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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41/137)

-41화-

보름의 휴가를 보내고 온 린델은 평소와 다름없이 제자리를 지키며 황제의 뒤를 따랐다.

닷새 만에 만난 카시어스는 여전히 바빴다. 정무회의를 마치고는 오찬에서는 주교와 사제들을 만났다. 카시어스는 활짝 웃으면서 내년 예산을 더 받고 싶으면 그에 걸맞은 성과를 보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수확제에 있을 대제사의 진행 사항도 꼼꼼하게 점검했다.

그렇게 우아하게 주교를 쪼아대며 오찬을 끝낸 카시어스는 알현실에 나서기 전에 잠시 튤립의 방에서 휴식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일은 계속해서 밀려들었다. 제일 먼저 시종장이 나섰다.

“어젯밤에 랑데 궁의 정원에서 있었던 화재의 범인이 자수를 했습니다. 윌링턴 포츠라는 자인데, 서쪽 문의 경비병으로 아우스트 경의 추천을 받았습니다.”

“방화 이유는?”

“윌링턴은 방화가 아니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촛불이 넘어져서 벗어둔 옷가지에 불이 붙었고, 그게 다시 덤불에 옮겨붙은 거라고 했습니다.”

벗어둔 옷가지라는 말에 카시어스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광대한 황궁의 정원은 은밀한 만남의 장소가 되곤 했다. 특히 여름밤이면 더 했고 그래서 갖가지 사건 사고가 일어났다.

“희극이 비극으로 끝났군. 상대는?”

“랑데 궁의 주방 하녀입니다.”

시종장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난밤, 랑데 궁의 정원에서 화재가 있었다. 하녀와 경비병이 몰래 만나는 거야 흔한 일이었다. 실외에서 즐기다가 그냥 들키기만 했다면 시종장과 근위대장에게 제각각 잔소리를 듣고 근신을 받는 것으로 끝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원의 나무를 태워먹은 시점에서 황제에게 처우를 맡겨야 했다.

“고의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화재의 위험은 어떤 이유로든 자비를 베풀 수 없지. 허나 자수를 했고 큰 피해가 없었던 점을 감안하겠다. 최고 벌금형에 처하고 둘 다 궁에서 쫓아내라.”

“명 받들겠습니다.”

카시어스는 간단하게 판결을 내렸다. 황궁에서 화재는 가장 위험한 사고였다. 고의든 아니든 화재로 사람이 다치거나 건물이 전소라도 되면 이유 불문하고 사형이었다. 그나마 나무 하나만이 불에 타는 바람에 벌금으로 끝난 것이다.

시종장이 물러나자 이번에는 다른 근위시종이 다가와 황제에게 렌드릭 장군의 서신을 전했다. 살짝 찡그린 얼굴로 서신을 읽어 내려가는 카시어스를 지켜보며 린델은 복잡한 기분을 가눌 수가 없었다. 정원에서 밀회를 가지다가 화재를 일으킨 연인들의 이야기를 듣자니 머리 한쪽에 미뤄두었던 고민거리가 우르르 떠올랐기 때문이다.

5일 전, 황제 폐하께서 풀지 못할 문제를 던져두고 가셨다.

은밀히 욕정하고 있다고 했다.

신전에서 자라고 사제를 지망했던 린델은 연애나 성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무지한 것은 아니었다. 사제가 되려면 마을의 온갖 사건 사고를 중재해야 했다. 그중에는 치정 문제가 많이 있었다.

카시어스의 구애가 육체관계를 의미하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머리로는 이해했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알 수가 없었다.

보름 전, 카시어스 때문에 발정 난 망아지가 되었다고 겸허히 인정하긴 했다. 밤잠을 설친 적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와 뭘 해보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우선 그는 남자였다. 그리고 지고의 존재이신 황제 폐하이시기도 했다. 카시어스는 진지하게 고민하라고 했지만, 자신이 카시어스와 육체적 관계를 가진다는 가정을 하는 순간에 머리가 굳어버렸다. 어떨 때는 숨이 멈출 것 같고, 어떨 때는 얼굴이 달아올라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게 5일 내내 고민하고 좌절하던 순간을 떠올리며 린델은 소리 없이 한숨을 삼켰다. 답이 없는 고민거리의 주인공이신 황제 폐하가 원망스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얼굴을 보면 기쁘고 반가운데, 그래도 좀 그랬다.

“아셰리드엘.”

“예, 폐하.”

다시 한 번 한숨을 삼키는데 카시어스가 불렀다. 린델은 한달음에 카시어스 곁으로 다가갔다.

“앉아.”

“황공합니다.”

린델은 카시어스가 권한 자리에 앉았다. 그의 얼굴을 마주하며 고민도, 불만도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일로아나 백작이 쓰러졌다는 것은 알고 있나?”

“듣지 못했습니다. 폐하.”

“위염이라고 하더군. 스트레스가 심했던 모양이야.”

건설청 장관인 일로아나 백작은 정무회의에서 황제의 질책을 받은 후에 정열적으로 일에 매달렸다. 위염으로 쓰러질 정도면 엄청나게 무리를 했다는 소리였다.

“장소가 나빴어. 하필이면 계단에서 쓰러지는 바람에 굴렀거든. 다행히 따로 다친 곳은 없다는데 그래도 오늘은 입궁도 못 했지. 며칠 쉬라고는 했지만 지금 백작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어.”

“급한 일이 있으시니 마음 편히 쉬기 힘드시겠지요.”

“일로아나 백작이 아주 맹탕은 아닌데, 이번에는 잘못 걸렸어. 돈이 나올 곳이 없는데 공사를 진행하려니 위에 구멍이 날 수밖에. 아무래도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잘못했노라고 찾아와 빌지는 못할망정 미련하게 버티다니.”

