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137)

-42화-

규칙적으로 흔들리던 마차가 멈췄다. 가만히 창밖의 풍경을 구경하고 있던 린델은 문이 열리는 것을 기다렸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붉은 기와에 최신 유행과는 거리가 먼 고풍스러운 저택이 눈앞에 나타났다. 천천히 마차에서 내리자 대기하고 있던 저택의 시종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이미 약속된 방문이었다. 린델은 마법사를 상징하는 약식 망토를 걸치고 황실 문양을 단 마차를 타고 왔다. 황제의 측근인 배행 마법사로서의 공식적인 임무였다.

“백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린델은 시종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에는 일로아나 백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셰리드엘 경. 어서 오십시오.”

일로아나 백작이 핼쑥한 얼굴을 하고 린델을 반겼다. 일로아나 백작은 궁중 귀족들이 그렇듯 언제나 완벽하게 외모를 가꿨다. 쉰 살이 훌쩍 넘는 나이에도 언제나 활기가 넘쳤다. 그런데 오늘은 너무나 힘없는 모습이라 린델은 차마 웃어주지 못하고 정중하게 답했다.

“와병 중이신데 이렇게 맞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로아나 백작님.”

“병이라고 할 것도 아닙니다. 폐하께서 안부를 챙겨주시다니 오히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앉으시죠.”

린델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황제의 배행 마법사로 황궁을 돌아다니긴 했지만 단독으로 귀족의 저택을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린델은 침착했다.

공식적인 방문 목적은 황제를 대신한 병문안으로 백작의 안부를 챙기는 것이었다. 신전의 종사로 있으면서 자주 했던 일이라 어렵지 않았다.

“일로아나 백작님. 얼굴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하하하. 별거 아닙니다. 금방 낫는다고 하더군요.”

“보통 위를 상하게 하는 것은 나쁜 식습관이지만, 백작님의 경우는 스트레스겠지요. 남부 공도를 복구하는 데 많은 고충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폐하께서 백작님의 고충을 덜어드리실 겁니다.”

“?!!”

린델은 말을 길게 끌지 않고 단숨에 방문 목적을 밝혔다. 궁중인으로서는 세련되지 못한 화법이었지만, 린델은 돌려 말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입궁하시면 폐하의 재정관인 펠튼 자작을 만나보십시오. 폐하께서 부족한 복구 비용을 보조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폐하의 개인 자금으로요. 황제의 길은 폐하의 것이니까요. 예, 맞습니다. 폐하께서는 제국 제일의 부자이시지 않습니까.”

일로아나 백작은 쓰라린 위를 느끼지도 못할 만큼 충격을 받았다. 황제가 복구 비용을 보조한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돈이 돌지 않자 복구공사가 늦어지고 있었다. 파면이야 예고되었지만, 예산 유용으로 고발당하면 끝장이었다. 초조함과 스트레스로 위염이 생겼다. 그런데 황제께서 개인적으로 복구 비용을 보조하신단다. 눈 뜬 채로 기절하고 싶을 정도로 감동이었다. 웃지 않는 냉철의 마법사가 하늘에서 내려오신 자애의 천사님처럼 보일 정도였다.

“일로아나 백작님. 저는 폐하의 심중을 알지 못합니다. 대신 폐하께서 하셨던 말씀을 전해드릴 수는 있습니다. 아무리 당신이라도 불가능한 일을 해내라고는 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폐, 폐하께 감사의 인사를……. 제가 직접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황제는 고약한 방법으로 신하들을 조련한다는 평이 자자했다. 그리고 린델 역시 그에 동의하고 말았다. 구명줄을 부여잡은 일로아나 백작의 얼굴은 충격에 이어 환희로 빛나고 있었다. 앞으로 일로아나 백작의 충성심은 하늘을 찌를 것이다.

“그래도 위염에 시달리기 전에 폐하께 먼저 도움을 구하시는 게 옳았습니다. 일로아나 백작님.”

“신하된 입장으로 자신의 무능함을 고하기란 어려운 법이지요, 아셰리드엘 경.”

