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왈츠와 미뉴에트, 카드리유, 타란텔라. 유행하는 무도곡이 끊임없이 연주되었다. 대연회장은 아름다운 비단 드레스가 물결쳤다.
“많이도 모여들었군.”
권좌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던 카시어스는 가볍게 혀를 찼다. 황제가 주최하는 트윈문 파티는 귀족들의 지위를 확인시켜 주는 수단이었다. 불참자는 거의 없었고 언제나 한껏 꾸민 이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심한 것 같았다. 분위기도 어딘가 어수선했다.
그 이유를 카시어스도 모르지 않았다. 다들 파티를 즐기는 와중에도 입구를 힐끗거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미 호명관이 자리를 비웠는데도 말이다. 그러면서 의아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춤을 출 것이라는 소문은 잔뜩 퍼져 있었다. 그런데도 린델이 보이지 않으니 다들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럴수록 카시어스는 흥겨워졌다. 기다림은 감미로웠다.
“폐하.”
“빅토리아. 무슨 일이냐?”
“언제 오는지 물어도 될까요?”
옆으로 다가온 빅토리아가 가감 없이 물어왔다. 화사한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진주분을 바른 빅토리아는 여름철의 장미처럼 싱그러웠다. 카시어스는 싱긋 웃고 있는 자신의 후계자를 보며 능청을 떨었다.
“누가 언제 온단 말이냐?”
“다들 궁금해해서 말이죠. 자꾸 묻는데, 제가 아는 게 있어야 말이죠.”
“때가 되면 오겠지.”
카시어스가 손짓을 하자 시종이 등받이도 팔걸이도 없는 접이식 의자를 가져와 옆에 내려놓았다. 황제의 옆자리는 아무나 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빅토리아는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며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녀석을 포기한 거냐?”
카시어스가 화제를 돌렸다. 빅토리아는 아홉 번의 무도곡이 흐르는 동안 일곱 번의 춤을 췄다. 평소라면 최소한의 춤만 췄을 빅토리아가 오늘은 나비처럼 날아다녔다. 마치 누구 보란 듯이. 카시어스는 그 누구의 등을 힐끗 보았다. 빅토리아의 호위기사인 스웨인 남작이 적당히 거리를 둔 채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카시어스가 핵심을 찌르자 빅토리아가 살짝 콧등을 찌푸렸다.
“마음이야 변덕스러운 법이죠.”
“그러다가 미움받는다.”
“차라리 미움이라도 받았으면 좋겠네요.”
빅토리아는 상큼한 얼굴로 삐죽한 소리를 내뱉었다. 일곱 번이나 춤을 추는 동안에 자신의 호위기사는 얼굴 한 번 굳히지 않았다.
아홉 살에 만나, 이 남자라고 생각한 것은 열여섯 살이 되던 생일이었다. 그리고 고백을 한 것은 작년. 좋아한다고 해도 답해주지 않는 남자는 한결같이 거리를 유지했다. 들이대고 또 들이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손을 잡아주는 것 이상은 하지 않았다. 춤 신청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눈치를 주고 언질을 줘도 목석처럼 버텼다. 왜냐고 물었더니 호위를 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고지식한 답을 했다.
나름 연애 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정공법이 안 된다면 질투를 유발해 볼 생각으로 마음에도 없는 일을 저질렀다. 그렇지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남자 때문에 속상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 빅토리아의 생각을 고스란히 들여다본 카시어스는 웃음을 터트리고 싶은 것을 참았다. 치열한 황궁에서 나고 자란 아이는 명석하고 현명했다. 황제의 후계자로서도 나무랄 데 없이 훌륭했다. 그러나 아직 경험이 적었다. 내전을 경험하고, 제 손으로 적의 목숨도 앗았지만, 사람 다루는 법은 아직 서툴렀다.
“그에게 가서 춤을 추자고 해.”
“안 통했어요.”
“그의 앞에 서서 손을 내밀어.”
“네? 제가요?”
카시어스는 사랑스러운 후계자를 위해 친절히 조언했다. 하지만 빅토리아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되물었다. 사교계의 관례상 춤 신청은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법이었다. 후계자 교육을 받았지만 사교계의 고귀한 숙녀이기도 한 빅토리아는 먼저 손을 내민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거절한다고 해도 손을 거두지 마. 그가 과연 짐이 사랑하는 후계자를 세워둘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
마지막 말은 빅토리아가 아니라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스웨인 남작을 향한 것이었다. 협박이었다.
카시어스는 스웨인 남작의 등이 움찔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내부는 소란스러웠고 거리도 꽤 떨어져 있었지만, 스웨인 남작은 뛰어난 기사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고스란히 들었을 것이다.
네 놈이 감히 짐의 후계자를 홀대할 것이냐는 노골적인 경고에 긴장하지 않을 놈은 없었다.
“그건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요, 폐하.”
“아주 확실한 방법일 텐데?”
“그랬다간 진짜로 미움받을 거니까요.”
권력으로 찍어 누르는 건 아니라고 빅토리아가 피력했다.
그렇게 해선 그를 잡지 못해.
카시어스는 뭐라 쓴소리를 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빅토리아는 연애만 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의 마음을 가지려고 하고 있으니 확실히 좋은 방법이 아닐 수는 있었다. 하지만 예의를 차려봤자 상대가 스웨인 남작이라면 언제나 제자리걸음일 뿐이었다.
