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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55/137)

-55화-

“하하하? 정말?”

마법사가 무슨 말을 했는지 황제가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에 시종장은 다시 한 번 한숨을 삼켰다. 지금껏 황제를 모셔오면서 저렇게 즐거워하시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니, 본 적이 몇 번 있기는 했는데, 그 상대가 애인인 것은 처음인 게 확실했다.

지금껏 황제의 공식, 비공식 애인은 모두 네 명이었다. 엣썬의 여왕이나 북부의 대공비의 경우는 정치적 야합에 가까운 결탁이었다. 그래서 일견 너그러운 애인처럼 보여도 늘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아름다운 여인에게도 난잡한 궁정식 연애에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황제였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사랑에 빠진 것처럼 굴고 있었다. 권력을 이용해 보란 듯이 이벤트를 여는 것은 황제다웠지만, 애틋하고도 달콤한 시선만큼은 전과 달랐다.

아무래도 황제의 외박은 계속 이어질 것 같아서 시종장의 심정은 복잡해졌다.

안전이 걱정되신다면 차라리 궁을 하나 하사하세요. 황궁에 빈 궁전이 넘쳐나요. 그리고 그곳을 공작 저택의 시종들로 가득 채우세요.

황궁에서 궁전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황족과 후궁의 특권이었지만, 황제가 우기면 상관없었다. 애인이 후궁이 되는 경우는 흔했다. 그리고 제국의 역사를 뒤져보면 남자 후궁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언젠가 황제께서 기상 의식에 지각하는 것보다는 남자 후궁이 낫다고 생각하던 시종장의 시선 끝에 조용히 연회장으로 들어서는 근위시종이 하나 걸렸다. 그는 종종 걸음으로 다가와서는 바깥일을 알렸다.

재차 내용을 확인한 시종장은 잠시 인상을 썼다. 급한 일이었지만 당장에 황제의 춤을 멈출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왈츠는 종반에 이르렀다.

곧 연주가 끝나고 황제와 마법사가 인사를 하는 것을 보며 시종장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폐하. 쥴란 공작이 폐현을 청하고 있다 합니다.”

“쥴란 공작이? 왜?”

“윌리온 자작의 사냥총이 폭발해서 크게 다쳤다고 합니다. 목숨은 부지했는데 파편을 제거하려면 수술을 해야 하는지라, 쥴란 공작이 폐하의 은덕을 구하고 있습니다.”

“마법사가 필요하겠군.”

마법사는 모두 황제의 충성스러운 신하였고 사사로이 마법을 쓰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특히 치유 마법을 행할 수 있는 마법사는 특별히 황제의 관리를 받았다. 전쟁터가 아닌 이상에야 황제의 허락이 떨어져야만 치유 마법을 쓸 수 있었다. 예외가 있다면 마법사의 가족이나 연인만이 가능했다.

뛰어난 마법사는 황제의 무기 중에 하나였다. 귀족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닥치면 황제에게 자비를 빌었다. 거기에는 분명한 권력의 힘이 작용했고, 때로 귀족들은 자신이 가진 것 중에 값비싼 것을 내놓는 것으로 대가를 치렀다.

쥴란 공작은 사사로이 따지면 황제의 매형이었고, 윌리온 자작은 외조카였다. 황제가 자비를 베풀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쥴란 공작을 만나겠다. 세투아를 불러라.”

“명 받들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시종장은 뒷걸음을 치며 물러났다. 그동안에 카시어스는 계속 린델을 바라보았다. 윌리온 자작의 사고 소식에 조금 전까지 미소가 가득하던 린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린델은 둔한 편이긴 했지만 아예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다. 사실은 꽤나 현명했다. 윌리온 자작인 니콜라스가 다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흔들리는 하늘색 눈동자를 보며 카시어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니콜라스와 데스탄을 이간질하라는 명령의 결과가 하필이면 지금 순간에 린델의 귀에 들어가 버리다니 얄궂은 일이었다.

“아쉽지만 춤은 그만 춰야겠어.”

“네.”

“따라와라.”

카시어스는 상기된 린델의 뺨을 손등으로 살짝 두드리고는 뒤돌아섰다. 그리고 린델은 복잡한 심정을 감추며 카시어스의 뒤를 따랐다.

