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137)

-60화-

카시어스는 신경에 거슬리는 소음에 눈을 떴다. 수면등이 켜진 침실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린델은 바로 옆에서 잠들어 있었고, 거센 바람에 반쯤 열린 창문이 요란하게 덜컹거렸다.

상체를 일으켜 자리에 앉은 카시어스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 달이 떠 있던 하늘은 어두컴컴했다. 바람의 냄새도 구름의 흐름도 심상치 않았다. 건조한 여름이 끝나가고 있었다. 아마도 내일은 비가 내릴 것 같았다.

덜컹.

다시 한 번 창문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환기를 위해 열어둔 창문을 고정시키던 끈이 풀린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카시어스는 왼팔에 닿아 있는 온기를 느끼며 잠시 멈칫했다.

깊게 잠든 린델이 소음 때문에 깰 것 같지는 않았지만 바람이 들이닥치는 것을 생각하면 창문을 닫아야 했다. 그러나 린델을 놓기가 싫었다.

“이런.”

카시어스는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잠시도 떨어져 있기 싫어서 소음을 내는 창문을 닫지 않으면 어떨까 생각한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싫은 건 싫으니까 말이다.

욕망에 충실한 카시어스는 잠든 린델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뺨에 손등을 대었다. 얕은 숨결과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격렬한 정사 후라 그런지 피부가 닿는 것만으로 극적인 안정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손을 떨어트려도 그와 닿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덜컹. 덜컹.

이번에는 좀 더 큰 소리였다.

카시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신에 침대 반대편에 있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수면등이 닿지 않는 거리였고 달빛도 없었지만 카시어스의 침실 내부가 또렷하게 보였다. 린델은 바로 옆에 있었고,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카시어스는 마력을 이용해 창문을 닫고 걸쇠를 걸었다.

그 모든 과정이 짧은 순간에 막힘도 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이래서야.”

카시어스는 가볍게 혀를 찼다. 마법사와 달리 기사의 마력이란 보통 물리력으로 치환되었다. 마력을 검에 맺히게 해서 강도를 더하거나, 혹은 체내의 마력을 밖으로 내보이며 상대를 위협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건 카시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칼을 들고 저택을 때려 부술 수는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폭주에 가깝게 발광하면서 어머니께서 아끼시던 썬룸을 박살내기도 했었다. 지금처럼 창문을 닫고 걸쇠를 거는 섬세한 작업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가능했다.

제어되지 않은 마력은 언제나 끊임없이 카시어스를 갉아먹었다. 폭주하지 않기 위해 손가락에 껴야 했던 반지는 족쇄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은 모든 게 경이로울 정도로 완벽했다. 대영주들이 디비티에에게 집착하다 못해 새장에 가두고, 먹기까지 하다가 미쳐버린 이유가 너무나도 명확했다.

카시어스는 다시 린델의 뺨을 매만지려다가 손을 거두었다. 자신을 향해 모로 누워 잠든 린델의 옆얼굴은 불빛 속에 희게 빛났다. 선이 고운 얼굴은 아름다웠다.

린델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그의 존재 그 자체였지만 그에게 매력이 없었더라면 안고 싶은 마음 자체가 들지 않았을 것이다. 솔직함과 신중함, 끈기, 노력, 순종적임, 호승심. 린델을 구성하는 많은 단어들은 어디 한 군데 미운 구석이 없었다.

제 감정에 솔직해진 린델은 침대 위에서 용맹했다. 제 욕심을 서슴없이 드러내며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했다. 욕조 안에서 카시어스의 등에 달라붙어서는 기어코 잇자국을 남겼다. 너무 해보고 싶었단다.

순진하고도 야하게 웃고 있는 녀석을 보고 있자면 속이 다 간지러워졌다. 그러면서 동시에 울리고 싶어졌다.

질 나쁜 충동이었다. 이유 없이 얼굴이 보고 싶고, 작은 행동 하나에 마음이 흔들리고, 별것 아닌 일인데도 들떴다. 이 감정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그 색깔이 탁하다. 가벼운 연애에 집착이 섞여들더니 가눌 곳 없는 애욕과 소유욕의 가운데에서 감정이 소용돌이 쳤다.

카시어스는 낯선 감정에 어떤 정의를 내리는 대신에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소중한 것이 생겼다.

그러나 불행히도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사람은 까다로운 법이었다. 아끼고, 보살피고, 돌봐도 여름철의 장미가 시드는 것처럼 한순간에 관계가 틀어질 수 있었다. 특히 몸을 섞고 감정적으로 얽히게 되면 더욱 그랬다.

