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137)

-64화-

후궁이란다.

그 단어 하나로 카시어스는 황태후의 의도를 파악했다. 태자비로, 황후로, 그리고 황태후로 40년을 넘게 황궁의 실력자로 살아온 그녀는 누구보다 이런 계략에 특화되어 있었다. 황태후의 행보는 일견 과격했지만, 그만큼 자신의 주목을 끌었고 명확하게 의지를 표명했다.

황제가 아끼는 애인을 이용해서라도 테누안의 공주를 견제하겠다는 일종의 경고였다. 린델이 후궁이 될 경우 황태후가 지지하겠다고 알린 것은 덤이었다.

꽤나 매력적인 제안이기는 했다. 황금 새장을 만들 필요도 없이 내 것이라고 천명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리 되면 린델의 손발을 묶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후궁이 괜히 살아 있는 꽃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황궁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요, 다닐 수 있는 곳도, 만날 수 있는 사람도, 그리고 입고 먹는 것까지 극히 제한된다. 그건 린델에게 결코 어울리지 않았다.

“어찌 답했느냐?”

“그러지 않겠노라 했습니다.”

“잘했다. 나는 너를 후궁으로 삼을 생각이 없다. 네 쓸모는 따로 있어.”

카시어스는 미련을 떨쳐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린델도 고개를 끄덕였다.

“태후께서는 나의 가장 적극적인 지지자이자, 감시인이지. 그녀 때문에라도 얼른 황제를 때려치워야 해.”

“폐하.”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할까. 내가 대법전에 그 빌어먹을 조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오늘 오전이었어. 빅토리아가 알아낸 것이니, 태후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금방이었겠지. 그래도 태후께서 이렇게나 과감히 행동을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죠.”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몰랐다. 린델은 카시어스를 탓하지 않았다.

“제국은 거대하고 내가 아무리 날고뛰어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해. 귀족과 관리를 어르고 달래고, 찍어 눌러야 해. 그런 의미에서 태후는 꽤나 다루기 쉬운 상대야. 빅토리아를 위한 징검다리이자 보호자 역할을 제대로 하면 되니까. 서부 귀족이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도 황태후 덕분이지. 그럼에도 이 타이밍에 태후께서 널 부른 것은 약혼을 얼른 정리하라는 경고야. 그러지 않는다면 너를 장기 말로 쓰겠다는 뜻이니까. 후궁이나 양자 입적은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려.”

카시어스의 설명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린델은 정치를 배우고 있었지만 그래 봤자 이제 겨우 초보자에서 벗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사람과 귀족 가문의 이름을 외우고, 그들의 이해관계와 제국의 정치 구도를 파악하고 있었다.

황제와 황태후의 관계에 대해서는 린델도 들은 게 많았다. 황제는 빠른 은퇴를 위해, 그리고 황태후는 어린 손녀를 위해 손을 잡았다. 그들이 정치적 파트너라고 불리는 것도 이해가 합치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시어스는 황태후가 완벽한 아군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정치로군요.”

“모략이기도 하지. 그러니 테누안의 공주와 결혼할 일은 없어. 모두를 위해서 말이야.”

카시어스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웃었지만 린델은 그러지 못했다. 제국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의 주위에 깔린 복잡한 이해관계가 눈에 보이자 여러모로 복잡해졌다. 나만은 무조건 당신의 편이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해야 할 말은 따로 있었다.

“딱딱하게 굳었군. 걱정거리라도 있느냐?”

다정한 목소리에 린델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살던 곳에서 약혼이란……. 약혼이란 가문과 가족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래서 정혼이라고도 하죠. 약혼을 한 남녀는 동침을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결혼한 것과 같은 권리를 가졌어요.”

뜬금없는 설명에 카시어스는 린델의 고향이 북서부 끝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북부는 전통적으로 결혼 풍습이 엄격한 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린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지금 자신은 결혼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린델은 꽤나 심각해 보였고 그래서 카시어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폐하의 약혼 소식을 듣고 싫다고 생각했어요.”

