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137)

-66화-

“그이가 그러고 싶다 합니까?”

“그럴 욕심이라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폐하의 마음이 그러셔도 탐욕스럽기보다는 무심한 게 낫지요. 양자 입적이야 어려운 일은 아니나, 무엇을 하시려고 하는지 궁금합니다.”

황태후의 말과 달리 대귀족의 양자가 되는 것은 꽤나 까다로운 일이었다. 작위와 유산 문제로 가문 내의 동의는 물론이요, 추기경과 다른 귀족들이 보증인이 되어줘야 하지만 황제가 나선다면 손쉬워진다.

다만, 그렇게 되면 카시어스가 황태후와 씨디프 가문에게 큰 빚이 생기는 것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려는지 궁금했다.

“법적으로 황제의 사람이 되려면 적당한 신분이 필요하니 말입니다. 씨디프 가문이면 적당하지 않겠습니까.”

카시어스가 특유의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황태후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법적으로 황제의 사람이 되기 위해 신분이 필요한 이는 그의 아내뿐이었다.

후궁, 혹은 황후.

하지만 배행 마법사는 후궁은 되지 않겠노라고 했다.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가던 황태후는 카시어스의 계산속에 입 끝을 올리며 웃었다.

“이런. 그이는 욕심이 없다면서요.”

“아시다시피 욕심이 넘치도록 많은 것은 저이지 않습니까. 무심하기 짝이 없는 그를 설득하려면 한 2년쯤 걸리겠지요.”

카시어스는 일부러 2년이라는 시간을 언급했다. 덕분에 황태후는 기어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자신은 후궁을 권했는데, 황제는 황후로 삼겠단다. 황제의 애인은 사내였고, 평민 출신이었다. 여러모로 조건이 불리하긴 했지만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제국의 역사를 뒤져보면 사내의 몸으로 황후가 된 이가 딱 한 명 존재했다. 전란의 시대에 어쩔 수 없는 편법이긴 했지만 전례는 전례였다. 또한 황후가 되려면 3대 전의 조상이 황궁을 출입할 수 있는 귀족이어야 한다는 법이 있지만, 그것조차 평민 출신으로 귀족의 양녀가 되어 황후의 자리까지 오른 이가 몇 명 있어서 유명무실했다. 그러니까 카시어스는 진심이었다.

황태후는 재빠르게 손익을 따졌다. 나쁘지 않는 거래였다. 황태후는 빅토리아가 무사히 황위를 계승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바라는 게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도 카시어스는 강력하고도 완전히 믿지 못할 동맹이었다.

8년 전, 카시어스는 최후의 최후까지 황제가 되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런 귀찮고 끔찍하게 피곤한 자리에는 앉기 싫다고 했다. 그러다가 결국 빅토리아가 성인이 되면 황위를 물려준다는 조건으로 황관을 썼다. 그는 지금껏 그 약속을 잘 지켰다.

하지만 그럼에도 황태후는 카시어스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살아서 양위를 하겠다는 그의 마음은 언제든지 바뀔 수도 있었다. 또한 그의 지지자들이 양위를 방해할 수도 있었다. 황제는 제멋대로이긴 했지만 꽤나 유능했고 군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아직 여물지 못한 황태녀보다 강하고 원숙한 황제가 자리를 지키길 원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황제가 사내를 황후로 맞이한다면 보수적인 지지 세력들이 순식간에 떨어져 나갈 것이다.

거기까지 계산하고 부탁을 한 거라면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었다. 황태후는 실리주의자였다. 그것만큼은 카시어스와 무척이나 닮았고 그래서 둘은 동맹이 될 수 있었다.

“폐하께서 욕심이 나신다니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그이에게 궁이 넘치도록 예물을 쌓아주겠노라고 했는데, 허언이 되지 않으려면 노력해야겠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황태후가 만면에 미소를 짓는 것을 보며 카시어스는 찻잔을 들어 올려 차를 머금었다.

소중한 것을 지키는 방법은 여럿이었다. 귀하게 아끼며 린델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해주게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린델은 시작도 하기 전에 끝을 이야기했다. 당신을 다른 누군가와 공유하지 않겠노라고 했으면서 다음을 꿈꾸지 않았다. 달콤한 연애도 좋았지만 카시어스는 그 이상의 것을 원했다.

