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폐하의 서신입니다.”
개인 서재에서 쉬고 있던 린델은 애쉰 부인이 내민 서신을 받아 들었다. 황제의 개인 인장이 찍힌 서신을 펼치자 우아한 필체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내용은 간단했다. 8시까지 외출 준비를 하고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카시어스는 방문 예고를 하는 걸 잊지 않았다.
린델은 시계를 확인했다. 6시.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폐하께서 8시에 내방하신대요.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조금 있다가 준비할게요.”
“네.”
애쉰 부인이 웃으면서 물러났다. 서재에 혼자 남은 린델은 서신을 내려다보다가 인상을 썼다.
카시어스의 구애를 차버린 것이 겨우 2시간 전이었다. 당시에는 앞뒤 재지 않고 거절해 버렸는데 머리가 식자 자신이 너무 무례한 게 아닌가 싶었다. 막말은 하지 않았지만 황제 폐하를 상대로 매몰차고 건방지게 굴었다.
“어쩔 수 없었어.”
린델은 스스로에게 변명거리를 만들어주었다. 구애를 받은 것도 유혹을 받은 것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욕정이라는 단어가 무엇인지 체감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카시어스가 욕망하라고 주문한 그 순간에 그의 벗은 몸을 떠올리고 말았다.
사냥 대회에서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옷을 갈아입던 그의 멋진 뒷모습이 머릿속을 차지했다. 손목이 아니라 하얗고 매끄러운 그의 등에 손을 대고 싶다고 생각해 버렸다.
“우…….”
절로 앓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린델은 서신을 손에 쥔 채, 나머지 손으로 열이 오른 얼굴을 쓸었다.
그러지 않겠노라고 카시어스를 향해 호기롭게 외쳤지만, 한 번 자각한 욕망이 제멋대로 마구 뻗어나갔다. 생각만으로도 너무 자극적이어서 민망하다 못해 죄책감까지 들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카시어스가 구애를 한 이유가 궁금했다. 닐르에 와서야 사내들끼리도 연인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황제 폐하께서 뭐가 아쉬워서 자신에게 은밀히 욕정하고 있다고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러고 싶은 것이다.
매력적이고 어여쁘면 충분했다. 물론 그의 눈에 자신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이 이상하긴 하지만 말이다.
“하아.”
린델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깨달은 것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젯타스시여.
린델은 낯선 감정에 심장이 아프도록 당기는 것을 느끼며 신을 찾았다. 운명이 제멋대로라는 것을 이렇게나 실감한 적이 없었다.
살인 누명을 쓰고 도망자가 될 거라고는 꿈조차 꾼 적 없었다. 도적의 총에 맞은 것도, 그리고 제국의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도, 마법사가 되어 궁중에 출입하게 된 것도 모두 이야기책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었다.
사제가 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것들을 훈련받았다. 삶을 살면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모두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것이라고 배웠다. 그래서 어떤 고난이나 시련도 기꺼워해야 한다고 말이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이었다. 린델은 신을 원망하고 좌절하는 대신에 카시어스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모든 게 낯설고 어색했지만 사람 사는 곳은 비슷해서 바보처럼 허둥지둥하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이제는 익숙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욕망이라는 단어에는 머리가 굳어버렸다. 상대가 황제 폐하라 더더욱 그랬다.
“진짜…….”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구애를 거절했지만 표정 관리를 못 했다. 그의 앞에서 혼란스러움을 고스란히 내보였다. 카시어스는 눈치가 빨랐다. 자신의 욕망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어쩌지.”
린델은 서신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카시어스를 만나게 되면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게 될지 무서워졌다. 그의 앞에 서면 이 감정이 모두 드러날 것만 같았다. 오늘 아침에도 같은 고민을 했었다. 그리고 한나절이 지난 지금은 더 심각해졌다.
뺨을 한 번 더 문지른 린델은 욱신거리는 심장 위를 눌렀다.
“모르겠다.”
아무리 고민해도 당장 눈앞에 닥치지 않는 이상에야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린델은 길게 숨을 내쉬며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활짝 열어놓은 창 너머 푸른 하늘은 린델의 복잡한 마음과 달리 청량하기만 했다.
카시어스는 약속한 시간에 맞춰 공작 저택에 도착했다. 그리고 린델을 찾아 2층 서재로 가는 대신에 현관홀에서 대기했다. 카시어스는 황제로서의 권위를 강조하는 편이었지만, 사석에서는 편의를 위해 약간의 수고로움을 감안하곤 했다.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응.”
장갑을 고쳐 끼고 있는 카시어스는 애쉰 부인의 부름에 고개를 끄덕였다. 카시어스는 젖유모인 애쉰 부인을 편하게 대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했던 애쉰 부인은 카시어스의 인생 스승이었다.
애정만을 쏟아붓던 어머니와 달리 애쉰 부인은 잔소리와 충고를 마다하지 않았고, 그것은 카시어스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평균적인 양심과 도덕심, 그리고 책임감은 모두 그녀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방탕하고 무책임한 황제가 아니라 그럭저럭 괜찮은 군주가 된 것은 모두 애쉰 부인 덕분이었다.
카시어스는 애쉰 부인을 누구보다 신뢰했고 그래서 그녀가 린델의 보호자 노릇을 하는 것을 반겼다.
