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137)

-56화-

카시어스가 공작 저택에 도착한 것은 해가 지고 8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2층 계단을 오르던 카시어스는 자신의 귀에만 들리는 린델의 웃음소리에 살짝 인상을 썼다.

애쉰 부인에게서 린델이 제라르와 춤 연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었다. 제라르가 연습을 도와주겠노라 자청했다는 소리에 코웃음을 쳤다. 친구라고 붙여줬더니 무슨 수작이냐 싶었는데 린델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순간에 기분이 상했다.

그리고 무도장 입구에 서서 린델과 제라르가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확인하자 속이 뒤틀렸다. 오르골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두 사람이 썩 잘 어울려서 더 그랬다.

카시어스는 낯선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았다. 그래서 한껏 그들을 방해했다.

“아셰리드엘.”

커다랗게 이름을 부르자 린델과 제라르가 동작을 멈추고 동시에 이쪽을 바라보았다. 제라르는 크게 놀라는 기색 없이 고개를 숙였고, 린델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스스럼없이 다가오려던 린델이 멈칫 하고는 적당한 거리에 멈춰 서서 절을 했다.

“신의 축복을 받은 위대한 불꽃의 지배자이시며, 열하나의 강과 일곱 산맥의 군주이시며, 법과 정의의 수호자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빛나는 영광이 무궁하기를 바랍니다.”

꼬리가 있었다면 흔들고도 남았을 맹목적인 호의에 카시어스는 유치한 질투의 감정을 한쪽으로 치워버리고는 린델과 제라르를 일으켜 세웠다.

“미뉴에트를 연습 중이었군.”

“예.”

“제라르 경. 그대는 헌신적인 친구의 귀감이다. 이렇게 늦게까지 도와주다니 말이야.”

“황공하옵니다.”

카시어스에게 지목을 받은 제라르는 유순히 대답했다. 늦게까지 도와주고 있다는 말은 왜 지금까지 남아 있냐는 질책이랑 같았다. 그래도 제라르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다만 날카로운 시선이 따끔하다고는 생각했다.

“짐이 아셰리드엘과 할 이야기가 있다. 자리를 비켜라.”

노골적인 축객령이었다. 제라르는 쓴웃음을 속으로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물러나옵니다, 폐하.”

카시어스를 향해 절을 한 제라르는 린델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무도장을 나섰다.

그가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린델은 한 걸음 더 카시어스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의 작은 신경전은 알아보지 못했지만 카시어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은 느꼈다.

“급한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때마침 오르골 음악 소리가 끊겼다. 정적 속에 린델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난번처럼 함께 어디를 가야 하나 싶었다. 그런데 카시어스가 대답 대신 허리를 잡아채고는 입술을 맞부딪혀 왔다.

키스는 이제 익숙했다. 반사적으로 입술을 벌리자 카시어스의 혀가 들어왔다. 왜 갑자기 키스인가 싶었지만 입안의 예민한 곳이 혀에 쓸리자 정신이 없어졌다. 키스는 시작부터 야했다. 린델은 꼼짝도 할 수 없이 카시어스에게 끌어안긴 채 키스를 선사 받았다.

신음이 새어 나오다 못해 다리에 힘이 풀릴 때쯤에야 입술이 떨어졌다. 린델이 겨우겨우 숨을 들이쉬고 있는데 카시어스의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인이 다른 사내랑 춤을 추고 있는 것을 보자니 속이 쓰려.”

“그게……. 제라르 경은 도와주신 것뿐이에요.”

“알아. 그래도 질투가 났어.”

질투라는 단어에 린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시어스를 올려다봐야 했다. 자신이 들은 게 맞나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질투요?”

“그래. 질투.”

세상에. 질투란다.

질투의 사전적 의미를 떠올린 린델은 기쁘고도 난감했다. 제라르와 미뉴에트를 연습한 것뿐인데 카시어스가 질투를 할 줄은 몰랐다.

“연습이었어요.”

“바람을 피우려면 들키지 말았어야지.”

“카시어스 경.”