“예, 그렇지요. 폐하께서는 경고도 잊지 말라고 하셨고, 다음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명심하십시오.”

“물론입니다.”

“얼굴이 한결 좋아 보이십니다. 푹 쉬고 몸을 회복하십시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친 린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일로아나 백작이 얼른 따라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죽상을 하고 있던 일로아나 백작이 활짝 웃었다.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술은 위염 증상을 악화시킵니다. 아주 기쁘시겠지만 그래도 술은 마시지 마십시오, 백작님.”

린델은 백작의 손을 맞잡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을 했다. 임무를 완수했다는 생각으로 뿌듯한 와중에 일로아나 백작이 웃으면서 허물어졌다.

“백작님!”

막 손을 놓던 린델은 쓰러진 일로아나 백작에게 다가갔다. 백작은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밖에 아무도 없는가? 백작께서 쓰러지셨다.”

린델은 밖을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린델을 보낸 카시어스는 스케줄에 따라 움직였다. 2시간에 걸친 알현을 끝마치고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았다.

남부의 귀족들이 단체로 올린 상주문을 하나씩 처리하던 카시어스는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벽난로 위에 올려놓은 황금색 시계는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즉 린델이 황궁을 떠난 지 3시간이 지났다는 의미였다.

일로아나 백작의 저택은 수도 외곽에 위치해 있긴 했지만 왕복하는 데 2시간이면 충분했다. 지금까지 린델이 돌아오지 않은 것은 문제가 있었다.

여러 가지 가능성 중에 최악의 것을 떠올리던 카시어스는 인상을 썼다. 끔찍한 사고는 언제 어디서든 일어났다. 그리고 인간의 육신은 하염없이 약했다. 계단에서 잘못 구르기라도 한다면 목숨을 잃는 것은 금방이었다.

“쯧.”

신경쇠약에 걸린 마음 여린 레이디나 할 법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한심스러워서 카시어스는 혀를 찼다. 자신의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닷새 전부터 머리 한쪽으로 계속 린델을 생각하고 있었다. 고백을 했을 당시에는 자신만만했었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조금 전에 잔뜩 경계하는 린델의 모습을 보자니 너무 성급하지 않았나 싶었다. 노골적으로 구애할 것이 아니라 그냥 천천히 삼켜버릴 것을 하고 후회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취향이 아니었다. 일방적으로 감정을 강제하는 것은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 하룻밤이든, 혹은 필요에 의해서이든 간에 상대가 온전히 자신을 원하기를 바랐다. 그런 의미에서 제 욕망을 자각한 린델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감에 들떴다.

“큰일이군.”

카시어스는 손끝으로 서류를 툭툭 치면서 악당같이 웃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가슴 한쪽이 간지러운 것이 마치 풋내기 구애자라도 된 듯한 느낌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의 세계에서 살았던 그에게는 낯선 감각이었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카시어스는 다시 시계를 바라보았다. 사람을 보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하려고 하는데 밖에서 빅토리아의 기척을 읽었다. 시종이 문을 두드리고 나타나 황태녀의 방문을 알렸다. 카시어스는 지체 없이 응했다.

집무실에 들어선 빅토리아는 공손히 절을 한 다음에 바로 방문 목적을 알렸다.

“테누안의 하례품 목록을 확인하던 중에 이상한 걸 발견했는데, 아마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힐 것 같아서 일찍 말씀드리려고요.”

“어떤 하례품이 짐의 심기를 어지럽힌다는 것이냐?”

할엔라드의 황태녀로, 정무를 하나씩 배워가고 있는 빅토리아는 외교와 관련된 일을 전담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가을이 되면 제국에서는 그란디스 메시스(Grandis Messis)라고 불리는 수확제가 열렸다. 일곱 신에게 제의를 올리는 수확제는 제국에서 가장 큰 행사이자 축제였다. 그에 맞춰 지방 영주들과 속국의 사자들이 하례품을 들고 찾아들었다.

