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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47/137)

-47화-

린델은 흐릿한 시야를 맑게 하기 위해 몇 번이고 눈을 깜박거렸다. 눈을 감았다 뜬 것뿐인데 뭔가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정신이 듭니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투아가 말을 걸어왔다. 언제 그가 왔나 싶었다.

“스승님?”

“예. 피를 많이 흘려서 어지러울 겁니다.”

“그런 것 같아요.”

린델은 습격을 받은 사실을 떠올리며 멍하니 대답했다. 낯선 사내가 휘두르는 칼에 찔리고 베였다. 마지막에는 왼쪽 팔이 피로 흠뻑 젖었었다.

그때는 느끼지 못한 오싹함에 머리가 쭈뼛 섰다. 자루에 싸여 호수에 빠지기도 하고, 총에 맞아 정신을 잃기도 했지만, 직접적으로 죽음의 위협을 마주한 적은 처음이었다. 정말 죽을 뻔했다. 무섭긴 한데 그다지 현실같이 느껴지지 않아서 이상했다.

“왼팔과 목덜미의 상처는 모두 나았어요. 다른 곳은 괜찮으세요?”

애쉰 부인이 옆에서 안부를 물었다. 린델은 그제야 이곳이 공작 저택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세투아와 애쉰 부인, 그리고 눈에 익은 하녀 몇 명이 보였다. 긴 의자에 누워 있던 린델은 고개를 숙였다. 피투성이가 된 셔츠는 반쯤 찢어져 벗겨진 상태였고, 반라가 된 상체는 피범벅이었다.

린델은 괜찮다고 하는 대신에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머리는 어지러웠고, 열 때문인지 지끈거리기까지 했다. 자신의 것이지만 피 냄새는 역하기 짝이 없었다.

“어지럽고, 머리도 지끈거리고, 그리고 배가 따끔거려요.”

“배가요?”

“아까…… 찔렸던 것 같긴 한데…….”

마차에서 떨어지기 전에 칼끝이 배를 살짝 찔렀다. 확실히 그쪽이 아팠다. 린델은 느릿하게 왼쪽 배 부근을 더듬었다. 그러자 애쉰 부인이 셔츠를 젖히고 젖은 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따끔거리는 아픔에 린델이 인상을 쓰는 사이에 상처가 드러났다. 작은 상처였지만 피가 끊임없이 흘렀다.

“다행히 깊지 않네요. 세투아.”

애쉰 부인이 세투아를 재촉했다. 린델은 세투아의 손끝이 배에 살짝 닿는 것을 느꼈다.

“생명의 기적. 치·유.”

마법 주문은 간단했다. 린델은 상처 부근이 간지럽다고 느꼈다. 세투아가 손을 치우자 애쉰 부인이 다시 상처 부근을 닦았다. 말끔해진 피부를 확인한 린델은 세투아를 보며 웃었다.

“굉장해요, 스승님.”

놀라운 광경이었기 때문에 린델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총에 맞아 어깨가 박살 났던 것도 세투아가 치료해 주긴 했지만 직접 보지는 못했다. 두 눈으로 마법의 힘을 확인하자 세투아를 향한 존경심이 마구 치솟았다.

린델의 감탄 어린 시선에도 세투아는 웃지 못했다. 심각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열에 들떠 웃는 것을 보면 피를 정말 많이 흘렸다는 소리였다. 발음도 어눌하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불편한 곳은 더 없습니까?”

“어……. 머리가 아픈 것 말고는 이제 괜찮아요. 스승님. 저도 치유 마법을 배울 수 있겠죠? 스승님을 만나면 물어보려고 했어요. 오래 걸릴까요?”

“금방 배울 겁니다. 이거 마셔요. 진통제입니다.”

진통제라는 말에 린델은 사양하지 않고 컵에 든 약을 마셨다. 쓰다고 인상을 쓰는 린델에게 세투아가 더 쓴 약을 내밀었다. 피를 만드는 약이라고 했기에 린델은 울상을 지으면서도 다 마셨다.

“습격한 자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

애쉰 부인이 건네준 물을 마시며 쓴맛을 헹구던 린델은 뜻밖의 화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투아는 진지하고도 근심스러워 보였다.