여유롭게 웃고 있는 카시어스가 놀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괜히 억울했다.

바람이라니.

그건 입에 담기도 힘든 단어였다.

“나는 관대한 후견인이지만, 질투가 심한 애인이기도 해. 아무하고도 춤을 추지 말라는 소리는 아니야. 그래도 늦게까지 단둘이 이러고 있으면 오해하지 않을 수가 없어.”

“제가 부주의했군요. 죄송해요.”

“사과를 할 필요까지는 없어. 다만 질투가 심한 애인에게 맞춰 줘. 다음에는 제라르를 쫓아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쫓아내신 거였어요?”

“그래.”

당당하게 제라르를 쫓아냈다고 말하는 카시어스 때문에 할 말을 잃었다. 제라르에게 미안했고, 정말 카시어스가 질투가 심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게 좀 귀엽다고 생각해 버렸다. 언제나 여유롭던 남자가 겨우 이런 걸로 질투를 한다고 고백하다니 말이다.

“저녁 늦게, 단둘만 아니면 되는 거죠?”

“제라르는 안 돼. 연습을 도와줄 선생을 따로 부르도록 해.”

린델은 한계를 정하려고 했지만 카시어스는 여지를 주지 않았다. 달리 파고들 틈이 없었다. 린델은 순순히 그러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놓아주시겠어요?”

린델은 끌어안고 놓아주지도 않는 카시어스를 향해 물었다. 보통 이러면 바로 침실로 직행했다.

어젯밤에는 연회가 있어서 카시어스가 찾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은 린델이 황궁에 가지 않았다. 얼굴을 본 것은 하루가 꼬박 넘은 상태였다.

그를 만나 기쁜 마음이 한껏 부풀어 있었다. 놓아달라는 말은 유혹의 의미였다. 자신도 뻔뻔해졌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카시어스의 입술이 귓가에 닿았다.

“유혹은 반갑지만, 안타깝게도 가야 할 곳이 있어.”

“네. 어디로 가실 건가요?”

“가지 말자고는 안 하는군.”

“밖에 나가는 것도 좋아요.”

카시어스와 함께가 아니라면 밖에 나가는 게 힘들었다. 오페라나, 연극, 서커스 등등. 어떤 것이든 좋았다.

“글쎄. 너무 기대하지는 마. 놀러 가는 건 아니니까.”

“그럼요?”

“준비해. 가서 이야기하지.”

카시어스가 그제야 끌어안은 린델을 놓아주었다. 린델은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카시어스는 중요한 일은 당장에 닥쳐서야 알려주는 고약한 버릇이 있었다.

그래도 그리핀을 타고 이동하는 것만 아니라면 괜찮다고 생각하며 움직였다.

구시가지의 한구석에 위치한 격투장은 한때는 아름다운 소극장이었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낡을 대로 낡아서 옛날의 영광이 빛바래진 상태였다. 1층 관객석에 있어야 할 의자는 모두 뜯겨나가고 그곳에는 격투 무대가 차려 있었다.

3층에 위치한 박스석에 앉은 린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난 3개월 동안 카시어스와 함께 온갖 곳을 돌아다녔다. 격투나 검투를 보러 다닌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보통 이런 격투장은 내기 도박이 함께하기 때문에 열기가 상당했다. 하지만 이곳은 다른 곳에 비해 조금 더 치열해 보였다. 1층에 있는 무대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온갖 응원과 욕설이 난무했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싸우고 있는 격투가들도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러니까 거칠었다.

“여기가 어딘가요?”

옆에 앉은 카시어스를 향해 물었다. 검은 머리에 가면까지 쓰고 있는 남자가 웃었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이곳도 익숙해 보였다.

“닭장.”

“닭장이요?”

“불법 격투장이지. 맨손처럼 보이지만 손에 단검이 들려 있거든. 여기서 잡히면 치안대로 직행이야. 괜찮아. 걱정하지 마. 내가 누군지 자꾸 잊어버린다니까. 여기 손님의 3할은 귀족이야. 치안대장도 어지간해서는 손쓰지 못해.”

