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그러니까 황제 폐하께서 구애를 하셨다고? 아니, 잠시만. 진짜 구애인 거냐? 내가 이해한 게 맞아? 폐하께서 그러셨다고?”
폐하께서 그러셨냐고 묻는 잉그란의 눈은 마구 흔들렸다. 목소리도 떨렸다. 린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구애라고 하셨어요.”
린델은 누명을 쓰고 호수에 빠졌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을 모두 말했다. 알렉스에게 도움을 받고, 도적의 총에 맞아 정신을 잃고, 디비티에로 황제께 충성을 맹세하고, 마법사가 되어 영광의 홀에 섰다고. 그리고 겨울이 되기 전에 누명을 벗게 될 거라는 것까지 하나도 빼먹지 않았다. 잉그란이 걱정하지 않게 이야기책 속에서나 봤던 일이 일어났다고 웃어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황제의 구애까지도 고백했다. 잉그란의 반응은 아주 온건적이었다.
“이거……. 놀랐겠구나.”
“예. 엄청 놀랐죠.”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제가 찼어요.”
“찼어? 황제 폐하를?”
잉그란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튀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제가 감히 어떻게 응하겠어요. 그런데…… 폐하께서 차여주지 않으시겠대요.”
“린델.”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린델은 두 손으로 달아오른 뺨을 감싸며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만난 스승님께 말하기에는 낯부끄러운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도움을 받고 싶었다. 현명한 스승님께서는 언제나 명쾌하게 답을 내주셨다. 그렇게 숨김없이 고민거리를 토해 놓는 린델을 보며 잉그란은 잠시 할 말을 찾았다.
그냥 권력자도 아니고 황제의 구애라니.
확실히 린델의 고민이 깊을 만도 했다. 잉그란은 혹시나 싶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황제께서 협박이라도 하시느냐?”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폐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세요.”
“그럼 이렇게 고민하지 말아야지. 구애를 거절하는 일은 흔한 일이란다. 괜찮아.”
잉그란은 괜찮다고 했지만 린델은 괜찮지가 않았다. 자신이 고민하는 건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고귀하신 분께 사특한 욕망을 품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욕심이, 욕망이 자꾸 커졌다. 무엇이든 허락한다는 말에 더욱 흔들렸다. 그리고 그걸 알아챈 카시어스는 계속 부추겼다.
“그게…… 자꾸 욕심이 생겨요. 그러면 안 되는데.”
우울한 얼굴로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린델을 보며 잉그란은 웃었다. 제 몫보다 더 많은 것을 해내려고 노력하던 아이는 또래보다 어른스러웠다. 크게 화를 낸 적도 없고, 어려움에 처한 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고, 제 것을 양보했다. 그럼에도 잉그란의 눈에 린델은 언제나 아이였다.
하지만 몇 달 만에 만난 제자는 어른 사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 품 안의 아이가 아니었다.
“그럼 욕심내도 돼.”
“그분은 황제 폐하세요.”
“황제 폐하를 욕심내는 게 뭐 어때서. 폐하께서 먼저 구애하셨다며.”
“?!!”
“나는 오히려 네가 아깝단다, 린델. 사내라는 것은 둘째 치고, 역사적으로 보면 일국의 군주는 좋은 연애 상대가 아니야. 후견인이시라면 참하고 예쁜 아가씨를 소개시켜 주셔야지. 당신께서 구애를 하시다니. 권력 남용이야.”
“사제님.”
폭언에 가까운 조언에 린델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잘못했다간 황제 기만죄로 잡혀갈 수도 있을 만한 발언이었다. 다행히 응접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후회하기 전에 하고 싶은 걸 해. 린델. 나는 후회했단다. 그날 알렉스 도련님이 가만히 지켜보라고 했었지만, 그래도 네 편을 들고, 네가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변호해 줬어야 했다고 말이야.”
“?!!”
“천운으로 황제 폐하께서 널 구하지 않으셨다면 이렇게 만날 수도 없었겠지. 네 소식을 기다리며 매일같이 후회했을 거야.”
“괜찮아요. 사제님. 지금 저는 여기 있잖아요.”
잉그란은 웃고 있었지만 침통했다. 린델은 괜찮다고 했지만 그걸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배웠다.
“오늘은 이렇게 만나 웃고 있지만, 내일이면 헤어져 영원히 만나지 못할 수도 있어. 그러니까 바라는 걸 해.”
고왕국 시대의 유명한 연시였다. 오늘 만나, 내일 헤어져, 영원히 이별한다. 짧은 인연을 아쉬워하는 사랑 노래는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운명을 이야기했다.
린델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이별을 걱정하며 삶을 살진 않는다. 하지만 몇 번이고 목숨을 잃을 뻔한 경험을 했던 린델은 잉그란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네가 아깝다니까.”
병아리를 품은 암탉처럼 잉그란은 린델을 편들어주었다. 덕분에 린델은 기쁘게 웃을 수 있었다. 떨칠 수 없는 욕심을 끌어안고 끙끙 앓는 것보다는 원하는 대로 하는 게 낫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자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3개월 만에 재회였다. 그간의 사건 사고와 고민거리를 탈탈 털어낸 린델은 잉그란을 닦달해서 로벅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양치기가 고대하던 아들을 얻었고, 덫을 놓아 닭장을 습격하던 여우를 잡았다고 했다. 낡은 창고 지붕에서 비가 새는 바람에 말려놓은 약초가 엉망이 되었다는 소리에는 마치 제 일처럼 안타까워했다.