그런 린델의 평생을 묶을 수 있는 합법적인 족쇄를 팔에 채울 작정이었다. 후궁이라는 단어로, 자신은 생각도 하지 못했던 가능성을 일깨워준 황태후에게 감사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족쇄의 무거움을 따지면 후궁보다는 황후가 맞았다.

카시어스는 린델에게 청혼하는 순간을 떠올렸다. 린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할 게 분명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 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카시어스의 특기였다. 거기다 몇 번이고 차이다 보니 저도 모르게 집요해졌다. 사람에게 집착해서야 좋은 꼴은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만 린델만큼은 놓아버릴 수가 없었다.

황금 새장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새장을 만들겠다고 마음먹은 카시어스는 미래를 꿈꿨다.

황제의 약혼 소식이 황궁을 휩쓴 것은 그날 늦은 밤의 일이었다.

사교계의 귀부인답게 정오가 훌쩍 넘어서야 일어난 샤올렌 백작 부인은, 정성껏 치장을 하고는 그날 열리는 가장 큰 파티에 참석했다. 샤올렌 백작 부인은, 그녀의 정부에게서 알아낸 엄청난 비밀을 터트리기 위해 완벽한 순간을 기다렸다. 파티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잔뜩 모여들고,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였다. 샤올렌 백작 부인은 오랜 친우들을 불러 모아 황제의 약혼 소식을 알리면서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아 허영을 채웠다.

그렇게 시작된 소문은 그날 열리는 모든 파티와, 연회, 살롱, 그리고 황태후가 주최한 오페라 공연에까지 퍼져 나갔다. 다들 바쁘게 부채를 흔들며 황제의 약혼 소식과 그에 따른 파장에 대해 새처럼 속삭이며 정보를 교환하기에 바빴다.

황제께서 결혼을 하긴 할까요? 결혼이 성사된다면 황태녀가 끈 떨어지는 신세가 되겠지. 테누안이 물러나야 할 겁니다. 리세나 공주가 절세미인이라고 들었어요.

온갖 이야기 속에 당연하게도 황제의 피후견인이자 비공식 연인의 이름도 언급되었다. 궁정 소식에 빠른 이들은 그가 황태후의 티타임에 불려간 것도, 그리고 그 직후에 황제와 독대한 것을 떠들었다. 또 누군가는 그가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가 황태후를 찾아가 차를 마셨다고 말했다.

뭔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게 뭔지 아는 사람 또한 없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속닥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여름 내내 요란스러웠던, 모두가 아는 황제의 비밀스러운 연애가 파탄이 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권력, 연애, 치정. 어느 것 하나 흥미롭지 않은 게 없었다.

내일 열리는 트윈문 파티에서 황제와 그의 피후견인의 춤이 예고되어 있었다. 지난 열흘 동안 황제는 대연회장에서 보란 듯이 피후견인과 춤 연습을 하면서 관심을 끌었다. 한 폭의 그림처럼 멋진 모습을 자랑하던 두 사람이 과연 내일 춤을 출지를 두고 내기까지 벌어졌다.

물론 린델이 그 사정을 알 리 없었다. 마지막까지 춤 연습을 하고 잠이 들었다가, 평소대로 일찍 일어나 일정을 소화하고는 또 연습을 했다.

늦은 오후가 되자 본격적으로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준비를 시작했다. 의욕적으로 팔을 걷어붙인 것은 당연히 애쉰 부인이었다.

드디어 데뷔탄트의 밤이 다가왔다. 애쉰 부인은 오늘을 위해 많은 정성을 쏟았다. 아무거나 다 괜찮다고 하는 린델을 의자에 앉히고는 제일 잘 어울리는 비단을 고르게 한 것도, 솜씨 좋은 황실 재단사가 들고 온 옷을 몇 번이고 깐깐하게 점검한 것도, 보석과 신발을 주문하고 확인한 것도 그녀였다.