카시어스가 혀를 쯧쯧 찼다. 린델은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일로아나 백작이 황제의 길을 복구하는 데 쓰일 예산을 화재로 피해를 입은 탈봇 항에 빼돌렸다는 것은 유명한 일이었다. 황제는 일로아나 백작의 파면을 예고하며 빠른 시일 내에 복구공사를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일로아나 백작에게 계산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린델이 알기로는 탈봇의 유력 귀족들과 토호들이 내놓을 기부금으로 황제의 길 복구 비용을 충당할 예정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기부금은 예상보다 적게 걷혔고 그래서 일로아나 백작이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것이 휴가를 받기 직전에 들은 이야기였다.

“일로아나 백작께서 많이 곤란하시겠습니다.”

“짐이 피도, 눈물도 없다고 하나 불가능한 것을 해내라고 하지 않는다. 일로아나 백작만큼 일을 해낼 자도 없으니 구제를 해줄 수밖에.”

“복구를 늦추실 생각이십니까?”

“설마. 황제의 길은 짐의 것이다. 엉망인 꼴로 내버려 둘 수 없지. 아셰리드엘. 이대로 백작을 찾아가 그의 안부를 살펴라. 이미 백작에게는 연통을 해두었으니 곧 가면 된다. 그에게 펠튼 자작을 만나라고 전해. 아, 펠튼 자작은 짐의 재정관이야. 자랑이지만 짐은 제국 제일의 부자거든. 구멍 난 예산쯤이야 얼마든지 메꿔줄 수 있어.”

자신의 입으로 제국 제일의 부자라고 자신만만하게 자랑하는 카시어스 때문에 린델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일국의 군주라고 해서 모두 부자는 아니었다. 전쟁으로 사치로 국고를 탕진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어느 나라의 국왕은 파산을 선언한 역사도 있었다.

그러나 할엔라드 제국의 황제는 대대로 부자였다. 마탑에서 만들어내는 선스톤의 수익 대부분이 국고가 아니라 황제의 개인 재산으로 귀속되기 때문이다. 초대 황제가 마탑을 상대로 희대의 사기 계약을 한 덕분에, 황제가 제국뿐만이 아니라 대륙에서도 제일가는 부자가 된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였다.

황제께서 개인 자금을 지원한다면 일로아나 백작의 위염은 단번에 나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린델은 카시어스가 자신에게 드디어 제대로 된 일을 주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황제의 의중을 전하는 것은 꽤나 중요한 일이었다.

“폐하께서 아량을 베푸시면 일로아나 백작께서도 한시름 놓을 겁니다.”

“그래도 짐의 경고는 여전하다고도 일러라. 다음은 없다고도 전하고.”

“백작께 전하겠습니다.”

린델은 기쁘게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카시어스가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여주지 않았다.

“가기 전에.”

“하명하십시오.”

“고민은 했어?”

열의에 넘쳐 있던 린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근위시종들이 모두 대기하고 있는 와중에 그 화제를 꺼낼 줄은 몰랐다. 조금 전까지 일로아나 백작을 향해 투덜거린 것이 거짓말인 듯 웃고 있는 카시어스는 아주 즐거워 보였다.

린델은 조금 전에 느꼈던 억울함이 다시금 샘솟았다. 능숙하게 감정을 숨기라고 했는데, 상대가 카시어스라면 그게 쉽지 않았다. 린델은 입술을 삐죽이고 싶은 것을 참으며 솔직히 말했다.

“했습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아직 모르나 보군.”

“예, 모릅니다.”

카시어스가 웃음을 참고 있다는 것을 숨기지 않아서 린델은 조금 더 딱딱하게 대꾸했다. 하라는 대로 진지하게 생각해 봤지만 카시어스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심장 안에 들어 있는 게 뭔지도 몰랐다.

“안색이 좋지 않은 걸 보니 꽤나 힘들었던 모양이군.”

“아니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폐하.”

“좋은 징조가 아닌데.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지금은 때와 장소가 좋지 못하니까.”

카시어스가 부드럽게 말을 돌리자, 조용히 두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던 근위시종들이 저마다 속으로 흠칫 떨었다. 황제를 바로 곁에서 모시는 근위시종의 가장 귀중한 덕목은 충성심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보고 듣는 것들은 어떻게든 궁중에 퍼지게 되어 있었다.

황제가 일로아나 백작을 구제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매우 중요한 정보였다. 어쩌면 그가 해임이 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후임을 두고 물밑에서 견제하던 세력들이 솔깃할 만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일로아나 백작에게 희소식을 전할 사자로 배행 마법사를 선정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특히 배행 마법사가 보름 동안의 휴가를 끝내고 돌아온 직후라서 더욱 그랬다.

지난 며칠 동안 궁중에는 황제의 비공인 연인에 대한 얄궂은 소문이 퍼진 상태였다. 배행 마법사가 과로로 쓰러져서 휴가를 받은 것이 아니라, 데스탄의 처벌이 약하다는 시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누구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웃지 않는 냉철한 마법사보다는 요망하고 욕심 많은 황제의 연인이 더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법이었다.

그 와중에 황제께서는 휴가 중인 배행 마법사를 데리고 차원의 틈을 닫으러 가셨다는 건 확실한 사실이었다. 거기다 이번에는 배행 마법사에게 첫 번째 임무를 내리다 못해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누다 보니 다들 행간을 읽으려고 귀를 기울였다. 무슨 고민이고, 뭘 모르고 힘들어 하는지 궁금했지만 황제가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들로서는 나중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린델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시어스가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에 린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러나옵니다.”

린델은 황제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튤립의 방을 나섰다. 그리고 카시어스에게는 다시 일이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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