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필로나 남작은 파산 직전입니다.”
린델은 필로나 남작 일가의 근황이 궁금했고, 뒤센트 자작에게 이슈라드의 무대를 부탁하면서 그들에 대해 물었다.
뒤센트 자작의 설명은 간단명료했다.
에드리아나를 죽인 범인은 린델이라고 알려졌지만 로벅의 여론은 필로나 남작 일가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필로나 남작은 먼 친척의 초대에 냉큼 닐르로 거처를 옮겼다.
화려한 수도 사교계의 생활은 필로나 남작 일가의 사치를 부추겼다. 남작 부인은 새로운 보석과 유행하는 드레스를 사들이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먼 친척의 권유로 도박에 빠진 남작은 많은 빚을 지다 못해 파산 직전의 상황이었다. 그의 양모 유통업은 건실했지만, 채권자들이 한꺼번에 달려들면 망하는 것은 순식간이라는 것이 뒤센트 자작의 설명이었다.
그리고 필로나 남작 영애인 캐롤라인은 연애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난 7월에 워든과 약혼을 했다. 워든이 캐롤라인의 증인이 되어준 대가였다. 그러나 캐롤라인은 언제나처럼 워든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화려한 수도 사교계를 즐겼다.
캐롤라인은 남작의 하나뿐인 자식으로 가문과 재산을 물려받게 되어 있었다. 필로나 남작가는 지방의 그러저러한 귀족 가문이었고 캐롤라인의 나이도 적지는 않았지만, 작위를 물려받지 못하는 귀족의 차자 이하의 남자들에게 캐롤라인의 배경은 매력적이었다. 덕분에 그녀는 수도 사교계에서 꽤나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마지막으로 워든은 제멋대로 구는 캐롤라인 때문에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는 캐롤라인밖에 몰랐고, 한결같이 그녀의 편에 서서 기다렸다. 약혼을 했으니 곧 결혼을 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캐롤라인은 새로운 신랑감을 물색하고 있는 중이었다. 꽤나 속이 상한 워든 곁에 정부를 하나 붙여놓았다는 것으로 뒤센트 자작은 설명을 끝마쳤다.
“기본 준비는 끝난 상황입니다.”
린델은 뒤센트 자작의 말을 이해했다. 커다란 그림의 밑바탕을 모두 그려놓았다. 이제 이슈라드의 무대를 위해 덧칠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장소랑 시간은 미리 알려주세요. 초대할 사람이 있거든요.”
“누구를 초대하실 생각이십니까?”
“필로나 남작 영애를 아는 사람들이요. 델라우드 백작님과 그분의 일가를 초대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아,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에 더해 안호크의 영주와 순회재판관은 이쪽에서 동석하게 만들겠습니다. 다른 분들이 더 생각나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종이에 필요한 것을 적는 뒤센트 자작을 보며 린델은 웃었다. 카시어스에게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마법사 같은 부하들이 많이 있었다. 몇 가지 더 주의사항을 알려준 뒤센트 자작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부르라는 인사를 남기고 돌아갔다.
그가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궁에서 시종이 찾아왔다. 황제의 근위시종이 아니었다. 황태후궁의 시종이 초대장을 들고 나타났다. 황금색과 녹색이 섞인 고급스러운 봉투에 독수리와 네잎 클로버가 함께 하는 인장은 황태후의 것이 맞았다.
린델은 지체 없이 내용을 읽었다. 티파티 초대장이었다. 일시는 오늘, 그것도 바로 한 시간 후였다.
“태후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황태후의 시종이 웃는 얼굴로 재촉했다. 린델은 당장에 일어나지 못했다. 보통 귀부인의 초대라면 며칠 전부터 약속을 잡기 마련이었다. 이런 식으로 부르는 것은 초청을 가장한 일방적인 부름이었다.
린델이 황태후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카시어스를 따라 참석한 황태후의 가든파티에서 그대가 황제 폐하의 피후견인이냐는 질문을 받았었다. 그 후 몇몇 연회에서 황태후를 대면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가벼운 인사조차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번 부름은 너무 의미심장했다. 문제는 린델에게는 황태후의 초대를 거절할 명분이 없다는 것이었다. 시종까지 보낸 상황에서 아프다거나 선약이 있다거나 하는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황태후가 황제의 정치적 파트너라는 점이었다.