“린델 님께서 최근에 한숨이 느셨어요. 아주 많이요. 닷새 전에 폐하와 함께 멀리 다녀오신 후부터요. 걱정스러울 정도예요.”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돌려 묻는 애쉰 부인을 보며 카시어스는 쓴웃음을 삼켰다. 애쉰 부인은 제 손으로 돌보는 아이에게 헌신적이었다. 스무 살인 린델은 이미 성인이었지만 애쉰 부인은 상관하지 않았다. 잘 먹이고, 잘 입히고, 흉하고 고된 일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 그녀의 천성이었다. 게다가 린델처럼 착하고 성실하다면 더더욱 마음을 쓸 것이다.
카시어스는 애쉰 부인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그녀에게 숨겨봤자 좋을 게 없었다.
“구애를 했는데, 차였어.”
누가 누구에게 구애를 하고 차였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애쉰 부인은 감탄사 대신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5일 전에 린델에게 입맞춤을 하는 카시어스를 보며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막상 닥치니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린 피후견인을 상대로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 린델 님이 얼마나 놀라셨겠어요. 어떻게 구애를 하셨기에 차이신 겁니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카시어스를 아기 때부터 돌본 애쉰 부인은 충언을 가장한 잔소리를 할 수 있었다. 황제가 허락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애쉰 부인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구애를 했다가 차인 남자를 괴롭힐 수는 없었다.
애쉰 부인은 린델을 떠올렸다. 순진하신 도련님은 숫기는 없었지만 심지가 굳었다. 그가 어떤 말로 카시어스를 차버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심각한 얼굴을 하고 내도록 한숨을 내쉴 정도면 꽤나 심각한 이야기가 오갔을 것이다.
둘의 사정을 알 수 없으니 함부로 끼어들 수 없었다. 애쉰 부인은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을 하기로 했다.
“자정이 되기 전에 린델 님을 돌려보내 주세요.”
외박을 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애쉰 부인의 표정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덕분에 카시어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레오나가 아니었다면 나는 폭군이 되었을 거야.”
“추켜세우셔도 안 됩니다.”
“알았어. 자정 전에는 돌려보내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린델이 2층 계단을 내려왔다. 단순한 외출복을 챙겨 입은 린델은 딱딱한 얼굴로 카시어스에게 인사했다.
“카시어스 경을 뵙습니다.”
“가자.”
“예.”
평소처럼 카시어스가 앞장서자 린델이 뒤따랐다. 애쉰 부인은 린델이 카시어스를 보고도 미소를 짓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챘다. 황제를 찼으면 좀 더 당당해져도 된다고 알려주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늦으시면 연통을 주세요, 린델 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애쉰 부인은 린델이 마차에 오르기 전에 말을 건넸다. 이미 마차를 탄 카시어스를 향한 경고이기도 했고, 또 딱딱하게 굳은 린델을 안심시키기 위한 말이었다.
“네, 그럴게요.”
린델이 웃으면서 마차에 올랐다. 애쉰 부인은 한참 동안 서서 마차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구애를 했다가 차였다고 했다. 누구보다 카시어스의 성향을 잘 알고 있는 애쉰 부인은 애매하게 웃었다.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카시어스는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았다. 신뢰하는 측근 몇몇만 필요에 의해 가까이에 뒀다. 그나마 애정을 쏟는 것은 빅토리아 황태녀가 전부였다.
그런 그가 유난히 린델을 아끼기는 했다. 후견인을 자처하고, 편의를 챙기고, 주위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했다.
애쉰 부인의 동생인 세투아는 황제께서 청년을 보고 한눈에 반하신 게 아닌가 하는 가설을 내놓았다. 애쉰 부인은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5일 전까지는 말이다. 성실한 보호자였던 카시어스가 린델을 데려다주면서 입술을 훔쳤다. 그때부터 린델이 한숨을 미친 듯이 내쉬었다.
카시어스는 사람과 물건에 집착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 번 손에 넣고자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움켜쥐었다. 그런 의미에서 카시어스가 린델을 포기하지 않을 터였다. 차였다고 하면서 흥겹게 웃는 모습을 보면 확실했다.
애쉰 부인은 누구보다 카시어스를 지지하고 응원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린델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다. 심성은 올곧지만 나이에 비해 순진한 린델이 노련한 카시어스에게 이리저리 휘둘릴 게 뻔하니까 말이다.
황제 폐하를 턱 끝으로 부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하던 애쉰 부인은 야심찬 꿈을 접었다. 린델이 누군가를 턱 끝으로 부릴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는 사실이 내심 아쉬웠다.
마차는 빠르지 않게 움직였다. 규칙적인 덜컹거림이 귀를 울렸지만 린델은 침묵이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전전긍긍한 것에 비해 매끄럽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좁은 마차 안에 단둘이 앉아 있으려니 다시 조바심이 났다.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은 린델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디를 가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좋은 곳에 갈 거야.”
좋은 곳이란다. 지금까지 카시어스가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은 것은 5일 전뿐이었다. 사정이 있겠지만 그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괜히 기분이 그랬다.
“너무 긴장하지 마. 짐을 찼으면 당당하게 굴어야지.”
린델에게 당당하라고 요구하는 카시어스가 활짝 웃고 있었다. 차였다고 말하면서 즐거운 것 같았다.
“놀리지 마세요.”
“차인 건 처음이야.”
“?!!”
“차인 남자는 집요해지는 법이지. 나는 예외라고 하고 싶은데, 막상 차이니까 그게 잘 되지 않아.”
카시어스의 솔직한 고백에 린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확실히 황제를 찬 건 자신이 처음일 것이다. 카시어스는 누구보다 빛났다. 아름답고 멋진 그를 누가 마다할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