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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61/137)

-61화-

린델은 비가 흘러내리는 커다란 유리창을 배경으로 앉은 잉그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슈라드의 무대가 될 거예요.”

린델은 잉그란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멀리서 캐롤라인의 얼굴을 보았고, 그녀 스스로가 죄를 자백할 수 있게 할 거라고 알렸다.

잉그란은 그러지 말라고 하는 대신에 진지하게 걱정해 주었다.

“그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가능하겠느냐?”

“제가 직접 하는 건 아니에요. 카시어스 경께, 그러니까 폐하께 유능한 부하가 있어요. 그분이 무대를 준비할 거예요.”

“네가 명령을 내리는구나.”

“아주 출세했죠.”

린델은 자랑처럼 말했다.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린다는 것은 그만큼 권한을 가졌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책임이 뒤따랐다. 자신이 배워야 할 게 바로 가진 만큼 책임의 무게를 느끼는 것이었다.

“폐하께서 널 크게 쓰실 모양이야.”

“제 몫을 해내야 하니까요. 이래 보여도 제가 황제 폐하의 배행 마법사잖아요. 안 그래도 시아무크 제국과 전쟁이 일어나면 폐하를 따라 저도 참전할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폐하를 따라다니면 위험한 일은 없을 테니까요.”

“네가 참전할 거라고?”

린델이 전쟁에 참전할 거라는 이야기에 잉그란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참전까지는 아니고요. 폐하를 따라다니면서 후방에서 수호 마법을 쓸 거예요.”

“폐하께서 직접 기사단을 이끌고 전장에 나서신다는 이야기도 못 들었느냐? 후방이 아니라 최전선이야.”

“그래도 괜찮을 거예요. 폐하께서 계시니까요.”

최전선에 나선다고 해도 괜찮다고 하는 린델 때문에 잉그란은 기가 막혔다. 폐하가 계시니 괜찮단다. 사랑에 빠진 청년이 그러하듯 애인이 옆에 있으면 세상 무서운 게 없다고 굴고 있었다.

제국은 덩치가 컸고 적도 많았다. 동쪽은 바다와 접해 있고, 남쪽은 속국과 우방국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었다. 반면에 서쪽의 시아무크 제국과 북쪽의 다섯 왕국은 제국과 적대적이었다. 특히 시아무크 제국과는 국경에서 크고 작은 다툼이 있었다. 젊은 시절, 사제가 되기 전에 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잉그란은 최전선의 비참함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잘 알았다. 그래서 린델이 전쟁을 경험하지 않기를 바랐지만 황제께서 그를 마법사로 쓰신다면 의무를 따라야 했다.

잉그란은 전쟁의 위험을 피력하는 대신에, 사랑의 위대함을 찬양하기로 했다.

“사랑에 빠지더니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어진 모양이구나.”

“사랑이요?”

“왜? 사랑에 빠진 게 아니야? 황제 폐하께서 애인이라며?”

린델의 반응이 떨떠름해서 잉그란은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린델이 애매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게…… 사랑인지는 모르겠어요.”

“응?”

“심장은 여전히 제 것이고, 봄바람이나 폭풍우 같은 건 불어오지 않는걸요. 달콤한 것 같기는 하지만 좋아하는 거랑 뭐가 다른 건가 싶기도 해요.”

린델의 진지하기 짝이 없는 설명에 잉그란은 웃었다. 언젠가 자신이 린델에게 했던 말을 하나하나 예로 들면서 사랑인지는 모르겠다고 하는 모습이 아직 어설펐다. 저리 들뜬 얼굴을 하고도 말이다.

“좋아한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사실 저는 사제님을 제일 좋아해요.”

“이런. 나를 폐하의 연적으로 만들 셈이냐? 존경한다고 하면 충분하단다.”

“경모한다고 할게요.”

“그래. 나도 사랑한단다.”

주름진 잉그란의 얼굴이 활짝 미소 짓는 것을 보며 린델도 따라 웃었다. 굳이 따지자면 카시어스보다는 잉그란이 더 소중한 사람이었다. 카시어스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지만, 잉그란을 위해서라면 더한 것도 감내할 수 있었다. 누명을 벗고 싶은 것도 자신뿐만이 아니라 잉그란의 명예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근본도 없는 고아를 거두어 살인자로 길렀다는 소리를 듣게 할 수 없었다. 그것만큼은 죽는 것보다 더 싫었다.

“이슈라드의 무대에 관해서, 사제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무엇이냐.”

“그 자리에 사제님께서 계셔주셨으면 해요. 델라우드 백작님과 알렉스 도련님도 초청할 건데, 잘 말씀드려 주세요. 장소는 어디가 될지 모르겠지만, 아마 로벅이 아닐 거예요. 이슈라드의 무대를 완성하려면 남작 영애를 아는 사람이 가능한 많은 게 좋을 거라 생각해요. 부탁드려요, 사제님.”

