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빅토리아는 황태후께서 황제의 애인을 후궁으로 추천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거절했다고 하지만, 그다음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황제도 황태후도 입을 닫았다. 분명 뭔가 있었다.
그게 뭔지 빅토리아는 궁금했지만, 지금 당장은 황제가 부러웠다. 모두에게 그는 자신의 것이라고 알리면서 춤을 추고 있으니 말이다.
빅토리아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호위기사의 등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성격만큼이나 딱딱하게 생긴 사내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다시 주위를 경계했다. 진짜 고지식했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지만.
그에게 손을 내민 채 기다리라는 황제의 조언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반쯤 그럴까 마음먹었다. 고백도 먼저 했는데, 먼저 춤을 추자고 못 할 건 없었다. 빙그레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빅토리아는 자신의 호위기사 옆에 섰다.
“멋진 광경이죠?”
“예.”
“감히 나를 세워두게 만들지는 않겠어요. 그러니까 걱정 말아요.”
“송구합니다.”
딱딱한 대답을 들으며 빅토리아는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자신은 이곳에서 가장 빛나고 당당한 아가씨여야 했다. 그것이 자신의 의무였다. 그런 이유로 그에게 차이는 것은 자존심 이전의 문제였다.
“하지만 남작께서 다음 춤곡이 시작되기 전에 손을 내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지는 장담 못 하겠어요.”
“전하.”
“나는 그저 당신과 춤을 추고 싶은 것뿐이에요, 애셔.”
빅토리아는 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여자가 먼저 춤 신청을 할 수도 있는 법이었다.
“왈츠가 좋겠어요.”
“예.”
기어코 대답을 얻어낸 빅토리아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황제를 보고 배우고 자란 그녀는 누구보다 황제를 닮았다.
린델은 대연회장에 들어설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입구에 호명관이 없었다. 시종들은 린델을 막아서진 않았지만, 대연회장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다 못해 벌써 춤을 추고 있었다.
늦은 게 확실했다. 분명히 초대장에 적혀 있는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연회장 안쪽으로 들어가자 카시어스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춤을 끝낸 귀족들이 물러나면서 그 자리를 차지한 카시어스를 보며 린델은 확신했다. 그가 이 순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의도를 짐작하기도 전에 카시어스가 이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한순간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호기심과 의아함은 곧 감탄으로 변했다.
젯타스시여.
사람들의 시선이 이제는 익숙하다고 여기던 린델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리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곧 신을 찾으며 정신을 차렸다.
“가보세요.”
옆에서 제라르가 속삭이지 않아도 린델은 앞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눈부시도록 빛나는 샹들리에 아래 카시어스가 서 있었다. 마치 텅 빈 대연회장에서 연습하던 그때처럼 그는 웃고 있었다. 린델은 카시어스의 손을 잡았다. 잔뜩 긴장한 탓에 숨을 쉬는 것 같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손과 발은 연습한 대로 움직였다.
“너무 긴장했어.”
“예.”
“말을 걸지 말까?”
“부탁드립니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집중하느라 대답하는 것도 힘들었다. 카시어스가 웃음을 터트렸지만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언제 어떻게 춤이 끝났는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자 카시어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단상으로 향하고 있었다.
설마 싶은데 카시어스가 권좌 옆에 놓인 의자로 이끌었다.
“앉아.”
“서 있겠습니다.”
린델은 확실하게 거절했다. 황실 파티에서 권좌 옆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황제의 가족이거나 친족, 혹은 황제가 특별히 권한 경우뿐이었다.
“명령이다. 아셰리드엘. 앉도록 해.”
다정한 목소리로 명령이라시는데 버틸 재간이 없었다. 린델은 접이식 의자에 앉았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무시하며 카시어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까부터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다행히 실수하지 않았어.”
“모두 폐하의 배려 덕분입니다. 몇 번이고 같이 연습을 해주셔서 용기가 났습니다.”
“듣기 좋은 말이군.”
“그리고…… 죄송합니다. 초대장에 적혀 있는 시간에 맞춰 도착했는데, 늦고 말았어요.”
린델은 궁정 화법을 이용했다. 범인이 당신이라는 중의적인 강조였다.
“늦은 거 아냐.”
“의도하신 거죠?”
“무엇을 말이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능청을 떠는 카시어스 때문에 린델은 미소를 지었다.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지만, 그래도 실수 없이 해냈기에 괜찮았다.
“약속대로 첫 춤을 추었으니, 이제 돌아가도 될까요?”
“지금?”
“허락해 주십시오. 폐하.”
린델은 최대한 예의 바르게 허락을 구했다. 애쉰 부인은 즐기다 오라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질식할 것 같은 시선쯤이야 괜찮았다. 하지만 카시어스와 마주하고 있으니 가슴이 술렁거렸다. 그를 멀리하겠다고 한 것이 무색하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약속한 춤을 추었으니 얼른 돌아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진지하기 짝이 없는 린델의 모습에 카시어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틀 전이라면 그 마음을 이해하고 그러라고 했을지 몰랐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달랐다.
“짐을 멀리하고 싶은 모양이군. 그랬다간 다들 네가 질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 텐데?”
“사실이니까 괜찮습니다.”
“휴가를 줄까? 보름? 아니, 한 달쯤?”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지난번처럼 먼 곳에서 떨어져 있는 것이 최선이긴 했다. 린델은 휴가를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카시어스가 휴가를 주겠다고 하는 대신에 손을 내밀었다.
