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카시어스가 린델을 찾은 것은 그날 해가 지고 난 다음이었다. 린델은 늦잠을 잔 것 외에는 멀쩡하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래도 혹시나 몰라 오늘 스케줄을 통째로 비워두라고 일렀다. 고향에서 온 사제를 만나는 것도 나중으로 미루라고 했다.
저택에 도착하자 애쉰 부인이 린델의 상태를 알렸다. 하루 종일 침실 밖을 나가지 못하게 했더니 잔뜩 시무룩해져 있다고 했다. 저녁과 간식을 먹이고서야 서재로 보내줬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카시어스 경을 뵙습니다.”
하루 전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사실을 잊은 듯 린델은 웃으면서 카시어스를 반겼다. 긴 의자에 앉은 카시어스는 웃지 않고 안부를 물었다.
“몸 상태는?”
“약을 많이 먹어서 졸린 거랑, 힘이 좀 없는 것 말고는 평소와 다름없어요.”
맞은편 소파에 앉은 린델은 괜찮다고 하는 대신에 세세하게 상태를 보고했다. 그의 목소리는 경쾌하기까지 했다. 일부러 쾌활한 척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었다.
“칼에 찔렸는데 무섭지도 않아?”
“총에도 맞아봤는걸요. 그리고 스승님 덕분에 눈 깜짝할 사이에 나아버려서 다친 것 같지도 않아요.”
“씩씩하군. 그래. 마차 강도를 위장해 너를 죽이고 싶어 하는 자가 누구일 것 같으냐?”
카시어스는 다짜고짜 화제를 전환했다. 그제야 린델이 놀라는 기색을 보이다가 얼굴을 굳혔다.
“스승님 말씀이, 이런 일은 보통 개인적인 원한 때문이라고 하셨어요. 제게 원한을 가질 만한 사람은 얼마 없지요.”
“굳이 따지자면 네가 아니라 날 싫어하는 거지. 멍청한 놈. 제 딴에는 증인도 증거도 남기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벌인 일이겠지만, 이번에는 놈이 운이 나빴어.”
“증거가 있습니까?”
“재판에서는 쓸 수 없는 증거지. 됐다. 그 녀석은 신경 쓸 것 없다.”
신경 쓸 것 없다고 잘라 말하자 린델이 진지해졌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기회는 한 번으로 족해. 감히 황제의 총신을 노렸으니,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라. 맞아. 살려주지 않을 것이다.”
카시어스는 가감 없이 죽음을 언급했다. 린델이 푸른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원래 하얀 얼굴이 살짝 창백하게 질렸다. 카시어스는 살짝 입매를 당겼다.
좋은 것만, 훌륭한 것만 보여줄 수 있었다. 하지만 황제의 곁에는 한없이 더럽고 추악한 것이 가득했다. 카시어스는 그것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황제의 배행 마법사로, 그리고 디비티에로 함께하려면 린델이 감내해야 할 것들이었다.
“그를 용서하라고 할 테냐.”
“저는……. 상대를 칼로 찌르면 자신 역시 칼에 찔릴 각오를 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가 알았든 몰랐든 저를 향해 휘둘렀던 칼끝은 그에게 돌아갑니다.”
세상의 진리를 말하는 린델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단호했다. 눈빛은 올곧았다. 선량하고 착한 주제에 심지가 곧은 녀석은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
“내 곁에 있으면 좋은 것도 추악한 것도 많이 보게 될 거야. 위험할 때도 있겠지. 좀 더 많은 것을 감당해야 할 거야.”
“폐하께……. 카시어스 경께서 구해주신 목숨입니다. 충성을 맹세했고, 저는 당신께 목숨을 바칠 겁니다. 위험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괜찮습니다.”
“또 괜찮다고 하는군. 사람 목숨이야 허무하지. 신께서 너의 생을 언제 어디에서 거둬 가실지 모르지만, 그래도 데스탄 같은 놈에게 당하는 건 허락 못 해.”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닌걸요. 운명이잖아요.”
