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붉은 벨벳 위에는 10개의 반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옆의 것으로 하겠다.”
카시어스가 고른 것은 커다란 홍옥이 박힌 반지였다.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재빨리 황제의 긴 손가락에 반지를 끼어주는 것을 보며 시종장은 속으로 혀를 찼다. 마력 제어 반지를 내도록 끼어야 했던 황제는 다른 치장은 몰라도 반지만큼은 멀리했다. 황제의 인장으로 쓰이는 반지조차 예식이 있는 날에만 겨우 손가락에 장식할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직접 반지를 골랐다. 그것도 3개씩이나.
8년 동안 황제를 지척에서 보필하고 있는 시종장은, 주인의 성정을 잘 알았다. 황궁에서 비견할 자가 없는 미남자인 황제는 고귀한 신분의 귀족들이 그렇듯이 눈이 높았고 취향도 고급스러웠다. 다행히 까다롭게 이것저것 따지지 않아 편히 모실 수 있는 주인이었다. 크게 거슬리는 것이 없으면 먹고 입는 데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오늘을 위해 따로 예복을 마련하다 못해 자신을 치장하는 데 정성을 쏟았다.
평소 검붉은 색을 즐겨 입던 황제는 은색 비단에 금실을 화려하게 수놓은 예복을 입었다. 밝은 색에 대비되어 황제의 붉은 머리는 말 그대로 불타는 듯했다. 원래도 비할 데 없는 미남자인 황제는 오늘따라 더욱 빛났다.
시종장은 황제가 특별히 치장에 공을 들이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이유도 알고 있었다. 오늘 데뷔탄트인 애인을 위한 것이었다. 황제는 지난 며칠 동안 보란 듯이 대연회장에서 애인과 춤을 췄다. 총애는 지극하다 못해 하늘에 닿을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약혼 소식이 퍼졌다. 사람들은 황제의 결혼 여부보다는 애인과의 관계 파탄에 대해 떠들었다. 당장에 오늘 있을 파티에서 두 사람이 과연 춤을 출 것인가를 두고 내기가 있을 정도였다.
황제는 몇 번이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있었다. 전에 없는 모습을 보아하니 춤을 춘다에 돈을 건 사람들이 이길 모양이었다.
황제가 반지에 이어 브로치까지 고르는 것을 확인한 시종장은 머리를 굴렸다. 황제의 애인은 황태후를 만난 후 황제와 독대를 했다. 그리고 황제는 황태후를 찾았다. 황제의 약혼 사실이 알려진 후 저마다 행보를 보였다. 그들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 황제는 이렇게나 들떠 있었다. 그 의미는 명백했다.
눈치가 빠른 시종장은 많은 궁정인들의 바람과 달리 두 사람이 헤어지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이번에야말로 경치 좋고 호위도 편리한 아름다운 궁을 추천해 드려야 하나 고민하는 와중에 근위기사 대장이 나타났다.
그가 황제에게 전한 것은 비보였다.
“파이셀 자작이, 그의 방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파이셀 자작이?”
느슨하게 땋아 내린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리본을 풀어버리던 카시어스가 인상을 썼다. 파이셀 자작은 가장 젊은 근위시종 중에 한 명이었다.
“예. 등 뒤로 칼에 찔렸습니다. 폐에 관통해 즉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범인은?”
“아직 모릅니다. 등을 보일 정도면 아는 사이겠지요. 그리고 파이셀 자작은 오늘 밤에 청취가 있을 예정이었습니다.”
“꼬리를 잘라낸 거군.”
카시어스는 혀를 찼다. 시아무크 제국과의 전쟁이 예견되면서 황궁 안에서는 근위기사 대장이 이끄는 대규모 내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라드라비그는 드넓었고, 간자는 어디에나 있었다. 그 와중에 청취가 예정되어 있던 근위시종이 칼에 찔려 죽었으니 답은 뻔했다. 그냥 생쥐가 아니라 칼을 품은 암살자가 돌아다니는 모양이었다.
“파이셀 자작은 누구의 추천을 받았지?”
“카르밀다 후작 부인입니다. 그의 신분은 확실합니다. 폐하.”