린델은 11시가 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잔뜩 남아 있었지만 오랜 여행을 한 잉그란이 편히 쉬는 게 먼저였다. 내일 다시 만나자고 인사를 하며 헤어졌다.
마차에 오른 린델은 열이 오른 머리를 벽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작은 깨달음과 결심에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이제 남은 것은 눈앞에 일이 닥치는 것뿐이었다. 자신도 카시어스처럼 멋지게 구애하고 싶은데 그럴 재주가 없는 것이 통탄스러웠다.
“애송이야.”
가진 것도, 경험도 없는 애송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던 린델은 갑자기 마차가 멈춰 선 바람에 눈을 떠야 했다. 창밖을 보자 공작 저택이 아니었다. 공작 저택에 가기 위해서 지나쳐야 하는 번화가였다. 깊은 밤이었지만 여름 축제로 거리에는 사람들이 꽤나 많이 오가고 있었다.
“어?”
길이 막혔나 싶어 두리번거리는데 검은 그림자가 불쑥 다가왔다.
“당신들 누구야!”
“조심해!”
이상한 외침이 들리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가 마차 문을 잡아 당겼다. 걸쇠를 걸어놓았지만 억센 힘에 마차 문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벌컥 열렸다. 처음 보는 남자가 순식간에 마차 안으로 들어섰다.
“꺄아아아.”
“젠장. 한스가 당했어.”
“보통 놈이 아니야.”
“치안대를 불러.”
“강도야!!”
뒤로 물러나던 린델의 귀에 비명이 울렸다.
“금발. 맞네.”
습격은 갑작스러웠다. 남자는 금발이 맞다면서 다짜고짜 단검을 휘둘렀다. 린델은 뒤로 튕겨나다시피 해서 검을 피하면서도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살의는 명확했다.
두 번째 위협은 의자 위에 올려두었던 예장용 지팡이를 들고 막았다. 단단한 지팡이가 단검을 막아냈다. 하지만 요행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좁은 마차 내부에서는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다. 세 번째 위협이 왼쪽 팔뚝을 스쳤다. 화끈거림이 끔찍한 고통으로 바뀌었다.
“빨리 해.”
“더 이상 못 버텨. 윽!!”
밖에서는 사나운 재촉이 터져 나왔다. 린델은 지팡이로 남자를 견제하면서 반대편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젠장. 쥐새끼 같은 게.”
떨리는 손으로 필사적으로 걸쇠를 푸는데 이번에는 단검이 배를 찔러들었다. 검이 살갗에 닿는 순간에 문이 열렸다. 린델은 그대로 뒤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등과 머리를 돌바닥에 부딪혔지만 아파할 겨를이 없었다.
린델은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 주변을 살피기도 전에 화끈함이 왼쪽 어깨를 꿰뚫었다. 난폭한 힘과 함께 검이 어깻죽지에 꽂혔다.
“씨발.”
어느새 따라붙은 사내가 욕설을 내뱉으며 그대로 검을 뽑아 들었다. 그가 목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린델은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며 오른손에 쥐고 있는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
그 순간에 남자가 힘없이 쓰러지고 숨을 몰아쉬는 마부가 나타났다. 평소 카시어스가 타고 다니는 마차를 모는 중년의 마부 얼굴은 피투성이였다. 그제야 린델은 역한 피 냄새에 어지러움을 느꼈다.
“괜찮으십니까?”
“피가……?”
“제 피가 아닙니다. 놈들은 모두 처리했습니다. 이제 안전……. 이런, 다치셨습니다. 이쪽으로. 지혈을 해야 되겠습니다.”
린델은 마부가 이끄는 대로 마차 발판에 앉았다.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린델과 늘 같이 움직이는 하인이 주변의 꼬맹이에게 뭐라고 하며 돈을 쥐여주는 것이 보였다. 가로등 불빛 아래 구경꾼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길바닥에 강도들의 시체가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게 현실 같지 않았다.
“미친 강도들이야!”
구경꾼들 중에 누가 커다랗게 외쳤다.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강도일 겁니다.”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던 마부가 혀를 찼다. 린델도 같은 생각이었다. 달리는 마차를 세우고 강도질을 하는 것은 숲속에서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수도의 번화가에서 칼을 휘두르는 것은 습격이었다. 그것도 자신을 노린 것이다.
습격, 혹은 암살.
린델은 낯선 단어를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떴다.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아무래도 믿기지 않았다. 황제의 배행 마법사라고는 하지만 자신은 그다지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지혈부터 하겠습니다.”
왼쪽 팔이 모두 젖다 못해 손바닥에 피가 고이고 있었다. 현기증이 일어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마부가 손수건으로 어깨를 강하게 묶자 끔찍한 고통이 머리를 찔러댔다. 린델은 이를 악물었다. 옛날에 팔이 부러졌을 때보다 더 아팠다.
“으…….”
“출혈이 심합니다. 세투아 님을 불러야 하는데……. 정신을 놓지 마십시오.”
“괜찮아요. 버틸 만해요.”
린델은 괜찮다고 대답했다. 귀에 이명이 일기는 했지만 정신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팔뚝까지 지혈하고 있는데 치안대가 나타났다. 번화가에서 살인이 일어났다. 치안대의 분위기는 살벌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아무래도 마법사 님의 신원은 숨기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수습하겠습니다. 의사가 필요하니 곧 보내줄 겁니다.”
마부는 조금만 버티라며 응원했다. 린델은 그러겠노라고 했지만 눈이 감기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