“노력하겠다고 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린델은 웃으면서 대답했지만 카시어스는 그러지 못했다. 입안이 썼다. 사람을 잃은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냉정하게 잘라내기도 했고, 상실에 안타까워 비통히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래도 말간 얼굴을 하고 있는 린델을 보자니 순진한 녀석을 궁중 정치 한복판에 끌어들인 죄책감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양심을 쿡쿡 찔렀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미안한 감정이 든 적은 몇 번 없었다.
“안색이 나쁘십니다. 손을 잡아드릴까요?”
린델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카시어스는 이번에야말로 웃고 말았다.
“손만 잡으면 다 해결되는 줄 알아?”
“아닌가요?”
“맞아.”
카시어스는 부인하지 않았다. 손을 내밀자 린델이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잡고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곤두섰던 정신이 평안해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다친 건 린델인데 자신이 위로를 받고 있었다.
“사제님을 불러주셔서 감사해요. 카시어스 경.”
“어제 인사를 받았어.”
“또 해도 되죠. 사제님을 봐서…… 정말 기뻤어요.”
기쁜데도 울음을 참는 표정은 애달프기 짝이 없었다. 하늘색 눈동자에 신뢰가 어려 있어서 더욱 그랬다. 카시어스는 자신이 이렇게나 귀에 단 말에 약한 인간인가 의심했다. 아부와 칭찬에는 익숙했지만 이렇게까지 들뜬 적은 없었다. 아마도 린델이라서 그런 모양이다.
단단히 빠졌어.
녀석은 구애를 받았다는 사실을 잊어먹은 듯 스스럼없이 굴었다. 혼자만 안달이 난 사실이 별로였다. 그래도 웃는 얼굴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면서 카시어스는 린델의 이마에 닿을 듯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내가 구애를 했던 것은 잊지 않았겠지?”
“……네.”
길게 숨을 들이켠 린델이 얼굴을 붉히며 눈을 내리깔았다. 황금색 눈썹이 바람이 일어날 것처럼 팔락거렸다.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는 아직도 비밀이야?”
카시어스는 껄렁한 한량이 된 것처럼 구는 자신을 멈출 수가 없었다. 린델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더욱 그랬다.
“또 차이는 건가?”
린델은 카시어스의 숨결에 어깨를 움츠리면서 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젯밤과 같은 상황이었다. 주변이 밝은 것과 마차 안이라는 것만 빼면 말이다. 싫다고 하면 카시어스가 물러나 줄 터였다.
후회하기 전에 하고 싶은 걸 하기로 마음먹었다. 내일이면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몰랐다. 당신이 욕심난다고 말하려니 심장이 뛰었다.
린델은 용기를 내서 카시어스를 바라보았다.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남자가 웃고 있었다. 뭔가 멋지고 좋은 말을 해야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잉그란 사제님이 그러셨어요. 웃으면서 헤어졌는데, 영원히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요. 어제 그런 일이 있고 나니까…… 후회하기 전에 솔직해지기로 했어요.”
“맞아. 운이 나빴다면 다시 만나지 못했을 테지.”
“예.”
카시어스는 유능한 사냥꾼이었고 어렵게 잡은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욕망이란 현실에 충실한 것이었다. 솔직해지기로 했단다. 카시어스는 황제라서 안 된다며 사양하던 녀석을 부추겼다.
“후회하기 전에 무엇을 하고 싶은 거지?”
“그냥…….”
“그냥?”
“그냥 등을 만져보고 싶었어요.”
린델은 카시어스처럼 멋지게 구애를 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래도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다. 뭐든 허락한다고 한 것은 카시어스니까 당당하자 싶었다.
얼굴뿐만이 아니라 귀와 목까지 빨갛게 달아올랐으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는 린델을 보며 카시어스는 한 박자 늦게 웃었다. 등을 만져보고 싶단다. 용감하고도 노골적인 고백이었다. 옷을 갈아입을 동안에 그렇게 쳐다본 이유가 다 있었다.