튤립의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쥴란 공작은 황제가 나타자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쥴란 공작은 평소처럼 중후한 멋쟁이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초조함과 절박함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카시어스는 길게 말을 끌지 않았다.

“마음이 조급할 터이니 따로 절차를 밟을 필요 없다. 세투아를 데려가라. 감사의 인사는 니콜라스가 쾌차한 후에 해도 좋다.”

감격에 겨워 절을 한 쥴란 공작은 때마침 도착한 세투아와 함께 자리를 떴다. 카시어스의 곁에서 일련의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본 린델은 기분이 복잡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생각하는 그게 맞는데 당장에 카시어스에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쥴란 공작과 세투아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카시어스가 린델을 돌아보았다.

“총기 폭발 사고는 종종 있는 일이지만, 그게 부주의인지 아닌지는 당사자가 판단하겠지. 소란스러워지겠군.”

린델은 가볍게 혀를 차는 카시어스를 보며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황제의 배행 마법사로 황궁을 드나든 지 3개월째였다. 지체 높은 가문의 후계자들이 계승 문제를 두고 서로 싸우는 일이야 흔했다. 그리고 쥴란 공작의 두 아들 역시 사이가 나쁜 것은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알았다. 혹시나 하는 의구심에 확신이 들었다.

카시어스가 형제 사이에 싸움을 붙인 것이었다.

직접 데스탄에게 손을 쓰지 않은 이유도 짐작 갔다. 자신이 휴가를 받아 보름간 자리를 비운 이유가 데스탄에게 강한 처벌을 원하는 시위였다는 소문이 크게 퍼진 상태였다. 그 상황에서 데스탄에게 문제가 생기면 카시어스나 자신에게 의혹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카시어스가 황제라고 해도 그런 정치적 부담은 피하는 게 옳았다.

이해는 했다. 그래야 하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아주 작은 가시가 심장에 박혀서 따끔거렸다. 이것이 양심인지, 죄책감인지, 혹은 자기기만인지는 몰랐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시커멓고 진득한 것이 심장에 달라붙는 기분이었다.

이곳이 황궁임을, 조금 전까지 화사하게 웃던 카시어스가 황제라는 것을 차갑게 실감했다.

“안색이 창백해. 어디가 안 좋아?”

“괜찮습니다, 폐하.”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다.”

카시어스가 무엇이 맞다고 하는 건지 알아들은 사람은 린델뿐이었다. 근위시종들이 시립해 있었기 때문에 린델은 얼굴을 굳히는 것 말고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네 눈을 가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린델은 단호하게 말하는 카시어스를 바라보았다. 그가 요구하는 것은 한결 같았다. 스스로 망가지지 마라. 휩쓸리지 마라. 황제의 측근으로 네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춤을 춘 것도, 음험한 암투도 모두 현실이었다.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린델은 다정한 애인이 아니라 제국의 황제를 향해 말했다.

하스넨 남작의 검술 지도를 받게 된 린델은 이틀에 한 번씩 제라르와 대련장을 찾았다. 말이 대련이지, 실상은 이제 겨우 검을 잡은 린델이 기초 동작을 익히는 데 제라르가 도움을 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린델이 닐르에서 구축한 인간관계는 협소하기 짝이 없었고, 그중에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제라르가 유일했다. 유쾌한 말재주를 가진 제라르와 친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비록 비밀을 털어놓을 만큼 가깝지는 않았지만, 가벼운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트윈문 파티에서 폐하와 미뉴에트를 추신다고요?”

“예. 그렇게 됐습니다.”

제라르의 되물음에 린델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련 연습을 하고 휴식을 가지는 중이었다. 연습용 목검을 내려놓고 땀을 닦다가 제라르가 황제와 린델의 춤에 대해 언급했다.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은 궁정인들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어제 오후에 카시어스와 린델이 대연회장에서 춤을 춘 것은 그날 당장에 사람들의 입을 타고 퍼지는 것이 당연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황제와 춤을 추게 된 경위를 말하게 되었다.

“부끄럽지만 제가 춤에 재주가 없어서, 황제 폐하께 누를 끼쳐드릴 것 같아 걱정입니다.”