카시어스의 질문에 답을 한 것은 시종장이었다. 궁내청장이 황궁의 살림을 맡아 한다면, 시종장은 믿을 만한 자를 시종으로 뽑아 황제 곁에 배치했다. 카르밀다 후작 부인이라면 배경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파이셀 자작은 돈에 매수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궁정인이라고 하더라도 사치와 도박으로 빚을 지고 있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카르밀다 후작 부인이 심상해하겠군. 이번 일로 책임은 묻지 않겠다.”
“황공하옵니다.”
파이셀 자작을 추천한 것은 카르밀다 후작 부인이었지만, 그를 황제의 근위시종으로 배치한 것은 시종장이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감사의 인사를 하는 시종장을 보며 카시어스는 쓴웃음을 삼켰다.
꽃의 궁전이라고 불리는 라드라비그는 화려한 전쟁터였다. 황궁에서 일어나는 일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 밖으로 흘러나갔다. 은화 한 닢이면 하녀와 하인을, 황금 한 덩어리면 시녀와 시종을 매수할 수 있다. 근위시종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얻어진 정보는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도태되지 않기 위해, 그리고 흥밋거리로 소비된다. 거기까지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골칫거리는 암살자였다. 충성스러운 신하인 척 연기를 하면서, 황제의 곁에 다가와 칼을 휘둘렀다. 할엔라드의 최대 적대국이라고 할 수 있는 시아무크는 전쟁이 아니라 암살로 문제를 해결하는 곳이었다. 그들은 직접 훈련시킨 암살자를 정기적으로 보냈다.
시아무크만이 아니었다. 황제를 죽이고 싶어 하는 이들은 여럿 있었고 그들은 엄청난 돈을 들여 전문적인 암살자를 고용했다. 덕분에 카시어스는 8년의 치세 동안 몇 번이고 자객을 대면했다.
암살 위협은 현실이었다. 황궁에서, 그것도 황제 가까이에서 일을 하려면 몇 번이고 신원을 확인하고 교차 검증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고르고 골라 선별된 자들이 근위시종이었다. 신분도 충성도 확실한 이들이었다.
황궁 밖도 아니고, 안에서 근위시종을 칼로 찔러 죽인 것을 보면 암살자가 보통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카시어스는 근위기사 대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파이셀 자작의 입에서 나올 이름이 꽤나 중요 인물인가 보군. 시베르 백작. 그에게 돈을 댄 자부터 찾아라. 가능한 빨리.”
“예. 알겠습니다.”
“빅토리아의 호위를 늘리고…….”
카시어스는 잠시 말을 멈췄다. 직계 황족답게 강력한 마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기사 훈련을 받은 빅토리아는 제 한 몸은 충분히 지킬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기본 호위 인원도 다섯 명이었다. 그래도 하나뿐인 후계자의 호위를 늘리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그녀와 함께 동시에 린델이 떠올랐다.
황제의 애인이 황궁에서 피살당하는 일은 언제든 있어 왔다. 이미 그림자를 몇 명 붙여두었지만 안심이 되질 않았다.
카시어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가 자신의 약점이 되어가고 있는 게 실감나기 시작했다.
그를 잃으면 감당을 할 수 있을까.
버릇처럼 최악의 순간을 떠올려 보았지만 허사였다. 정확히는 상상하기가 싫었다.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아셰리드엘에게도 호위를 붙여라. 적당히 거리를 둬서 그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겠지.”
카시어스의 명령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황제가 굳이 직접 이름을 언급할 정도로 소중한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황제의 사람을 지키는 것이 근위기사가 하는 일이었다.
근위기사 대장은 절을 한 후에 물러났다. 시종장은 정궁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경치가 좋은 궁을 떠올렸다.
카시어스는 머리를 땋는 것을 포기하고는, 느슨하게 반만 묶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그리고 예식용 검과 장전이 된 권총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3개월에 한 번씩, 두 개의 달이 밤하늘을 장식할 때 열리는 트윈문 파티는 대대로 황제가 직접 주최했다. 그런 탓에 파티에 초대를 받는 손님은 다들 제국의 쟁쟁한 귀족들뿐이었다.
트윈문 파티는 궁정의 의전 규칙에 따라 입장 순서가 정해졌다. 초대장에는 입장해야 할 시간이 명시되어 있었고, 때를 놓칠 경우에는 아예 들어설 수가 없었다.