“잡아.”
린델은 차마 카시어스를 부르지 못하고, 그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손을 잡으라고 하시니 너무 의미심장했다.
“감히 짐의 손을 외면할 것이냐?”
카시어스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눈을 반달처럼 접으며 웃었지만 그 내용의 지엄함은 린델이 망설이고 말고 할 게 아니었다.
이럴 때만 황제시지.
린델은 얼굴에 힘을 주고는 카시어스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살짝 올렸다. 그러자 예상했던 대로 카시어스가 손끝에 살짝 입을 맞춰왔다. 그의 행동에서 눈을 떼지 못한 린델의 귀에는 주위 사람들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네 가치관은 존중하지만, 짐의 것이랑 상충하지. 강요는 않겠다. 그리고 짐은 너를 총애하고 있다는 것을 일부러 숨기지도 않겠다.”
그것은 선언이었다. 너도 네가 원하는 대로, 나도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린델은 웃지 못했다. 곤란했고, 난감했고, 또 기뻤다. 바람에 흔들리는 들꽃처럼 갈피를 잡지 못했다.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얼굴을 보면 가슴이 뛰고, 손을 맞잡으면 가슴이 설레었다. 그리고 자신의 뜻대로 하겠다는 소리를 들으면 또 원망스러워졌다.
내 마음인데도 내 마음 같지 않았다.
린델은 연애에 서툴렀다.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것이라 그랬다. 간지러운 사랑의 소네트도, 약속된 토라짐도, 은근한 눈짓도 알지 못했다. 제 마음을 전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하지만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위함에, 그것도 황제의 총애에 앞뒤 가리지 못하고 기뻐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카시어스가 제 스스로 망가지지 말라고 경고했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모두 다 주겠다고 했다. 거기에 애정이 더해졌다.
보란 듯이, 과시적으로, 잔뜩.
좀 더 조심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너를 아끼겠다는 소리에 들뜨고 만다. 당신을 멀리하겠노라 했던 것을 잊어버릴 만큼 말이다.
“그렇게 쳐다보면서, 칭찬 한마디 해주지 않아. 천사님을 닮았다고 했으면서, 오늘은 별로인가 보지?”
카시어스가 슬쩍 몸을 기울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덕분에 린델은 심각함을 잊고 웃고 말았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 카시어스는 천사님이란 단어로도 모자랐다. 그에게 어울리는 수식어를 찾기가 힘들었다.
“아름다우세요, 아주.”
다른 미사여구는 필요하지 않았다. 아름답다는 말 한마디로 충분했다.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카시어스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너는 반짝거려. 투명한 보석처럼, 여름날의 햇살처럼, 아련하기만 하지.”
짧은 사랑의 소네트였다. 대화를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그러나 누구보다 가까운 자리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시종장은 손등을 긁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 역시 소싯적에 귀부인을 상대로 소네트를 읊었다. 그러나 황제께서 그러실 줄은 몰랐다. 재상과 대신들을 쥐어짜면서 차가운 독설을 내뱉으시는 황제 폐하께서 말이다.
그리고 그건 린델 역시 같은 심정이었다. 사랑한다는 고백을 또 다른 언어로 듣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너무 놀라서 얼굴을 붉힐 겨를도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심장이 멈출 것 같았다.
“웃지를 않는군. 기뻐해 주면 좋을 텐데.”
“너무, 너무 기뻐서 할 말을 잃었어요.”
“제법인데. 돌아가기 전에 네게 임무를 주겠다. 아셰리드엘.”
“하명하십시오.”
전제를 달았다. 그렇다는 것은 임무를 끝낸다면 돌아갈 수 있다는 소리였다. 린델은 허리를 곧추세웠다.
“황태후를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라. 어제 신세를 졌으니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황태후 옆에 노란색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가 서 있을 거야. 캐서린은 샤트밀 후작의 고명딸이지. 빅토리아의 이종사촌 여동생이고. 열다섯 살에, 올해 봄에 데뷔했어. 황태후께서 네게 그녀와 춤을 추라 권하실 게다. 그래. 춤. 그녀에게 춤 신청을 해. 왈츠를 추고, 그녀를 태후께 돌려드리고 내게 와.”
임무는 아주 구체적이고도 간단했다. 하지만 린델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실력으로는 어린 아가씨와 왈츠를 추는 것은 쉽지 않았다.
“왜? 싫어?”
“제가 샤트밀 후작 영애의 발을 밟을 겁니다.”
“괜찮아. 저 아이가 네 발을 먼저 밟을 테니까. 경험자로서 말하자면 꽤나 아플 거야.”
“폐하.”
“아픈 티는 내지 말고, 잠시 멈췄다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리드하면 돼. 이건 명령이야. 아셰리드엘.”
이번에도 명령이었다. 린델은 좀 아리송했다. 자신이 다른 여자와 춤을 춰도 카시어스는 아무렇지도 않나 싶었다. 제라르와 춤 연습을 하는 것을 보고 질투했으면서. 그러나 차마 질투하지 않을 거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질투는 안 해.”
“?!”
“샤트밀 후작 영애가 너무 꼬맹이거든.”
마치 머릿속을 읽은 듯한 대답에 린델은 깜짝 놀랐다. 빙그레 웃은 카시어스가 다시 손끝에 입을 맞추고는 놓아주었다. 속이 간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