“실수해도 괜찮지만, 경께서는 실수를 하고 싶지 않으신 거군요.”

“네.”

“그럼 연습밖에 없습니다. 눈 감아도 스텝을 밟을 수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게 최선이겠죠.”

린델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제라르는 속으로 혀를 찼다.

무도회에서 동성끼리 춤을 추는 경우는 왕왕 있었다. 대부분 어린 숙녀들이 짝을 지었고, 드물긴 하지만 신사들이 결투나 제의를 대신해 춤을 추기도 했다.

그리고 황제의 춤은 좀 더 특별했다. 동성이든 이성이든 황제가 특별히 청하여 춤을 추는 것은, 상대가 자신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는 의미였다. 공식적으로는 피후견인이자, 비공식 애인이 데뷔하는 것이니 일부러 챙길 수도 있긴 했다.

황제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늑대들 무리에 애인을 두려면,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위협 정도는 해야 했다. 유난하고 노골적이어야 잘 먹혔다.

궁정 사교계에는 린델이 황제의 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유혹하려는 사람이 잔뜩 있으니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제라르는 그중에 한 명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입을 열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당당함입니다. 실수를 해도 안 그런 척하는 것도 방법이죠. 당황한 얼굴로 멈춰 서지만 않으면 될 겁니다.”

“오, 그거 무서운데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실수를 하면 식은땀이 나고,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하고, 몸은 얼어붙죠. 예, 저도 경험이 있습니다. 군무 중에 칼을 놓쳐서 완전히 얼어버렸죠. 열네 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리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대로 쥐구멍에 숨고 싶었지만, 도망갈 수가 없었습니다. 떨어진 칼을 줍고 군무를 끝마쳤죠. 그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 말씀해 드릴까요?”

“예. 부탁드립니다.”

“그날 하루는 다들 저를 놀리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사흘쯤 지나자 아무도 제 실수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금방 잊힙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쾌활한 제라르의 응원 때문에 린델은 웃었다. 닐르에 와서 느낀 점이 있다면 궁정 귀족들은 대부분 말을 잘한다는 점이었다. 중의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이 난무하는 것이 흠이긴 했지만 그런 의미에서 제라르는 아주 훌륭한 대화 상대였다.

“대범한 마음을 가지도록 해야겠습니다.”

린델이 활짝 웃었기 때문에 제라르 역시 같이 웃었다. 마음 같아서야 자신이 연습을 도와주겠노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제라르는 자신과 린델 사이에 이곳에 존재하지 않고 있는 황제의 존재를 느끼며 잠시 머뭇거렸다.

호감을 느낀 상대에게 이렇게나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를 알고 싶어서 친해지고 싶어서 친구가 되자고 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열 살 먹은 어린아이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거라고 타박을 들을 정도로 순수한 의도였다.

제라르는 감히 황제의 연인을 넘볼 만큼 무도하지도 멍청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한 달 전, 황제께서 린델을 눈앞에서 채가는 바람에 묘한 감정이 끼어들었다. 내 것이 아닌데도 빼앗긴 것 같은 느낌은 기묘하기 짝이 없었다.

처음부터 출발선이 달랐다. 제라르는 그 사실에 그다지 실망하지도 안타까워하지도 않았다. 그는 탐미주의자였고 우아한 미인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을 좋아했다. 지금 딱히 어떻게 해보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그를 알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리고 곁에 있다 보면 언젠가 기회가 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기다릴 줄 아는 남자는 이곳에 없는 황제를 무시해 보기로 했다.

“미뉴에트는 혼자서 연습하기에는 조금 힘드실 텐데. 대련이 끝나고 제가 연습을 도와드릴까요? 아니, 제가 도와드릴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 친구 좋다는 게 뭐겠습니까? 제 얼굴에 금칠을 하는 것 같지만, 이래 봬도 제가 꽤 춤을 춥니다.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겁니다.”

“친구가 좋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기대로 반짝이는 린델의 시선을 받으며 제라르는 웃었다. 용감한 자가 미인을 차지한다는 고사가 틀리지 않았다. 두근거림과 흥겨움은 대련이 끝나고, 이른 저녁 식사를 함께한 후에, 무도장에서 춤을 출 때까지 이어졌다가 한 존재의 등장으로 완벽하게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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