“입을 맞춰도 될까?”
린델은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감기도 전에 카시어스의 입술이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다음은?”
카시어스가 거의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속삭였다. 린델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괜히 속상해졌다. 이다음이 키스라는 건 아는데, 어떻게 하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그걸 카시어스에게 말해야 했다. 자신이 애송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린델은 다시 한 번 용기를 쥐어짰다.
“키스를…… 키스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요.”
얼굴이 화끈거렸다. 코앞에서 눈을 반짝이고 있는 카시어스가 활짝 웃어서 더 그랬다.
“큰일인걸?”
카시어스의 입술이 다시 닿았다. 턱이 잡혔다. 동시에 카시어스가 아랫입술을 깊게 빨아들이는 바람에 린델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하지만 턱이 잡힌 탓에 도망칠 수가 없었다.
“욕심이 난다며?”
“놀라서요.”
“입을 벌려봐.”
린델은 그가 하라는 대로 입술을 벌렸다. 따뜻한 숨결이 입술을 삼켜왔다. 열린 입술 사이로는 혀가 침범해 들었다. 매끈하고 뜨거운 혀가 입안에 얽히는 감각은 린델을 소름 돋게 만들었다. 머릿속으로는 이게 뭔가 혼란스러웠지만 아찔함이 등줄기를 간지럽혔다. 심장이 조여들다 못해 멈출 것 같았다.
카시어스의 양손이 뺨과 뒷목을 감싸왔다. 키스는 더욱 깊어지면서 젖은 소리가 울렸다. 린델은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키스에 허우적거리다가 카시어스의 팔뚝을 꽉 잡고 말았다. 머리에 열이 오르다 못해 숨이 막힐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에 카시어스가 입술을 뗐다.
입술과 혀가 얼얼하다고 생각하며 린델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모든 게 멍했다.
“한 번 더.”
이번에는 린델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카시어스가 다시 입술을 겹쳤다. 뺨과 뒷목을 잡은 손은 단단하기 짝이 없었다. 키스는 방금 전보다 더욱 짙어졌다. 입술이 맞물리고 혀가 뒤엉킬 때마다 린델은 오싹함에 떨어야 했다. 야릇하게 젖은 소리가 귀에 들려와서 민망해졌다.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밀어붙이는 키스에 린델은 긴 의자에 반쯤 눕다시피 했다. 카시어스의 무게가 실려오는 바람에 린델은 가볍게 진저리 쳤다.
“다음이 뭔지는 알아?”
진하게 혀를 얽으며 빨아들인 후에야 입술을 놓아준 카시어스의 목소리는 한없이 낮았다. 어쩌면 으르렁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는데…….”
“이번에도 어떻게 하는지 몰라?”
“알아요.”
맨살을 맞대야 한다는 건 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 뿐이지만 말이다. 그때 마침 카시어스의 손이 허벅지를 쓸어왔다. 쾌락의 감각에 린델은 푸드득 떨었다.
“싫어?”
“아니요.”
린델은 고개를 저으면서 솔직하게 말했다. 흥분이라는 불꽃이 뱃속에서 피어올랐다. 키스만으로 어떻게 될 게 아니었다. 좀 더 만지고 닿고 싶었다.
“계속해요.”
가식 없는 린델의 대답에 카시어스는 웃어야 했다. 목덜미와 귀까지 빨개진 주제에 할 말은 다 한다. 하늘색 눈동자가 기대와 흥분, 두려움으로 떨린다. 순진하고도 용감한 녀석 때문에 심장이 뛰었다.
“용감하기 짝이 없어.”
카시어스는 린델의 입술이 아니라 뺨과 턱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혀끝으로 크라바트 위쪽의 목덜미를 살짝 핥아 올리자 린델이 고개를 저었다. 카시어스는 린델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뒷목을 더 단단히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