“이런 곳에 무슨 볼일이 있으신가요?”

“아직 멀었어. 조금 더 기다려.”

카시어스가 기다리라고 했기에 린델은 더 이상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린델은 1층에서 일어나고 있는 격투에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카시어스는 그런 린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면이 린델의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지만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린델은 싸움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치고 때리는 것을 보고 흥분하기보다는 아프겠다고, 다 낫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겠다고 걱정하곤 했다.

심성이 착한 녀석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둔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제라르가 어설프게 서성거리고 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린델이 둔한 거야 나름대로 괜찮았다. 하지만 제라르가 문제였다.

황실 사교계에서 혼인은 의무였고 불륜은 필수였다. 애인, 정부, 총희, 애첩, 미동. 쾌락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이들을 지칭하는 이름이 넘쳐났다. 그리고 하룻밤의 불장난은 애교에 불과했다. 황제의 애인이라고 해도 다를 바는 없었다. 오히려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원하는 자들이 있었다.

카시어스는 자신의 애인이 다른 년놈이랑 눈이 맞는 것을 지켜볼 정도로 관대하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이야 변덕스러웠고 내일이라도 당장 관계가 파탄 날 수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사귀는 동안만큼은 상대에게 집중하는 게 예의였다. 린델이 바람을 피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황실 사교계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화려하고 흥겨운 파티에서 미약과 폭력을 사용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늑대와 암사자들 사이에서 린델을 지킬 가디언으로 생각한 제라르까지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으려고 하고 있었다. 골치 아픈 일이었다.

누구를 붙여줘야 하나.

카시어스는 머릿속에서 쓸 만한 인물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아무래도 제라르만 한 적임자가 없었다. 속이 음험한 다른 놈들과 달리 그는 확실하게 정공법을 쓰는 성격이었다. 물론 그래서 더 위험하긴 했다.

연적이 될 수도 있는 녀석을 옆에 두고 봐야 하나 혀를 차고 있는데 시종이 다가와 준비가 되었다고 알려왔다. 카시어스는 시종이 사라지는 것을 기다렸다가 린델을 불렀다.

“린델.”

“예.”

기다렸다는 듯 린델이 카시어스를 바라보았다. 얼굴의 반을 가린 가면을 쓴 린델의 눈빛은 반짝거렸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잔뜩 기대하던 녀석의 얼굴이 곧 얼어붙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재난거리를 던지는 것은 자신의 나쁜 버릇이었다.

“반대편 3층 좌석에서 익숙한 얼굴을 찾아봐.”

린델은 카시어스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랐다. 오래된 극장은 그다지 크지 않았고 밝았기 때문에 3층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남자와 여자가 고르게 섞여 있었다. 가면을 쓴 자도 있었고 맨얼굴을 드러낸 자도 있었다. 그리고 다들 잘 차려입었다.

도대체 누구를 찾으라는 거지?

아는 얼굴을 찾아 찬찬히 고개를 돌리던 린델은 순간 숨을 멈췄다. 아는 이가 있었다. 닐르에 있다고 이야기는 들었지만 여기에서 만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알아보았느냐?”

“……예.”

린델은 가까스로 대답했다. 그래도 옆에 앉은 카시어스를 바라보지 못했다.

캐롤라인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 가면을 쓰고 남장을 하고 있었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자신에게 살인 누명을 덮어씌운 캐롤라인이 웃는 얼굴을 하고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무어라 떠들고 있는 그녀는 한껏 들떠 보였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델라우드 백작 성의 정원이었다. 자신이 하인들의 손에 끌려갈 때, 그녀는 워든의 품에 안겨 훌쩍거리고 있었다. 그때로부터 3개월이 지났다. 온갖 일들이 일어났지만 자신은 아직 누명을 벗지 못했다.

필로나 남작의 일가가 닐르에 왔다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겨울이 오기 전에 끝날 거라고 했던 카시어스는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했었다.

린델은 그날이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네게 달렸지.”

그제야 린델은 카시어스를 보았다. 잔뜩 긴장한 자신과 달리 그는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