카시어스는 낙관주의자가 아니었다. 지금과 같은 달콤하기 짝이 없는 관계가 영원히 지속될 거라고 확신하지 않았다.

최악을 가정한다면 서로를 미워하고, 경멸하다 못해 죽이려고 할 수도 있다. 변치 않는 사랑을 맹세한 연인들이 파국을 맞이할 때처럼 말이다. 물론 파국이 닥친다고 해서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팔과 다리에 족쇄를 채우고, 가면을 씌우고, 그의 육신을 탐할 수도 있었다. 그것을 실천으로 옮길지는 별개의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린델은 고지식했다. 평균 이상으로 선량했고 심기가 곧았다. 충성을 맹세한 그의 신뢰를 배신하지 않는 한, 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자신의 곁을 지킬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가 확실히 자신의 것이라고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아무래도 디비티에를 노예로 삼은 대영주들이 이해될 것 같았다.

재능을 꽃피우고 스스로 날 수 있는 새가 되는 것을 지켜보고 싶었지만, 반대로 그 날개를 꺾어 자신의 품에만 가둬버리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역시나 황금 새장인가.”

린델을 한참 내려다보던 카시어스는 커다랗고 화려한 황금 새장을 떠올리며 레몬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많이 길어진 머리카락이 사락거리며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우응.”

작은 접촉에 린델이 잠시 잠투정을 하는 듯 뒤척거렸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숨결이 흘러나왔다.

사랑스러운 순간이었다.

정말 속이 다 간질거렸다. 자신에게 이런 보드라운 감정이 솟아날 거라고 누가 생각을 했을까 싶었다.

웃으며 자리에 누운 카시어스는 린델을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빗줄기가 유리창을 두드렸다.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비였다.

제라르는 빗소리를 들으며 시종장을 뒤따라 복도를 걸었다. 제국의 재상인 시아크 공작의 셋째 아들로 나고 자란 제라르는 황궁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신분이었다. 군에 투신해 내전에서 공을 쌓았고, 곧 근위 기사단에 입단할 예정인 그는 전형적인 궁정 귀족이었다. 그래서 제라르는 자신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황제의 집무실과 회의실, 알현장, 그리고 사실인 튤립의 방을 모두 지나쳤다. 정궁의 동쪽 끝에는 황제의 개인 서재가 있었다.

녹음의 방이라고 불리는 황제의 개인 서재는, 귀족 사내의 서재가 으레 그렇듯이 오롯이 황제만을 위한 장소였다. 개인 응접실처럼 활용하는 튤립의 방보다 훨씬 더 사적인 공간이었다.

재상인 아버지를 두었지만 제라르 본인은 권력의 핵심과 가깝지 않았고, 황제와 독대를 한 적도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황제의 개인 서재에 그가 불려가게 된 것은 꽤나 파격적인 초대였다.

제라르는 황제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어제 오후에 황제의 피후견이자 비공식 애인과 춤을 추던 것을 들켰다. 황제는 우아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자신을 쫓아냈었다. 그러니 이번 부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그래도 황제의 견제가 두렵기보다는 흥겨웠다. 그 정도에 따라 멀리 쫓겨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연적으로 인정받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제라르는 서재로 들어섰다.

안내를 맡은 시종장은 금방 나가버렸다. 제라르는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카시어스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정중히 절을 올렸다.

“신의 축복을 받은 위대한 불꽃의 지배자이시며, 열하나의 강과 일곱 산맥의 군주이시며, 법과 정의의 수호자이신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빛나는 영광이 무궁하기를.”

“제라르 경. 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나?”

“물론입니다. 제국을 위해, 황제 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황제는 일어서라고 말하는 대신에 뜻밖의 질문을 했다. 질책이나 꾸지람을 예상했던 제라르는 살짝 당황했지만 제국의 귀족으로 충성과 목숨을 바치겠노라 대답했다.

“충성 맹세는 고귀한 것이지. 일어나서 거기 앉아라.”

제라르는 황제의 말에 따라 가까운 의자에 앉았다. 고아하게 꾸며진 서재를 배경으로 카시어스가 가볍게 웃고 있었다.

카시어스의 미모는 화려하기 짝이 없는 궁정에서도 견줄 자가 없을 만큼 독보적이었다. 미소를 짓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빼앗기기 충분했다. 그의 정적들조차 악마의 것이라고 비아냥거릴 만큼 말이다. 그래도 제라르는 방심하지 않았다.

