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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45/137)

-45화-

린델은 웃고 있는 카시어스의 얼굴에서 슬쩍 시선을 비꼈다.

“송구합니다.”

“네가 잘못한 건 없으니까 그러지 마. 그것보다는 그러지 않겠다고 한 이유나 말해줘. 알아. 내가 못나게 굴고 있다는 거. 하지만 그렇게 뜨거운 눈길로 쳐다봐 놓고는 차버리다니 너무하잖아.”

너무하다고 하는 카시어스는 그리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 불만스러운 투덜거림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담겨져 있는 것 같았다. 린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카시어스를 보았다.

그는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고 싶지 않아서요.”

“응?”

“황제 폐하께서는 제 은인이시고, 또 누구보다 고귀하신 분인데…….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요.”

린델은 최대한 솔직하게 말했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이름을 부르라고 하던 남자가 구애를 할 때는 스스로를 짐이라 칭했다. 린델은 그 둘의 차이를 모르지 않았다. 그를 욕망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동시에 눈앞의 남자가 황제라는 것을 새삼 자각했다. 사특한 마음을 품기에 그는 너무 고귀하신 존재였다.

“내가 황제라서 그러면 안 될 것 같다고?”

“네.”

“이런. 황제라서 차이다니. 보통은 좋아들 하는데 말이야.”

“폐하…….”

린델의 목소리와 표정에서 난감함이 잔뜩 묻어나고 있었다. 카시어스는 웃음을 참았다. 욕심은 나는데, 감히 황제 폐하께 그럴 수는 없다고 결론을 내버린 동그란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황제의 구애란 앞으로 너를 총애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부와 권력, 명예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였다. 궁중 귀족 치고 황제의 구애를 반기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린델은 황제라서 그럴 수 없단다. 제 딴에는 나름 고심한 후에 결론을 내린 것이겠지만 카시어스는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가 욕심쟁이가 아니라는 사실이 사랑스럽고도 아쉬웠다.

“손을 잡아줘.”

카시어스가 장갑을 벗고 맨손을 내밀었다. 린델은 카시어스가 손을 잡는 행위를 특별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두 번의 경험으로 린델은 잠시 망설여야 했다.

“아무것도 안 하시겠다고 해주세요.”

“아무것도의 범위가 뭔지 몰라서 확답은 할 수 없어.”

“폐하.”

“황제는 싫다며. 카시어스라고 해.”

“싫다고 한 적 없어요.”

린델은 사실관계를 바로 잡았다. 황제가 싫다고 한 적은 없었다.

“네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 린델. 그러니까 손을 줘.”

카시어스는 아까부터 흥겨워 보였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린델은 여유롭기 짝이 없는 카시어스가 부럽다고 생각하며 그의 손을 잡았다.

“나는 꽤나 제멋대로인 인간이야. 그래도 한 번 움켜쥔 것은 놓지 않지.”

“?!”

“그러나 그 무엇보다 너의 신뢰가 중요해. 린델. 나는 디비티에를 잃을 생각이 없어.”

카시어스는 한없이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린델은 자신이 그의 도움을 받고 피후견인이 될 수 있었던 가장 근원적인 이유를 떠올렸다. 카시어스는 디비티에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누명을 벗어야 했다. 충성이란 맹목적이고도 절대적이지만 그래도 서로의 신뢰가 기반이었다.

다행이라고 안도하고 있는데 카시어스의 손끝이 손바닥을 살짝 쓸며 고쳐 잡았다. 분명 의도가 있는 손짓이었다. 간지러운 감각에 린델은 어깨를 살짝 움츠려야 했다.

“폐하?”

“카시어스.”

“카시어스 경? 지금…….”

린델은 채 말을 끝맺을 수가 없었다. 카시어스가 손을 잡은 채로 상체를 숙여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마차 안이라 물러날 곳이 없었던 린델은 그대로 얼어버렸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다행히 어디에도 그의 입술이 닿지 않았지만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버렸다.

