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소신이 폐하의 은덕으로 궁정 마법사로 영광을 누리고는 있사옵니다. 허나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가르치는 것보다 행하는 데 익숙합니다. 좋은 스승일지는 몰라도 훌륭한 스승이 될 수는 없지요. 이래서야 아셰리드엘 경에게 미안한 일입니다.”
카시어스는 서론을 길게 끄는 세투아를 보며 애매하게 웃었다. 궁정 마법사인 세투아는 황제의 측근 중에 측근으로 정치적 발언권도 컸고 균형 감각도 뛰어난 편이었다. 하지만 본인은 정치적 야심이 크게 없었기 때문에 부름을 받지 않고서야 자발적으로 황제의 집무실을 찾지 않았다.
대부분 황궁을 돌아다니면서 궁중인들과 노닥거리고 가십을 주워듣거나 사무실에 앉아 책을 쓰곤 했다. 그러던 세투아가 오랜만에 폐현을 청하더니, 밑도 끝도 없이 자기 자랑을 하고는 린델의 이름을 거론했다.
오래도록 세투아를 보아온 카시어스는 그가 꽤나 심각한 이야기를 꺼낼 거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래서?”
“아셰리드엘 경이 고위 마법을 배우려면 저로서는 무리입니다.”
카시어스는 세투아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들었다. 고위 마법을 배우려면 마탑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카시어스는 린델이 마법사라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황제의 배행 마법사로 곁에 데리고 다니는 것도, 세투아를 스승으로 붙여준 것도 일종의 정치 수업의 일환이라고 여겼다. 사교계의 가십과 정치판의 구도를 꿰고 있는 세투아는 훌륭한 입담으로 린델에게 여러 가지 것들을 알려주었다. 린델 역시 세투아의 수업이 제일 재미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 와 마탑의 도움을 받아야 한단다. 세투아를 스승으로 삼은 이유가 마탑을 배제하기 위한 것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아셰리드엘이 마법을 배운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기초를 배우기도 부족한 시간에 무슨 고위 마법이냐.”
“폐하, 아셰리드엘 경은 천재입니다.”
“천재라고?”
“예. 제 평생 그와 같은 재능을 가진 이를 본 적 없습니다.”
뜻밖의 대답이었다. 카시어스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세투아의 입에서 나온 천재라는 단어는 그리 가볍지 않은 의미였다.
“너와 비교해서는?”
“비교할 것도 없습니다. 제가 선스톤을 만들기까지 7년이 걸렸습니다. 아셰리드엘 경은 2개월이면 충분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아이였고 지금의 아셰리드엘 경은 어른이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닙니다. 평생 동안 선스톤을 만들지 못하는 마법사가 얼마나 많은지 아시지 않습니까. 아셰리드엘 경에게는 체계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폐하.”
세투아는 진심이었다. 린델이 마력을 다루는 실력은 무서울 지경이었다. 어제는 수호 마법 중에 방패를 마스터했다. 기본 마법이긴 하지만 보통은 몇 개월은 걸리는 것이었다. 기뻐하는 린델의 얼굴을 보며 세투아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기에는 재능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다.
카시어스가 생각에 빠진 듯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세투아는 조바심이 났다.
“시아무크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셰리드엘 경이 고위 마법을 배우면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반 년, 아니, 3개월 안에 치유 마법을 마스터할 수 있습니다.”
세투아는 카시어스의 성격을 알았다. 뛰어난 인재는 어떻게든 써먹으려고 했다. 공격 마법으로 분류되는 흑마법이 실전되면서 마법이 전쟁을 좌지우지하는 시대는 오래전에 끝났다. 이제는 군인이 총과 칼로 전쟁을 했다. 그래도 마법사는 여전히 유용하게 쓰였다. 각종 수호 마법은 병사들의 안전을 도모했고, 치유 마법은 죽음에서 생명을 건져 올렸다.
시아무크 제국의 황제가 된 세무흴이 호전적인 전쟁광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대륙에서 손꼽히는 두 나라 간에 전쟁은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건 몰라도 치유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는 한 명이라도 더 늘어나는 게 좋았다.