호명관이 소리 높여 손님들의 등장을 알렸고, 공작새처럼 화사하게 치장한 사람들이 대연회장을 채워갔다. 악사들이 연주하는 음악소리가 흥을 키우는 동안에 반가운 인사와 안부, 잡다한 수다가 웅성거림으로 변했다.
그들은 모두 아닌 척하며 소문의 주인공이 입장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와 함께 회의실과 알현장, 그리고 여러 연회에 참석한 그의 얼굴은 이미 알려진 상태였다. 달콤한 외모를 하고도 웃지 않는 그에게는 냉철의 마법사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그런 그가 보이지 않았다. 대연회장은 북적거리고 있었고, 이제 입장이 남은 것은 대제후와 황족뿐인데도 말이다.
설마, 황제께서 직접 에스코트하실 모양인가?
모두의 머릿속에서 비슷한 의문이 떠올랐다. 의전에 따르면 황후나 후궁이 아닌 이상에야 황제와 나란히 입장할 수는 없었다. 현 황제는 독신을 고수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고, 공식적인 애인이 있을 때조차 혼자 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직접 애인을 에스코트한 채 입장을 한다면 그건 어떤 암시였다. 귀족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이야기를 더하기 시작했다.
정말 직접 에스코트하실까요? 불참하는 것일 수도요. 전에 꾀병을 부린 적이 있었잖아요. 이번에는 약혼인데, 그냥 앓아눕지 않을걸요? 그러게요. 오히려 에스코트해 달라고 매달렸을지도 모르죠. 피후견인을 에스코트하는 경우는 왕왕 있지 않습니까. 황제 폐하라면 그 의미가 다르지요. 맞아요. 공식적인 관계라고 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렇다면 후궁뿐인데.
누군가가 후궁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자 대연회장은 연쇄적으로 크게 술렁거렸다. 다들 충격을 받았지만, 아예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설마, 진짜 그런 의미일까요? 사내가 후궁이 되기도 했었지. 아무 배경이 없는데도 그럴 수 있습니까? 황제께서 원하시면 불가능한 건 없지요. 그리 냉랭한 얼굴을 하고 황제를 녹이는 재주 하나만큼은 대단한가 봅니다. 그러게요.
황제의 약혼 소식도, 춤에 대한 내기도 관심거리에서 단숨에 멀어졌다. 황제의 피후견인, 황제의 배행 마법사, 황제의 비공식 연인. 그 모든 단어는 황제의 후궁이라는 이름하고 비견될 수 없었다. 게다가 가문의 배경이나 정치적 거래 없이, 오로지 황제의 총애 하나만으로 후궁이 되는 것이다. 황태후 말고는 황후도, 다른 후궁도 하나 없는 황궁에서.
그건 총애가 끝날 때까지, 황제에게 가장 막강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의미였다.
다들 저마다의 계산을 하면서 대연회장의 소란스러움이 더해가는 와중에 대제후와 황족들이 입장했다. 다음은 황태후와 황태녀였다. 그녀들이 자리에서 서자 대연회장이 순간 조용해졌다.
“위대한 불꽃의 지배자이시며, 열하나의 강과 일곱 산맥의 군주이며, 법과 정의의 수호자이신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호명관이 커다란 목소리로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의 등장을 알렸다. 그와 함께 뿔나팔 소리가 길고 장엄하게 울려 퍼졌다. 대연회장의 귀족들이 재빠르게 예를 표하는 와중에 황제가 나타났다.
“고개를 들라.”
예를 거두라는 허락이 떨어지자 황제와 가까이 서 있던 이들부터 허리를 폈다. 대연회장을 가로지르는 황제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금 전까지 조심스럽게 이런저런 가능성을 따지던 이들은 의아함을 숨기며 황제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준비된 단상 위에 오른 황제의 오른손에 포도주잔이 쥐어졌다. 그사이 귀족들도 저마다 손에 잔을 들었다.
“신이시여. 축복을.”
“황제께. 영광을.”
황제가 잔을 높이 들며 선창을 하자, 뒤이어 귀족들이 답을 했다. 의례를 마치자 황제는 옆에 선 황태녀에게 가벼운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첫 춤은 언제나 황태녀의 몫이었다. 그녀는 대부가 되는 알롱드 대공작의 손을 잡고 대연회장 한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오케스트라가 정식으로 무도곡을 연주하면서, 파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