“노상강도를 가장한 암살은 흔한 방법입니다.”

“세투아. 린델 님은 쉬어야 해.”

애쉰 부인이 세투아를 말렸다. 하지만 세투아는 손을 들어 그녀를 저지했다. 궁중 마법사로 오래도록 지낸 세투아는 이번 일이 정치적 사건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걸 린델에게 환기시켜 줘야 했다.

“황제의 총신을 시기하는 이들은 많이 있지만, 이런 식의 위협은 보통 개인적인 원한을 기반으로 합니다.”

“저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죠.”

린델은 세투아가 누구를 말하는지 눈치챘다. 닐르에서 만든 인간관계는 지극히 좁았다. 강도를 동원해 죽일 정도로 자신을 싫어할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데스탄.

멍한 머리로 데스탄을 떠올린 린델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를 만난 것은 사냥 대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악감정을 가질 만한 일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진짜 죽이려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의 문제였다.

“이런 일은 배후를 밝히기 어렵습니다. 네. 그를 배후라고 지목하기 힘든 상황에서 이번 일이 알려진다면 가십이 아니라 정치적 사건이 될 겁니다.”

“정치적 사건…….”

“지금 상황에서 폐하의 의중은 알 수 없지만, 사건 자체는 덮일 확률이 높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복수해 주실 테니 상심하지 말고 기다리면 됩니다.”

세투아는 냉정하게 말했고 린델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습격, 암살, 복수, 정치적 사건. 어지러운 머리는 잘 굴러가지 않았지만 당장에 해결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이해했다.

“이해했어요.”

“한동안 조심해야 할 겁니다.”

“조심할게요.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데, 너무 졸려요……. 자도 괜찮겠죠?”

린델은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깜빡거리며 중얼거렸다.

“네. 주무셔도 돼요. 곁에서 지켜드릴게요.”

옆에서 애쉰 부인이 다정하게 속삭이는 것을 들으며 린델은 눈을 감았다 어렵게 떴다. 애쉰 부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고운 얼굴은 어딘가 잉그란을 닮아 있었다.

잉그란은 후회하기 전에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했다. 오늘 밤, 운이 나빴다면 애쉰 부인을 다시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웃으면서 헤어졌는데 영원히 이별할 뻔했다. 그러니 고맙다고 해야 했다.

“고마워요.”

린델을 웃으며 눈을 감았다.

황제의 젖형제로 자라 안티 카발리에의 수장이 된 뒤센트 자작은 카시어스에게 정통한 사람 중에 한 명이었다. 웃으면서 부하들을 까고 굴리는 카시어스는 화가 나면 표정이 사라지곤 했다. 냉막한 표정만이 아니라 사람을 질식하게 만드는 마력의 파장을 흩뿌렸다.

그런 의미에서 뒤센트 자작은 눈앞에 있는 카시어스의 기분이 최악까지는 아니더라도 별로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피후견인이 마차 강도를 가장한 암살 습격을 받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카시어스는 린델을 유별나게 아꼈다.

뒤센트 자작은 자신이 알아낸 정보가 조금이나마 황제를 진정시키기 바랐다.

“가명을 사용한 데다가 가면까지 써서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뒤를 밟는 것도 실패했다고 하고요. 다만, 부하 중에 한 명이 의뢰인이 그라드스 백작의 마구간 지기인 것을 알아봤었다고 합니다. 부하가 백작의 저택에서 일한 경력이 있었답니다.”

“운이 좋았군.”

카시어스는 뒤센트 자작이 한 말을 단순하게 정리하며 인상을 썼다. 린델이 습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배후를 찾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강도를 가장한 암살은 전통적이고도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제국의 유구한 역사에서 마차 강도의 칼에 찔려 사망한 사건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범인들은 돈만 주면 무엇이든 하는 뒷골목 건달들이었고, 그들은 당연히 의뢰인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중간책이나 주선자 역시 마찬가지인 경우가 많았다. 이번에는 운이 아주 좋은 경우였다.

그라드스 백작의 셋째가 데스탄의 똘마니 중 한 명이었다. 즉, 이번 일의 배후가 데스탄이라는 소리였다.