세투아의 논리적인 설득에 카시어스는 입매를 살짝 당겼다. 자신이 린델에게 바라는 것은 마법사로서의 능력이 아니라 제 한 몸 지킬 수 있는 적당한 처세였다. 곁에 두고 정치를 가르치려고 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러다 습격 직후에는 마법사로서 영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린델은 정치를 배울 수도 있고, 혹은 마법사로서 그 재능을 꽃피울 수도 있다. 린델의 의향을 물어본다면 마법을 배우고 싶어 할 것이다. 그의 바람을 지지해 줘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지금의 자신은 린델을 어디다 가둬두고 싶었다.
최근 카시어스의 컨디션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마치 하늘 높이 날아오른 사냥매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굳이 집중하지 않아도 두 개의 벽 너머에 린델의 심장 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지경이었다. 반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이렇게까지 안정적으로 힘을 쓰는 것은 처음이라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와의 정사는 다디단 온전한 쾌락을 선사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직시할 수 있게 만들었다. 마도 시대의 대영주들이 디비티에에게 집착했던 이유를 이해할 것 같았다. 어느 미친놈은 황금으로 만든 새장에 디비티에를 가두고는 어디든 데리고 다녔다고 했다. 또 다른 놈은 디비티에가 죽자 그 시신을 먹기까지 했다는 기록도 있었다.
자신은 그 정도까지는 미치지 않을 거라고 여겼지만, 그래도 황금 새장은 꽤나 끌렸다.
“네 뜻은 알겠으나 서두르지 않겠다.”
“폐하.”
“그는 마법사가 되기를 소원하겠지. 그러나 선결해야 할 것이 있으니 기다려라.”
“뜻을 따르겠습니다.”
기다리라는 명령이 긍정의 의미라는 것을 세투아는 모르지 않았다. 카시어스의 뜻을 받든 세투아는 깊숙이 절을 하고는 물러났다.
혼자가 된 카시어스는 손가락 끝으로 의자 손잡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인지를 하자 린델이 보고 싶어졌다. 정확히는 손을 잡고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큰일이군.”
이러다가 정말 그를 황금 새장에라도 가둘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카시어스는 린델을 불렀다.
카시어스는 반듯하게 절을 하고 선 린델의 손을 다짜고짜 잡지 않았다. 욕망에 져서 그를 부르기는 했으나 그런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대신 카시어스는 준비된 초대장을 내밀었다.
“받아.”
초대장을 받아 든 린델은 겉봉에 찍힌 인장을 확인했다. 황실의 상징인 독수리가 찍혀 있었고, 아셰리드엘 페르난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린델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장을 뜯어 내용을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황실 파티 초대장이었다.
“폐하. 이건 무엇입니까?”
“보이는 대로 초대장이야. 트윈문 파티지.”
활짝 웃는 카시어스를 보며 린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3개월에 한 번씩 두 개의 달이 뜰 때면 황제가 주최하는 파티가 열렸다. 보통 초대장은 행사가 열리기 한 달 전에 받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번 트윈문 파티는 이제 겨우 열흘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문제는 시일이 아니라 초대장에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 않지만 확인이 필요했다.
“제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맞아. 짐의 배행 마법사가 아니라 아셰리드엘 경으로 참석할 테니까.”
린델은 초대장을 든 자세 그대로 카시어스를 바라보았다. 배행 마법사가 아니라 아셰리드엘로 파티에 참석하라는 것은 정식으로 데뷔를 한다는 의미였다. 언젠가 이럴 때가 올 줄 알았기에 린델은 의식적으로 얼굴에 힘을 주었다.
“폐하의 명성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마치 전장에 뛰어들기 직전의 기사처럼 비장하게 맹세를 하는 린델을 보며 카시어스는 웃었다.
“누가 보면 전쟁터에라도 뛰어드는 줄 알겠군. 파티는 즐기는 법이야.”
“즐기기에는 아직 부족합니다.”
“약속은 잊지 않았겠지?”
“제가 무슨 약속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무슨 약속을 했었냐고 물어보려던 린델은 곧 얼굴을 굳혔다. 데뷔 첫 춤을 카시어스와 추기로 했다. 그것 때문에 몇 달 동안 계속 춤을 배워왔다.