린델은 옆에 선 애쉰 부인을 보았다.
“황제 폐하께 태후마마의 초대를 받아 입궁을 하게 되었다고 전해주세요.”
린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를 취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태후의 티파티는 그녀가 아끼는 장미 정원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정자에서 열렸다. 가을이 가까워지는 계절이었다. 나무마다 탐스러운 가을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향긋한 장미향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정원의 티파티에 초대받은 손님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 단 한 명의 손님이 된 린델은 맞은편에 앉은 황태후에게 예의 바르게 절을 했다.
“아셰리드엘 페르난이 황태후 전하를 뵙습니다.”
“일어나게나. 잘 지냈는가? 이렇게 갑자기 불러서 놀랐겠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린델은 반듯이 서서 황태후를 바라보았다. 예순 살이 넘은 그녀는 어딘가 소녀스러운 느낌이 있는 할머니였다. 그러나 외모에 속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곳의 원칙이었다.
8년 전, 지독한 내전 중에도 황궁을 떠나지 않고 어린 빅토리아 황태녀를 지키고, 지금의 황제에게 가장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 것이 황태후였다. 황후가 없는 현 시점에서 실질적인 황궁의 안주인이기도 한 그녀는 누구나 인정하는 권력자였다.
린델은 황태후와 접점이 없었다.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하기는 어려웠지만, 이렇게 다급히 부를 만큼 중요한 일이 있는 것은 확실했다.
“급한 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급한 일이 있지. 그 전에 잠시 사담을 할 테니 자리에 앉게나.”
린델은 황태후가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옆에 선 시녀가 린델의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하얀 찻잔에 진한 황금색 차가 가득 담겼다.
“장미향이 짙어 맛이 깊은 것을 골랐네. 마음에 들면 좋겠군.”
“감사합니다.”
린델은 찻잔 끝에 겨우 입술만 대었다가 내려놓았다. 차는 단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그러자 황태후가 웃었다.
“잘 배웠군. 신뢰하는 이가 주는 거라도 함부로 입에 넣는 게 아니지.”
“송구합니다.”
“괜찮네. 칭찬을 한 것이니까. 마차 강도를 당했다고 들었네. 크게 다쳤다는데 놀랐겠어. 어떻게 알았냐고? 다 방법이 있지. 내게는 아주 고귀하고도 뛰어난 정보원이 있거든.”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은 권력자들의 특기였다. 린델은 놀라지 않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황태후의 고귀하고도 뛰어난 정보원이란 빅토리아 황태녀일 것이다. 그녀라면 습격 사실을 알고도 남았다.
“신경 써주셔서 황공하옵니다, 전하.”
“배후가 누구인지 알고 있겠지?”
“예. 알고 있습니다.”
“그가 좀 많이 멍청하지. 실력은 안 되는 주제에 욕심만 많아서는, 감히 황제께 반기를 들었으니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걸세. 그것도 알고 있나?”
“그는 자신이 휘두른 칼을 돌려받는 겁니다.”
린델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황태후가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정치란 적과 아군이 구별되지 않았다. 그녀가 아무리 카시어스의 정치적 파트너라고 하더라도 조심할 건 조심해야 했다.
“좋은 표정이군. 황제의 총희로 곁에 있으려면 목숨이 하나로는 부족하지. 그나마 연적이 없어서 이만한 거네. 선제께서도 총희와 후궁이 잔뜩 있었지.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그네들의 투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몰라.”
화사하게 웃는 황태후를 보며 린델은 아무 말도 못했다. 린델이 여인들의 투기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성서와 이야기책 속의 내용뿐이었다. 차와 간식에 독을 타고, 모함을 하고, 말의 발굽에 못을 박았다. 황제의 애인인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연적이 없는 것이 다행일 수도 있었다.
“처음에는 폐하께서 그대를 아끼시는 이유가 궁금했지. 현명함, 선량함, 정직함, 신중함. 다 좋지만 이곳에서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니까. 무엄한 발언이지만 폐하께서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불신하고, 그래서 사람에게 휘둘리지도 않네. 하지만 그대만큼은 예외지. 당신께서 진짜 사랑에 빠진 게 아닌가 의심을 했다네. 정말 그런가?”