테누안은 제국의 속국으로 매년 엄청난 양의 비단과 보석 세공품을 하례품으로 내놓았다. 카시어스는 테누안의 하례품 중에 자신의 심기를 어지럽힐 만한 것이 있을까 싶었다.

“목록 중 하나가 ‘별’이거든요.”

“별? 보석? 아니면 유성?”

별이라고 하면 광채가 아름다운 보석이나, 혹은 지상에 떨어진 유성을 의미하기도 했다. 하례품이라면 후자가 더 어울렸다.

그런데 빅토리아가 아주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겨우 그것 때문에 폐하의 심기가 어지러워지실까 걱정하지는 않지요. 폐하께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테누안에서 리세나 공주가 별의 숙녀라고 불린대요. 하늘의 별처럼 아름다워서 그녀를 찬미하는 시가 엄청나답니다.”

“짐을 웃기려고 한 거였다면 성공했어. 빅토리아.”

“설마요. 제가 어찌 그러겠습니까. 어쨌든 리세나 공주가 테누안의 사절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것은 사실이랍니다. 루터 왕세자와 함께요. 올해 영광의 홀에서는 굉장한 장면이 연출될지도 모르겠어요. 엣썬의 올리비아 여왕께서도 내방하신다는 연락을 받았답니다. 아주 조심하셔야 될 거예요.”

빅토리아가 노래를 부르듯 음률에 맞춰 흥겹게 이야기했다. 리세나 공주는 카시어스의 전 약혼녀였고, 올리비아 여왕은 전 애인이었다. 아주 흥미로운 가십이 될 만한 일이었기 때문에 카시어스는 맹랑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후계자를 책하지 않았다.

“수다쟁이들이 좋아할 만한 거리군.”

“사자대면이라니 흥미진진하잖아요.”

“빅토리아.”

카시어스의 호명은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사랑받는 후계자인 빅토리아는 그저 싱긋 웃었다.

“아주 주제 넘는 말씀이지만, 미리 말씀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예법에 따라 빅토리아는 린델의 이름을 언급하지도, 그리고 지칭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카시어스도 누구에게 무엇을 미리 말해야 하는지 못 알아듣지 않았다.

“궁금하면 먼저 물어보겠지.”

“어머나. 방금 아주 짓궂은 표정을 지으신 건 아시죠? 그러시면 안 돼요. 미움받아요.”

카시어스가 악당처럼 웃는 바람에 빅토리아는 한마디 더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황제는 편애가 심했다.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아낌없이 퍼주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빅토리아 자신이었다.

제국의 하나뿐인 후계자로서 세상에 없을 부귀와 영화를, 그리고 제왕이 되기 위한 완벽한 교육을 받았다.

황제께서 사람을 아끼신다는 것은 무한정 애정을 베푸시는 게 아니라, 제 역할을 해낼 수 있도록 엄청난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 주는 것이었다. 무능함을 용서치 않는 황제의 아주 독특한 애정법이었다.

황제께서 그의 비공인 연인이자 배행 마법사를 무척이나 아낀다는 것은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사실이었다. 몬스터 사냥에도 동행시켰고, 차원의 틈을 닫으러 갈 때도 휴가 중인 그를 찾았다.

단순한 연인이 아니라 말 그대로 유능한 배행 마법사로 키우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조금씩 나오고 있었다. 빅토리아 역시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황제께서는 목적 없이 사람을 사귀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오늘도 일로아나 백작에게 그를 보낸 것을 보면 확신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진한 연인에게 고약한 시련을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황제께서 그것조차 경험이라고 여기신다고 해도 말이다.

빅토리아의 호들갑 어린 충고에 카시어스는 웃음을 삼켰다. 전 약혼녀와 전 애인 때문에 린델에게 미움받을 일은 없었다. 진짜 연인 사이가 아니니까 말이다. 린델이라면 그러냐고 무심히 받아넘기든지,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볼 게 뻔했다.

물론 진짜 연인이 된다면 달라지겠지만, 그건 아직 모를 일이었다. 린델이 정색하고 거부한다면 달리 방법이 있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