“어려울 거야 없다.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거라.”

잉그란이 흔쾌히 도와주겠노라고 하는 바람에 린델은 기뻤다. 언제나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든든했다.

그렇게 린델은 잉그란과 얼마 더 이야기를 나눈 후 황궁으로 향했다. 6시까지 입궁을 하라는 카시어스의 호출이 있었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황궁에 도착하자 린델이 안내받은 곳은 황제의 서재였다. 그곳에서 카시어스가 웃으면서 반겨주었다. 그는 차를 마시자고도 하지 않고 갈 곳이 있다고 이끌었다.

황궁까지 불러 가야 할 곳이 있다고 한 적은 처음이라서 린델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급한 일이라도 있으세요?”

“급하지는 않아.”

그러면서 카시어스가 안내한 곳은 대연회장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2일 전처럼 악사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도 그때처럼 단출하지 않고, 무도회를 준비하는 것처럼 완벽한 악단이 대기 중이었다. 린델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아챘다.

“또 춤을 추시게요?”

“연습을 해야지. 완벽하게 해내려면 말이야.”

“저택에서 할 수 있어요.”

“안타깝게도 오늘 밤에는 찾아갈 수가 없어. 그러니 시간은 지금뿐이야. 짐이 친히 연습 상대가 되어주겠다. 어서.”

카시어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춤을 청하며 손을 내밀었다. 2일 전과 달리 창밖은 회색 구름이 가득했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대연회장 안은 샹들리에 불빛 덕분에 눈이 부셨다. 모든 게 반짝거리는 한가운데 카시어스가 있었다.

복도에 모여 안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눈빛이 부담스러운 것은 여전했다. 그러나 카시어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들뜨고 만다. 어떤 부탁이든 들어주고 싶었다. 달콤하고 시큼한 것을 잔뜩 삼킨 기분이었다.

봄바람도 폭풍도 없었다. 심장은 자신의 것이었고, 천국을 엿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그가 좋을 뿐이었다.

린델은 웃으며 카시어스의 손을 잡았다.

   07.

빅토리아가 두꺼운 대법전을 활짝 펼친 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제국의 시작부터 함께한 대법전은 흉기가 되고도 남을 정도의 두께를 자랑했다. 그중에 빅토리아가 카시어스 앞에 펼쳐 보인 페이지는 후대에 추가된 항목을 따로 편집한 부분이었다.

“읽어보세요.”

빽빽하게 인쇄된 페이지 한쪽을 우아한 손이 가리켰다가 떨어졌다. 카시어스는 그 부분을 빠르게 눈으로 읽어 내려가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자신이 읽은 게 맞나 확인하기 위해서 두 번을 더 읽어야 했다.

어려운 법률 용어로 가득한 법 조항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상대의 유책 사유 없는 파혼을 하고 난 후, 7년이 지나도록 쌍방이 미혼일 경우 약혼 관계가 회복되며, 1년 후에는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한 번 더 읽어보았지만 내용은 처음 그대로였다.

할엔라드 제국의 대법전은 가정 의례법이라고 불릴 정도로 관련 법 조항이 많았다. 상속 분쟁을 최소화하기 위한 국가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그래도 파혼과 관련하여 이런 조항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법전에 따르면 지금 자신은 테누안의 리세나 공주와 약혼 상태였다. 이제 합의 파혼을 할 수 없었다. 어느 한쪽이 죽거나 다른 짝을 찾지 않는 한, 내년 봄에는 결혼을 해야 했다.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카시어스는 빅토리아가 집무 회의 직전에 대법전을 들고 나타난 이유를 그제야 이해했다. 그만큼 마음이 급했던 것이다.

“테누안이 자신만만하겠군.”

카시어스는 간단하게 감상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빅토리아가 고운 미간을 찡그렸다.

“그네들도 인지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래?”

“고지식한 법학자들도 모르는 내용인걸요. 알아본 바로는 이번 여름에 빈번히 회의가 있었대요. 곧 소문이 퍼질 겁니다. 샤올렌 백작 부인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거든요.”

“샤올렌 백작 부인이? 어떻게?”

뜻밖의 이름에 카시어스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샤올렌 백작 부인은 궁정 사교계에서도 입이 가볍기로 유명한 귀부인이었다. 그녀가 알게 되었다면 소문이 이미 퍼졌을 터였다.

“고지식한 법학자가 그녀의 정부라서요. 어젯밤에 대법전의 내용을 적어 놓은 종이를 들켰답니다. 우연이라고 하더군요.”

