

“나중에 보자.”

웃으며 인사를 한 카시어스가 그리핀을 타고는 날아올랐다. 린델은 그가 점이 되어 사라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욕망이란다.

다시 한 번 찾아온 충격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린델은 제멋대로 뛰고 있는 심장 위에 손을 얹었다. 여기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어떻게 깨달아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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