린델은 과감하게 질러버렸다. 지금이 아니고서야 본심을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다. 긴장으로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생전 처음 느낀 질투의 맛은 시리고 썼다.

혀가 아닌 마음으로 느낀 맛을 차마 말하지 못하고 그저 싫다고 하는 게 전부였다. 멋없는 고백이었지만 카시어스가 웃어주었다.

“질투라도 한 거야?”

“예.”

“이런. 너무 기쁜데?”

질투한다고 긍정하는 린델 때문에 카시어스는 들뜨고 말았다. 린델은 적극적인 애인이었지만 소리 내어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저 눈빛으로 행동으로 그의 마음이 전해졌을 뿐이다.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전에 질투부터 한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그건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참으로 닮은 애인 사이였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제 욕심이라는 걸 알아요.”

“무엇을 말하려고 이리도 심각해?”

“저는, 저는 폐하를 다른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지 않아요.”

“?!!”

린델의 목소리는 가느다랗게 떨렸다. 하지만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다. 표정은 진지했지만 귀는 조금 빨갛게 변했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못할 장렬한 고백에 잠시 숨을 멈춘 카시어스는 진심으로 활짝 웃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말이야?”

“예. 알고 있어요.”

린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애인은 황제였다. 하나뿐인 후계자를 위해 결혼을 하지 않겠노라 천명한 그였지만, 원한다면 몇 명의 여인과 혹은 사내와 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 궁정 사교계에서는 그건 흠도 잘못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당연시되는 곳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당신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 않겠노라고 한 것은 온갖 의미가 담긴 고백이었다. 당신을 그만큼 좋아한다고, 독점하고 싶다고, 결혼하는 것이 싫다고, 나만을 바라봐 달라는 뜻이 담겨져 있었다.

“아니, 모를걸.”

카시어스는 미소를 지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린델에게 다가갔다. 의자에 앉아 있는 린델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하얗고 작은 얼굴에서 하늘색 눈동자에서 여러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기대, 설렘, 불안, 각오.

그러나 웃지를 않는다. 너무 긴장한 탓이다.

린델은 모를 것이다. 그의 고백은 일종의 최후통첩이었다.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에는 이별로 이어지는 수순이었다.

“내가 싫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야…….”

“헤어지려고?”

카시어스는 나직하게 속삭이면서 린델이 앉은 의자의 팔걸이를 손으로 짚으며 허리를 숙였다. 린델의 뺨에 입술을 대려고 하는데, 그가 고개를 돌려 피했다. 명백한 거절의 동작이었다.

“린델?”

“지금 폐하께는 정혼자가 있으세요. 당신을 공유하지 않겠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기도 해요.”

고개를 숙여 시선을 빗겼던 린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비장한 표정을 지은 녀석은 상체를 뒤로 물렸다. 카시어스는 혀를 찼다. 린델이 북부의 결혼 풍습을 미리 언급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애인이 아닌 정부는 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한순간일 뿐이라도 말이다.

“너무 고지식하잖아.”

“상식이에요.”

그건 황궁 밖에서나 통하는 상식이었다. 엄숙한 정숙의 시대 이후, 귀족에게 불륜과 간통이란 달콤한 디저트를 즐기는 것과 같은 평범한 일상이었다. 궁정식 연애가 그랬다. 결혼의 유무를 따지지 않고 가볍게 만났다 헤어지고, 다시 만났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걸 문제 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정절을 지키면 이상하다는 소리를 듣곤 했다.

은밀한 관계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가십거리는 되지만 수면 위로 올라오는 일은 드물었다. 자신처럼 요란하게 과시라도 하지 않는 이상에야 말이다. 신성한 결혼 서약도 막지 못하는 것을, 린델은 정혼자의 존재로 거부하고 있었다.

기가 막혔다. 짜증 나기도 했다. 얼굴도 보지 못한 약혼녀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당신을 독차지하겠다고 고백한 주제에 정부는 싫다며 물러난다.