“제가 답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긴, 상관없는 일이지. 그대가 무해하다면 말이야.”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고 말하는 황태후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린델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은 무척이나 직접적인데, 의도가 짐작되지 않았다.
“황제를 위해 어디까지 감내할 수 있나요?”
“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린델은 지체 없이 대답했다. 목숨을 바치겠노라 맹세했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목숨보다 더한 게 필요하네.”
“무엇인지 말씀하십시오.”
“폐하께 약혼녀가 있었다는 건 알고 있는가?”
“예. 알고 있습니다.”
또다시 화제 전환에 린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때 약혼한 카시어스는 황제가 된 후에 파혼을 했다. 상대는 테누안의 공주였다.
“그럼 이번의 사건은?”
“모릅니다.”
“소식이 늦군.”
황태후가 가볍게 혀를 차며 다음 말을 이었다.
“당시 폐하께서 테누안의 공주와 파혼을 하기 위해 무엇을 거래했는지는 모르네. 하지만 섭섭지 않게 해줬을 거야.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 같던 테누안의 국왕이 냉큼 꼬리를 내렸거든. 하지만 그때 당시 폐하도, 테누안의 국왕도, 그리고 법무청 장관도, 그리고 나도 대법전에 파혼과 관련된 그 거지 같은 조항이 있을 거라는 걸 알지 못했어.”
“?!”
황태후의 입에서 욕설에 가까운 폭언이 튀어나왔다. 거지 같은 이랬다. 린델은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황태후와 같은 신분의 귀부인의 입에서 튀어나올 수 없는 단어였다.
“대법전에는 파혼 후 7년 동안 쌍방이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이라면, 다시 약혼 관계가 회복되고, 1년 후에는 결혼을 해야 한다고 되어 있네. 사문화된 법이나 마찬가지지만 대법전은 신성한 것이지. 그리고 법을 수호하시는 폐하께는 더더욱이. 간단히 요약하자면 폐하께서는 지금 약혼 중이시고, 내년 봄이 되면 테누안의 공주와 결혼하셔야 해. 그리고 테누안의 공주는 할엔라드 제국의 황후가 되겠지.”
“황후…….”
“그래, 황후. 아무리 황제께서 독신을 고수하시겠다고 하더라도 테누안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방법이 없지. 테누안이 양보할까? 글쎄. 누구도 장담하지 못해.”
황태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은 만큼이나 린델의 머리도 싸늘하게 식었다. 황제의 약혼 소식은 정치적 사건이었다. 후계자를 위해 독신을 고수하던 황제가 대법전에 의거해 결혼을 해야 한다고 알려지면 사교계는 물론이고 정치판이 발칵 뒤집어질 것이다. 제일 난감한 것은 빅토리아와 그녀의 보호자인 황태후일 것이다.
머리 한쪽으로 제국의 정치 지형을 떠올리던 린델은 다른 한쪽으로 싫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애인은 제국의 황제였고, 여러 가지 이유로 약혼이든 결혼이든 할 수도 있었다. 거기에 자신은 어떤 개입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싫다는 감정이 솟구치다 못해 속이 시렸다.
“어디까지가 사담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전하.”
어지러운 마음을 다잡은 린델은 본론을 말하라고 우아하게 돌려 깠다. 핵심을 말하지 않고 서두만 장황하니 본론이 무엇인지 걱정스러웠다.
“이미 내 의사는 전했는데, 아무래도 충분하지 못했나 보군.”
“?”
“내 친정 오라버니가 씨디프 공작이라는 것을 알고 있겠지. 오라버니께 말씀드려 그대를 양자로 입적할 수 있게 준비해 놓았네.”
“전하?”
린델은 황태후의 제안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양자 입적이라니.
황태후의 친정인 씨디프 공작 가문은 제국에서도 오랜 대제후 가문이었다. 양자로 입적되려면 보통 까다로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아직도 모르겠나. 테누안이 마지막까지 물러나지 않을 경우, 그대를 후궁으로 청할 생각이네. 그러려면 먼저 그럴듯한 신분을 마련해야지.”
“그게 무슨…….”
린델은 당황한 나머지 채 말을 끝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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