우연이 아니었다. 고지식한 법학자가 샤올렌 백작 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일부러 내보인 것이다. 빅토리아는 법학자의 목을 조르고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이런. 운이 나쁘군.”

“내일이 트윈문 파티이니 딱 좋을 때죠. 시끄러워질 거예요.”

시끄러워질 거라고 말한 빅토리아는 싱긋 웃었지만 사실은 속이 쓰렸다. 테누안의 하례품 목록 중에 별이 있는 것이 수상해서 뒤를 캐기 시작한 것이 겨우 보름 전이었다. 처음에는 별처럼 아름다운 공주로 미인계를 펼치려나 싶었다. 하지만 실상은 좀 더 심각한 것이었다.

7년 전에 파혼 당시, 황제도, 테누안의 국왕도, 그리고 법무청 장관도 대법전에 파혼과 관련된 그 거지 같은 조항이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뼈아팠다.

“테누안이 공주의 몸값으로 얼마를 부를 것 같으냐?”

“저라면 팔지 않을 거예요.”

“그래?”

“당연하죠. 할엔라드의 황후라고요. 그녀의 무게만큼 황금을 준다 해도 수지가 맞는 거래가 아니에요.”

제국의 통치 근간이 되는 대법전은 절대적이고도 신성했다. 또한 법을 수호하는 황제는 누구보다 대법전을 따라야 했다. 정식으로 결혼을 하면 테누안의 공주는 할엔라드의 황후가 된다.

올해로 스물한 살인 리세나 공주는 한창 때였다. 대법전에는 황제의 결혼식 첫날밤에 대한 법 조항도 있었다. 적어도 5명의 증인 앞에서 육체적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아무리 황제가 그녀를 멀리한다고 해도 첫날밤만큼은 방기할 수 없었다. 황후가 된 그녀가 후계자를 낳으면 제국을 집어삼킬 수 있었다. 그건 엄청난 기회였다.

카시어스는 빅토리아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는 어린 후계자의 근심을 웃어넘기지 않았다.

“7년 전, 테누안의 국왕이 얼마를 받고 파혼을 받아들였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얼마입니까?”

“제 나라 값이다.”

“?”

“좀 거친 표현을 쓰자면, 파혼을 하지 않으면 테누안을 박살내겠노라 했거든. 물리적으로는 물론이고 경제적으로 충분히 그럴 수 있으니까.”

카시어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는 빅토리아를 보며 정말 그렇게 했노라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제국의 속국인 테누안은 경제적으로 반쯤 종속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사치품도 그렇지만 테누안에서 소비되는 절반 이상의 밀을 제국에서 수입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말려 죽이는 것은 손쉬웠다.

“하지만 나라 간의 거래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법이지. 그래서 테누안에게 운하 통행권을 주었어. 루터 왕세자는 제 아비보다 비싸게 값을 받고 싶을 게다.”

“하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요.”

“빅토리아. 짐의 후계자는 너다. 짐이 그리 정했다. 그건 절대 변하지 않아.”

만면에 미소를 지은 카시어스의 확신은 마치 내일 동쪽에서 해가 뜬다를 말하는 것과 닮았다. 빅토리아는 조바심을 내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 입을 다물었다.

황제는 언제나 다음 황제는 너라고 말했다. 모두에게 황태녀라고 불리고 있었다. 하지만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는 황위를 물려받을 수 없었다. 대법전에는 여성 후계자의 경우 작위를 계승하려면 스무 살이 되어야 한다고 명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미래는 가변적이었다. 당장에 내일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제국의 다음 황관은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

빅토리아는 당당히 가슴을 펴고 선언했다.

“예. 저는 폐하의 하나뿐인 후계자입니다.”

“이번 건은 테누안의 사자가 도착하고 난 다음에야 수습되겠지. 그때까지 나서지 마라. 네가 무슨 말을 하든 사람들은 위선으로 읽을 테니까.”

“명심하겠어요.”

카시어스의 지적은 정확했다. 빅토리아가 조바심을 낼수록 물어뜯기기 쉬웠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한 빅토리아는 절을 하고는 물러났다. 그녀가 집무실의 문을 닫고 나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카시어스는 대법전을 내려다보다가 입술 끝을 끌어 올렸다. 지금 자신이 약혼 중이라는 것을 린델이 알면 어떻게 반응할까 궁금해졌다.

그런 법도 있냐고 웃을까. 아니면 질투를 할까.

카시어스는 질투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시종을 불렀다. 오늘 밤에는 만찬과 황태후가 주최한 오페라 공연이 있었다. 린델을 찾아갈 시간이 없었던 카시어스는 그를 불러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세상일은 예상과 달리 흘러가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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