마음은 주되, 몸은 주지 않겠다니.

세상에 밀당도 이런 밀당이 없었다. 의도한 게 아니라서 더 질이 나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백은 고백이었다. 이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린델이 원한다니 마음껏 휘둘려 줄 수 있다. 그러나 순순히 당할 생각도 없었다. 이건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카시어스는 린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린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폐하, 지금 뭘 하시는 거예요? 누가 보면 어떻게 하려고요. 얼른 일어나세요.”

린델은 카시어스의 어깨를 붙잡고 일으켜 세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카시어스는 일어나는 대신에 두 손으로 의자의 양쪽 팔걸이를 짚어 린델을 가두었다.

“고백보다 유혹을 먼저 했지. 네가 지독히 탐났거든. 이제야 말하지만 너를 좋아해. 사랑하고 있어.”

“?!!”

“그래. 이 마음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사랑이야. 붙잡혀 줄 테니까, 제대로 고백해.”

무릎을 꿇은 구애자의 서슴없는 강요에 린델은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자신을 바라보는 황금색 눈동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커다란 늑대를, 무서운 생물을 닮았다고 했지만 실은 그의 눈은 무척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모양 좋은 눈매에 긴 속눈썹과 때때로 그 농도를 달리하는 황금의 눈동자는, 조각처럼 깎아 놓은 얼굴과 화려한 색채의 머리카락과 함께 완벽한 조형미를 만들어냈다.

화려한 얼굴에 시선을 빼앗겼었다. 다정한 구애에 흔들렸다.

욕심은 거기까지여야 했다. 그러나 카시어스는 계속 부추겼다. 더 가질 수 있다고, 두 손 가득 흘러넘치도록 쥘 수 있다고 말이다. 끔찍한 유혹이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고백하고 싶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린델.”

“저는 그러지 않을 겁니다.”

린델은 카시어스를 보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를 좋아하고 있다. 자신은 이 마음에 무슨 이름을 붙여야 할지 확신을 할 수 없었지만, 그가 너무 좋아서 자신의 것이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지금은 고백할 수 없었다.

“다른 누군가와 공유하기 싫다며.”

“예.”

“그런데도 고백하지 않을 거라고?”

“예.”

추궁하는 듯한 카시어스의 질문에 린델은 그렇노라고 짧게 대답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지만 아닌 건 아닌 거였다.

카시어스가 인상을 썼다. 자신이 생각해도 기가 막힐 만했다. 어쩌면 그가 화를 낼지도 몰랐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름만 알고 있는 정혼자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가 막히는군. 이렇게 차이는 방법도 있다니.”

“언젠가 끝이 오겠지만.”

“이런, 고백도 하기 전에 마지막을 이야기해?”

“시작은 바르게 해야죠. 그게 옳아요.”

린델은 다시 한 번 제 뜻을 밝혔다. 카시어스의 눈동자 색이 짙어졌다. 노려보는 것은 아닌데, 눈빛이 서늘해졌다.

아마도 화가 난 것 같았다.

“헤어졌다고 하면, 다른 이들이 믿어줄까?”

“싸웠다고 하면 되죠.”

“대답은 잘해.”

입매를 당기며 투덜거린 카시어스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키스를 할 법한 각도였다. 뒤는 의자 등받이였고 앞은 카시어스가 막고 있었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낭패라고 생각하며 반뜩 굳어 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가 키스를 하지는 않았다. 대신 귓가에서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깝게 밀착했다.

“그딴 이유로는 헤어지지 않아.”

“폐하.”

“난 애인을 두고 금욕을 하는 성자가 아니야. 네 마음이 어떤지는 아니까, 날 거부해도 마음은 상하지 않을게. 그러나 손 놓고 있지도 않을 테니, 그리 알아.”

카시어스의 속삭임에 린델은 굳어버리고 말았다. 린델의 뺨에 입술이 아니라 뺨과 코가, 숨결이 닿으면서 미끄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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