남부 내전에서 제라르는 황제를 두 번 보았다. 일선에서 직접 칼을 휘두르던 그는 적들을 차분히 살육했다. 반역자들에게는 결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아름다운 외모 아래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철혈의 황제라고 불리는 지배자가 들어앉아 있었다.

제라르는 가만히 황제의 말을 기다렸다.

“짐의 피후견인인 아셰리드엘은 지명수배범이다. 본명은 린델 시어드. 죄명은 살인. 돌로 귀족 영애의 머리를 내려쳤지. 사면을 내리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짓지도 않은 죄를 사면하는 것은 그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라 그럴 수가 없어.”

“?!”

카시어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제라르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본명이 린델 시어드라고? 지명수배범? 살인?

황제가 총애하는 피후견인의 배경은 아주 단순했다. 내전으로 가족을 모두 잃은 평민 출신의 사제 지망생이라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지명수배범이란다. 짓지도 않은 죄라고 했으니 누명을 쓴 것일 터였다.

문제는 그걸 자신에게 알려준 이유였다. 순간 자신이 덫에 걸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제라르는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저를 어디에 쓰실 것이옵니까? 폐하.”

“눈치는 제법이군.”

“황송하옵니다.”

“경은 뒤센트 자작을 알고 있는가?”

“예. 알고 있습니다.”

역시나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었지만 제라르는 알고 있노라 대답했다. 뒤센트 자작은 황제의 개인 재정관이었다.

“그가 안티 카발리에의 수장이다. 언질을 해두었으니 약속을 잡아 그를 만나라. 빠를수록 좋다.”

제라르는 눈을 크게 뜨고 카시어스를 바라봐야 했다. 황제 직속의 방첩 조직이라고 알려진 안티 카발리에는 그 존재가 비밀이었다. 다들 그런 게 있다고만 알고 있을 뿐, 누가 조직원인지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안티 카발리에가 황제의 가장 은밀하고도 날카로운 칼이라는 점이었다.

그런 안티 카발리에의 수장을 만나라고 한 것은 안티 카발리에가 되라는 명령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근위 기사단에 입단을 앞두고 있었다.

“저는 곧 근위 기사단에 입단하옵니다, 폐하.”

“근위 기사 중에 안티 카발리에가 없을까 봐.”

“?!!”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생각해 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지만 제라르는 자꾸 말려드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곧 린델이 제 신분을 되찾을 것이다. 이슈라드의 무대가 열릴 계획이지. 가까운 친구가 비밀을 공유한다면 마음이 편해지겠지. 그를 도와라, 제라르.”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트윈문 파티에서 린델의 에스코트를 일임하겠다.”

“폐하.”

카시어스는 표정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제라르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여전했다. 그러나 당장에 내치기보다는 한 번의 기회는 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저런 녀석을 질투해서 속 좁게 굴고 싶진 않았다.

“린델의 옆을 떠나지 마라. 데뷔탄트는 좋은 먹잇감이니까. 그대가 얼마나 쓸모 있는 재목인지 증명해야 할 것이다. 황제의 총신이 되려면 말이야.”

경험이 없는 데뷔탄트는 여러모로 휘둘리기가 쉬웠다. 믿을 만한 샤프롱이나 가디언이 붙어야 했다. 제라르는 자신이 가디언으로 지목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건 충분히 기꺼워할 일이었다.

그러나 은유가 판치는 궁정어를 생각한다면 카시어스의 명령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었다. 황제의 총신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의미이거나, 혹은 총신으로 황제의 애인을 넘보지 말라는 경고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제라르는 카시어스의 얼굴에서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아름다운 얼굴에 가볍게 미소를 그려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제야 제라르는 저 미소의 진의를 알아차렸다. 힘의 우위는 명확했다.

“기대에 부응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만족스러운 답을 들은 듯 카시어스가 물러나라고 손짓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인사한 제라르는 그대로 서재를 빠져 나왔다.

서재의 문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시종장이 대기하고 있었다. 제라르는 덤덤한 얼굴로 시종장을 향해 걸어가면서 속으로 혀를 찼다.

견제도 꾸지람도 없었다. 먼 곳으로 쫓겨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권력의 중추에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린델의 비밀을 공유받았다. 그러나 그건 네 자리를 지키라는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뺨을 세차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제라르는 잠시 입매를 당겼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출발점이 다르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끝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옆을 떠나지 말라고 했으니 기회는 얼마든지 생길 수 있었다. 그것이 한없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도 말이다.

제라르는 승산 없는 싸움을 하려는 스스로를 말리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