빅토리아가 스웨인 남작을 마음에 들어 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그가 요령 없는 충직한 사내이기 때문이었다. 권력자의 주위에는 욕심쟁이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그들은 진심이면서도 거짓인 달콤한 아부를 쏟아냈다. 스웨인 남작처럼 조용히 충정을 바치는 이는 정말 드물었다.
행복해지기 위해 무엇을 잡아야 하는지 아는 빅토리아는 스웨인 남작을 선택했다. 충성스럽고, 배신하지 않으며,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제 편일 사내를 말이다. 문제는 스웨인 남작이 너무 욕심이 없다는 점이었다. 정확히는 빅토리아의 구애를 부담스러워했다.
스웨인 남작은 검술 하나만으로 일가를 이룰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인재였지만, 그의 가문 자체는 별 볼 일 없는 지방 귀족이었다. 황제의 배우자가 되기에는 여러 모로 많은 것이 모자랐다. 유력 귀족의 후원을 받는 방법도 있었으나 스웨인 남작은 그러지 않았다. 빅토리아를 좋아하다 못해 숭배하고 있으면서도 거리를 지켰다.
고지식한 남자였다. 마치 린델처럼.
카시어스는 자연스럽게 린델을 떠올렸다. 그에게 황제의 배우자가 되라고 하면 역시나 부담스러워할 것이다. 그러나 그를 설득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린델이 황후의 자리에 앉는 것은 단 며칠뿐이었다.
미래를 상상하던 카시어스는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권력자 주위에 욕심쟁이들이 모여드는 것은, 권력자가 누구보다 탐욕스럽기 때문이다. 귀하고 빛나는 것을 결코 손에서 놓지 않는다. 자신이나 빅토리아나 마찬가지였다.
“가서 춤을 추자고 해. 그가 널 미워할 일은 없어. 난감해하면서도 네 손을 잡아 줄 게다. 아무래도 네게만은 모질지 못하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악마 같은 조언을 하던 카시어스는 채 말을 끝맺지 못했다. 옆에서 빅토리아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카시어스의 시선은 대연회장 입구를 향했다.
라만 숲에서 린델을 만나기 직전과 같은 느낌이었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술렁거림.
그때는 신화시대의 괴물을 만날 거라고 생각했다. 무서운 것을 경계하며 긴장하는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건 기쁨이었다. 온전히 완벽한 인간이 될 수 있는 순간을 기대하는 본능이 기뻐하는 것이었다.
그가 가까이 오고 있었다.
나의 디비티에가.
오래된 구전 시가의 한 구절을 떠올린 카시어스는 다시 웃었다. 그 순간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애틋함도, 초조함도, 설렘도.
“폐하?”
빅토리아는 말을 하다 멈춘 황제의 시선을 따라 대연회장의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단상이 살짝 높긴 했지만 의자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내부를 한눈에 볼 수 없었다. 특히 권좌와 가장 멀리 떨어진 입구는 인파에 가려진 상태였다.
그러다가 빅토리아는 누군가를 곧 알아보았다. 푸른색 예복을 입은 남자는 호명관의 부름 없이 조용히 연회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 듯 입구 쪽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그때 마침 무도곡이 끝났다.
“남작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조금 기다리도록 해라. 빅토리아.”
자리에서 일어난 카시어스가 단상 아래로 내려섰다. 그가 움직이자 막 춤을 끝내고 인사를 하던 귀족들이 그대로 물러났다. 순식간에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았다. 음악 소리 하나 없이 작은 귓속말과 부채질 소리만이 대연회장을 메웠다.
모두의 시선 속에 대연회장 한가운데 선 황제가 웃으면서 손을 뻗었다.
자연스럽게 황제가 뻗은 손을 따라 고개를 돌린 이들은, 그곳에 서 있는 인물을 확인하고는 저마다 탄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건 빅토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와.”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황제의 애인이 천천히 대연회장 안쪽으로 걸어와, 고귀하신 분의 손을 잡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빅토리아는 멋진 순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황제의 용의주도함에 혀를 내둘렀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하신 분은 까다롭게 사람을 가렸다. 정확하게는 귀찮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무를 방기하지는 않았다. 황제는 예법에 따라 귀부인들과 춤을 추었고, 그해 데뷔하는 어린 황친들을 에스코트했다. 그래도 이처럼 보란 듯이 과시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빅토리아는 이 순간을 황제께서 일부러 만들어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건 대연회장에 자리한 모든 이들의, 특히 귀부인들의 부러움과 질투를 한 몸에 받을 만한 일이었다.
황제와 춤을 추는 것만으로도 특별해졌다. 거기에 화려한 퍼포먼스까지 더해졌다. 지고의 존재께서 특별히 너를 아낀다고 직접적으로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누구나 꿈꿔 바라마지 않는 순간이었다.
이제 보니 황제께서 입은 예복 색깔도 다 계산한 것이었다. 검붉은 색을 즐기던 분께서 웬일로 밝은 색을 입으셨나 했더니, 애인과 색을 맞춘 모양이었다.
“단단히 빠지셨어.”
황제의 눈짓에 오케스트라가 미뉴에트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절을 하고는 약속된 춤을 추었다.
미남미녀가 넘쳐나는 궁정에서도 독보적인 미남인 황제는 오늘따라 눈부셨다. 그리고 황제의 애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제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시원한 청량함으로 눈길을 끌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