할엔라드 제국의 사교계에서 파티를 빛내는 것은 꽃처럼 아름다운 여인의 몫이었다. 하지만 사내 역시 치장에 열을 올리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화려한 비단에 금실을 수놓은 최신 유행의 예복, 보석으로 만든 단추, 섬세한 레이스로 된 크라바트, 커다란 보석 브로치와 반지. 모두 사내의 재력과 취향을 과시하는 것들이었다. 린델의 경우 마법사를 상징하는 흰색 약식 망토를 걸쳐야 했기에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았다.

“다 됐습니다. 멋지세요.”

애쉰 부인은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확인하며 뿌듯하게 웃었다. 린델의 눈동자 색에 맞춘 푸른색 비단으로 만든 예복과 크라바트, 브로치와 구두. 어디에 내놓아도 훌륭한 물건들은 린델의 우아한 미모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특히 적당히 기른 린델의 머리를 뒤로 넘겨 이마를 드러낸 것도 잘 어울렸다. 평소 어려 보이는 외모가 성숙해 보였다.

그런데 린델은 그게 어색한 듯 자꾸 머리에 손을 댔다.

“머리가 이상해 보이지 않아요?”

“잘 어울리십니다. 평소랑 다른 모습이라 어색하신 것뿐이에요. 어른스러워 보이십니다.”

어른스러워 보인다는 말에 린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꽤 낯설긴 했지만 애쉰 부인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이렇게 멋진 신사분의 춤 신청을 어느 숙녀분께서 거절할까요?”

“제가 거절해야죠. 숙녀분의 발을 밟을 수는 없잖아요.”

“또 아나요. 그 짧은 접촉에 매력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설마요.”

“몇 년 전에 황금 구두의 카트린느라고 불리는 숙녀분이 계셨어요. 춤을 출 때 사내의 발을 밟는 것으로 마음을 앗아가 버리는 아주 놀라운 재주를 가지신 분이셨죠. 그녀에게 발을 밟힌 사내들이 하나같이 청혼을 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물론, 그녀는 지금 좋은 신랑을 만나 멜란트 자작 부인이 되었죠. 운명이란 모르는 법이랍니다.”

애쉰 부인의 흥겨운 설명에 린델은 소리 없이 웃었다. 운명이란 모른다는 말은 잉그란의 입버릇과 비슷했다.

어차피 오늘 춤을 출 사람은 카시어스뿐이었다. 그리고 그와 출 미뉴에트는 상대의 발을 밟을 일이 없었다. 다른 방향으로 걸어갈 수는 있어도 말이다. 사실 황제와 춤을 추다 실수를 할까 싶은 것보다, 카시어스를 만나야 한다는 게 더 떨렸다.

“멋지게 춤을 추고, 재미있게 즐기다 오세요.”

“예.”

린델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때 마침 하인이 나타나 제라르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그가 오늘 린델의 동행인이었다. 린델은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어디 흠 잡힐 구석은 없었다.

하룻밤 만에 황제의 약혼 소식은 퍼지고 퍼져서 오늘 오전에 린델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깐깐하기 짝이 없는 예법 선생이 대법전을 펼치고는 황제의 약혼과 관련된 조항을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세상에 이런 법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한숨을 쉬며 린델의 편을 들었다.

그러니까 파티장에 들어서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호기심 어린 시선은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피후견인으로 못난 구석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만하면 괜찮다고 생각하며 린델은 현관으로 향했다. 늘 카시어스가 서 있던 자리에 제라르가 있었다. 그 역시 한껏 꾸민 모습이었다. 멋쟁이가 작정하고 꾸미자 광채가 나는 것 같았다. 특히 키가 크고 자세가 좋아서 정말 멋져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제라르가 놀란 얼굴을 하다가 웃었다.

“오. 린델 경? 제 눈이 문제가 생긴 모양입니다. 다른 사람이 되신 듯합니다?”

“머리 모양을 바꿨는데, 이상한가요?”

“아닙니다.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정말입니다.”

“경께서도 오늘 아주 멋지십니다.”

“하하하. 저야 원래 멋졌는걸요. 제 입으려고 말하니 부끄러워졌습니다. 얼른 가지요.”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칭찬을 잔뜩 하며 마차에 올랐다.

길고 다난한 밤의 시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