카시어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마차의 내등이 꺼져 버렸다. 순식간에 사방이 어두워져 버렸다.

“그러지 않겠다는 건, 그런 생각은 했었다는 거잖아. 안 그래? 뭘 해보고 싶었던 거야?”

어둠 속에서 카시어스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오른손은 여전히 잡힌 상태에서 반쯤 안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러날 곳 없이 갇힌 신세가 된 린델은 울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래도 얼굴에 힘을 주고 대답했다.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긴 했다는 거군.”

완전히 말려들었다. 린델은 신을 찾으며 어둠을 찬양했다. 난감함에 뺨이 불타는 것 같았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마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는 걸 알아차렸다.

“네가 잊은 것이 하나 있는데.”

이번에는 오른쪽 귀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음색은 여전히 흥겨웠다.

“나는 뭐든 허락한다고 했어.”

“?!!”

“욕심을 내도 돼. 황제가 싫다면 카시어스라는 한 사내에게 말이야.”

린델은 뻣뻣하게 굳은 상태에서도 참으로 끔찍한 유혹이라고 생각했다. 충성을 맹세하면 평생을 영화롭게 살게 해주겠다고 했던 그때처럼 악마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나마 그때는 카시어스가 밝은 햇살 아래 아름다운 천사님처럼 보이기는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악마가 바로 곁에 있었다. 그것도 매우 유능한 악마였다.

“저는…….”

“하루에 두 번씩 차일 생각이 없으니까, 거절의 말이라면 하지 마.”

카시어스가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마차 문이 열렸다.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 카시어스의 얼굴이 불빛에 드러났다. 린델은 왠지 억울해졌다.

“절 놀리시는 게 재미있으시죠?”

“유혹하는 게 즐거울 뿐이지.”

얄밉게 대꾸한 카시어스가 마차에서 내렸다. 린델은 말로는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뒤따랐다.

작은 저택의 안뜰이었다. 주위는 한적한 주택가였다. 카시어스가 검은 머리를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공공장소에는 가지 않을 거라는 것은 대충 눈치챘다. 그래서 어딘가 싶었다. 마차는 오래 달리지 않았다. 공작 저택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곳에서 무슨 볼일이 있는지 궁금했다.

“내일이나 되어야 도착할 줄 알았는데, 서둘렀다고 하더군.”

“무엇이 도착했는지 알려주세요.”

“네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따라와.”

“예.”

린델은 카시어스가 방문 목적을 말해주지 않아도 그러려니 했다. 확실히 보호자로서 카시어스에 대한 신뢰는 확실했다.

시종이 미리 현관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린델은 카시어스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화사하고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카시어스는 헤매지 않고 안쪽으로 향했다.

응접실이라고 예상되는 곳의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이쪽으로.”

문 앞에서 카시어스는 먼저 들어가라고 눈짓을 보냈다. 린델은 별다른 의심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불이 환하게 밝혀진 곳은 예상대로 응접실이었다. 거기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익숙한 모습에 린델은 입구에서 그대로 멈춰 서고 말았다. 여기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이 보였다.

잉그란이었다.

자신이 선 채로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뺨을 꼬집어야 하나 싶은데 잉그란이 이쪽을 보며 주름진 얼굴로 활짝 웃었다.

“린델.”

목소리까지 잉그란이 맞았다.

“사제님?”

“그래.”

“진짜예요?”

“그럼 가짜일까?”

“어떻게……. 아니, 진짜? 제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죠?”

“현실이란다. 린델.”

린델은 천천히 다가갔다. 잉그란이 팔을 벌려주었기 때문에 린델은 그를 와락 껴안았다. 어느 정도 자라고 나서부터는 이렇게 안긴 적이 없었다. 그래도 지금은 특별한 순간이었다.

“사제님.”

잉그란을 부르는 목소리가 떨리다 못해 꽉 막혔다. 잉그란이 웃으면서 등을 두드려 주었다.

“어리광쟁이가 되었어.”

“보고 싶었어요.”

“얼굴 좀 보자.”

“네.”