카시어스가 일방적으로 한 약속이기는 하지만, 린델은 한 번 하겠다고 한 것을 무르자고 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황송하오나, 춤은 안 될 것 같습니다. 폐하.”
“왜?”
“아직 완벽하지 않습니다. 세 번 중에 한 번은 약속된 곳과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거든요. 부끄럽게도요. 이런 파트너라면 창피하실 거예요.”
린델은 자신의 상태를 솔직하게 고했다. 딱 한 곡이면 된다고 했기 때문에 린델은 필사적으로 연습했다. 순서도 모두 외웠다. 하지만 막상 실전이 되면 세 번에 두 번은 다른 방향으로 스텝을 밟곤 했다. 무도회에서 그랬다가는 모두의 비웃음을 살 게 뻔했고, 그런 수치를 황제에게 안겨줄 수 없었다.
“실수해도 괜찮아.”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그다음은 그란디스 메시스의 전야제일 텐데? 그때가 좋아?”
그란디스 메시스의 전야제에는 주변국의 사신들이 참석했다. 그들 앞에서는 더더욱 실수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다른 선택지가 있을 겁니다.”
“세투아가 너를 마탑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충언을 하더군.”
“스승님께서요?”
“시아무크 제국과 전쟁이 있을 거라는 소리는 들었겠지?”
“예. 알고 있습니다.”
갑자기 세투아와 시아무크 제국의 이름이 튀어나오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린델은 착실하게 대답했다. 화제 전환은 카시어스의 특기였다.
“세무흴이, 그러니까 이번에 시아무크의 황제가 된 자가 전쟁광으로 유명해. 모든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미친놈이지. 빠르면 내년 봄에, 늦어도 여름에는 그가 직접 군을 이끌고 침략 전쟁을 일으킬 거야. 거의 예정된 일이지. 그때가 되면 나와 함께 가야 해. 이름뿐인 배행 마법사가 아니라, 진짜 마법사가 되어서. 이건 명령이야, 아셰리드엘.”
카시어스는 린델을 향해 명령이라고 했지만 스스로에게 하는 경고이기도 했다. 세무흴은 분명 직접 군을 이끌고 전쟁을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도 역시 친정을 해야 했다. 그렇게 되면 디비티에인 린델을 옆에 둬야 했다. 황금 새장에 가둬두기보다는 제 몫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았다. 특히 전장에서 자신의 몸 정도는 지킬 수 있는 재주가 필요했다.
명령이라고 하자 린델은 이번에야말로 진짜 전쟁터에 뛰어들 것 같은 얼굴을 했다.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수확제가 끝나면 마탑에서 마법을 배우도록 해. 마탑의 늙은이들이 너를 두고 싸움질을 하겠지만, 세투아의 줄을 잡고 있으면 그럭저럭 버틸 만할 거야.”
“예.”
“그러니까 수확제 이후의 다른 선택지는 없어.”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소리를 다시 들은 린델은 쓴웃음을 삼켰다. 트윈문 파티에서 춤을 춰야 하는 이유가 너무 거창했다. 그래도 마법사로서 참전을 해야 한다는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자신의 애인은 황제였다. 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노라고 맹세했으니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최소한의 경고는 해드려야 했다.
“미리 말씀드릴게요. 부끄러우셔도 저는 몰라요.”
“너답지 않은걸?”
“최선을 다하겠지만……. 이번만큼은 자신이 없습니다.”
린델은 정말 자신이 없었다. 카시어스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최선의 노력이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은 춤에 재주가 없었다.
“날 겁주다니. 그럼 실력이 어떤지 확인해 볼까?”
“확인이요?”
“걱정 많은 애인을 위한 중간 점검이라고 하지.”
중간 점검이라고 한 카시어스는 당장에 시종장을 호출했다. 그리고 린델이 보는 앞에서 다음을 명했다.
“짐이 아셰리드엘과 춤을 출 테니, 준비하도록. 장소는 대무도회장이 좋겠지.”
카시어스의 호쾌한 명령에 시종장은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린델은 활짝 웃는 카시어스를 아연하게 보며 기절하고 싶다는 낯선 충동에 사로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