린델이 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부터 카시어스는 데스탄을 의심했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멍청하더라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일을 벌였을까 싶었다.

자신에게는 적이 많았다. 내란의 잔당들이나, 시아무크 제국, 또는 적대 관계의 귀족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황제의 명성에 먹칠을 하고, 심기를 어지럽히기 위해서 총신이나 총비를 해코지할 위인들이었다.

카시어스는 좀 더 거대한 적에 대비했다. 그런데 데스탄이 배후가 맞단다. 힘이 빠지다 못해 비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멍청한 놈.

기회를 주었더니 최악의 방법으로 걷어차 버렸다. 본인이야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 그랬겠지만, 행운의 여신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뒤센트 자작이 의중을 물어왔지만 카시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감히 황제의 총신을 위협했으니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놈을 제거하는 거야 손쉬웠다. 하지만 상황이 나빴다. 린델이 데스탄의 강력한 처벌을 바란다고 소문이 퍼진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데스탄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가는 린델이 의심받을 수밖에 없었다. 카시어스는 린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이참에 정리하는 게 좋겠지.”

카시어스는 마치 시원한 차를 마시는 게 좋겠다는 것과 비슷하게 평이한 말투로 말했다. 카시어스가 루미아나 대공주를 내버려 둔 것은 하나 남은 형제에 대한 애틋함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알아서 몸을 낮추고 있었기에 괜한 분란을 만들지 않으려고 했을 뿐이다.

하지만 멍청한 아들이 일을 쳤으니 그냥 지켜볼 생각은 없었다.

“형제끼리 싸움을 붙여. 니콜라스부터 치는 게 편하겠지. 그 녀석은 조심성이 없으니까.”

쥴란 공작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자인 니콜라스와 차자인 데스탄은 서로 사이가 나쁘기로 유명했다. 어머니인 루미아나 대공주가 데스탄만 유독 편애한 탓이 컸다. 그리고 최근에는 니콜라스가 혼인을 하고 10년이 지나도록 후손을 보지 못한 덕분에 후계 문제가 부상되면서 형제 사이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형제들 사이에 계승 문제로 서로 치고받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누가 어떻게 잘못되든 모두 형제의 싸움으로 보일 터였다.

“상황이 무르익으면 니콜라스에게 힘을 실어주도록 해.”

“명 받들겠습니다.”

카시어스는 싸움을 붙이라고 했으나 구체적인 지시는 없었다. 나머지는 모두 뒤센트 자작의 재량이었다.

카시어스는 뒤센트 자작의 능력을 신뢰했다. 카시어스가 린델의 습격 소식을 들은 것은 지난 새벽이었다. 그리고 뒤센트 자작을 불러 배후를 캐라고 한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후였다.

뒤센트 자작은 채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배후를 특정했다. 운이 좋기도 했지만 그만큼 그가 유능했기 때문이다.

뒤센트 자작이 절을 하고 물러났다. 집무실에 혼자 남은 카시어스는 손가락 끝으로 탁자를 살짝 두드렸다.

기분이 별로였다.

린델을 배행 마법사로 둔 것은 곁에 두고 쓸모 있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욕심도 없는 데다 노력파인 녀석이 어디까지 성장할지도 궁금했다. 어디에도 휩쓸리지 않도록 공을 들였다. 이제 겨우 3개월째였다. 그런데도 황제의 총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견제와 질시를 받다가 적이 생기고 말았다.

어젯밤, 린델이 목숨을 건진 것은 운이 좋았다는 말로는 부족한 것이었다. 칼에 찔린 곳이 조금만 더 위쪽이었다면 그대로 즉사를 할 수도 있었다. 마부와 시종이 훈련을 받은 안티 카발리에가 아니었다면 더욱 그랬다.

이래서야 황궁 정치에 끌어들일 게 아니라 평범한 마법사로 영화롭게 살도록 해야 하지 않았나 후회가 될 정도였다.

“쯧.”

카시어스는 혀를 찼다.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미련을 가지는 것은 카시어스의 성격이 아니었다. 우선은 린델에게 배후를 밝혀내지 못했다는 꼴사나운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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