린델은 뜨거워진 눈에 힘을 주며 몸을 뗐다. 가능하면 웃고 싶은데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감기에 걸려서 아프다고 하더니 괜찮아 보이는구나.”

“다 나은 지가 언제인데요.”

“겨울에도 감기가 비켜가던 녀석이 한여름에 쓰러지다니. 고생이 많았겠어.”

다정한 염려에 린델은 감격했다.

“별거 아니었어요. 그런데 정말 어떻게 오셨어요?”

“마차를 타고 왔지.”

“농담하지 마시고요.”

“네가 아프다고 해서 보러 왔단다. 마침 시간도 나고, 네가 잘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기도 해서 겸사겸사. 마차를 보내주셔서 편히 왔어.”

“아…….”

린델은 그제야 카시어스와 함께 이곳에 왔다는 것을 떠올렸다. 잉그란과 편지를 주고받을 때도 카시어스의 사람을 썼다. 즉, 잉그란을 이곳으로 데려온 것은 카시어스의 의지라는 뜻이었다.

린델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카시어스가 응접실 입구 쪽에 서 있었다.

“카시어스 경.”

린델이 부르자 카시어스가 다가왔다. 카시어스가 자신을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다는 사실이 너무 고마웠다. 그러나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는 대신에 우선은 잉그란에게 그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려줘야 했다.

“잉그란 사제님. 저의 후견인이세요.”

린델이 옆에 선 사내를 후견인이라고 소개하는 바람에 잉그란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린델은 자신의 후견인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분이라고 편지에 적었다. 편지를 직접 전해주는 사내 역시 황제의 인장이 찍힌 명령서를 보여주며 같은 말을 했다. 오늘의 만남도 감기에 걸린 린델을 위로해 주길 바라는 황제의 뜻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황제가 직접 린델을 데리고 나타날 줄은 몰랐다. 붉은 머리의 황제의 대리인일 거라고만 생각했던 잉그란은 당황 속에 무릎을 꿇었다.

“미천한 종이 신의 축복을 받은 위대한 불꽃의 지배자이시며, 열하나의 강과 일곱 산맥의 군주이시며, 법과 정의를 수호하시는 황제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빛나는 영광이 무궁하길.”

과거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신의 종으로 살 것을 맹세하는 것으로 서품을 받았다. 잉그란은 40여 년 전에 있었던 맹세를 떠올리며 절을 했다.

“일어나라.”

“황공하옵니다.”

잉그란은 삐꺽거리는 무릎에 힘을 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황제라는 것을 인지하자 감히 쳐다볼 수가 없었다.

“린델이 그대를 많이 그리워했다. 오랜만일 테니 편히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라.”

“배려에 감사드리옵니다. 황제 폐하.”

잉그란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린델. 애쉰 부인이 걱정할 테니, 자정 전에는 돌아가도록 해.”

“예. 명심하겠습니다.”

당부의 말에 린델은 열심히 대답했다. 카시어스가 나중에 보자고 하며 응접실을 나섰다. 멍하니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린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잉그란에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는 카시어스를 쫓았다. 다행히 그가 저택을 나가기 전에 따라잡았다.

“카시어스 경.”

“왜?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고맙습니다. 정말 놀랐어요.”

린델은 조금 전에 하지 못한 인사를 했다. 이렇게 잉그란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카시어스가 자신을 위해 신경 써주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고마우면 뽀뽀라도 해주든가.”

“카시어스 경.”

카시어스가 껄렁한 한량처럼 굴었다. 감격에 겨워 있던 린델은 현실을 마주했다. 기쁨과 원망이 뒤섞여 혼란스러운 와중에 카시어스의 손이 뺨을 살짝 꼬집고는 떨어져 나갔다.

“스승에게 뭐든 말해도 좋아. 디비티에라는 것도. 대신 자정 전에 돌아가.”

“네.”

린델이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마지막까지 카시어스를 배웅한 린델은 웃으며 뺨을 문질렀다.

난감한데도 들떴다. 벅찬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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