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샤트밀 후작 영애가 꼬맹이든, 미인이든 상관없었다. 자신은 그에게 빠져 있었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남자에게 당신이 최고라고 말하고 싶었다. 멋지고 아름다운 단어로 찬미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란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그럴 재주가 없었다. 그저 솔직함만이 최선이었다.
“장담하건데, 이곳은 물론이고 이 세상에 폐하와 견줄 자는 없습니다.”
“더없는 기쁨의 찬사로군. 네 눈에 그리 보인다면 충분해.”
“황공하옵니다.”
린델은 잔뜩 겸양을 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하신 것을 이행하고 오겠습니다.”
“너는 만사에 너무 비장해. 불꽃은 한 송이면 충분하니까, 웃으면서 돌아와라.”
전장을 나서는 용사에게 무사 귀환을 바라는 축복의 말이었다. 확실히 화려한 파티장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카시어스의 농담 덕분에 웃음을 터트린 린델이 고개를 숙인 후에 떠나자 대기하고 있던 제라르가 따라붙었다.
카시어스는 린델이 황태후를 찾아 절을 하고, 황태후의 오라버니인 씨디프 공작에게 인사를 하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적당히 화기애애한 모습이었다.
황태후와 씨디프 공작은 서부 귀족파의 대표였다. 그리고 린델의 가디언으로 붙여준 제라르는 중앙 귀족파의 거두인 재상의 셋째 아들이었다. 모두 제국에서 손꼽히는 귀족들이었다. 린델이 자신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잔뜩 티를 냈으니 다들 안달이 났을 텐데 접근을 못 하고 있었다.
린델을 정치판 한가운데로 밀어 넣었다. 이제 제 한 몸을 지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가진 역량을 동원해 영향력을 늘여야 했다. 사교계를 좌지우지하는 것까지는 바랄 수 없었다. 그럴 만한 성격은 아니었다. 그래도 자신의 위치를 자각해야 했다. 황후가 되는 거야 먼 훗날의 일이겠지만, 그 전에 제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누려야 하는지 제대로 배워야 했다.
카시어스는 린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황태후가 무어라고 했는지 린델이 웃었다. 주위에서도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 사이에서 린델은 스스럼없이 녹아들었다. 조금 굳어 있기는 했지만 데뷔탄트야 원래 그런 법이다.
애쉰 부인이 잔뜩 솜씨를 부린 덕분에 린델은 그저 그런 귀족 도련님이 아니라 멋진 조각상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자연스럽게 늘어뜨렸던 머리를 뒤로 넘긴 것이 신선했다. 반듯한 이마가 빛났다. 얼굴을 보고 빠진 것은 아닌데, 그래도 그를 보면 홀린 듯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 모든 신경이 그를 향했다.
린델이 자신의 디비티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에 빠진 탓이기도 했다.
조용한 곳에서, 따가운 시선 없이, 편히 살도록 할 수 있었다. 그럴 마음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카시어스는 린델에게 최고의 것을 주기로 결정했다.
가장 빛나는 자리는 그에게 영광된 족쇄가 될 것이다.
확실히 좋은 애인이 아니야.
좋은 애인이기는커녕 제 손에 넣은 보석을 뱃속에 삼켜야 하는 욕심쟁이였다.
카시어스는 흥겨운 기분으로 제 상태를 인정하며 린델을 눈으로 좇았다. 왈츠 타임에 맞춰 린델이 샤트밀 후작 영애의 손을 잡고 도열한 무리에 합류했다. 꼬맹이라고 카시어스가 혹평하기는 했지만, 샤트밀 후작 영애는 소녀답게 발랄한 귀여움이 있었다. 린델과 나란히 서자 오라버니와 어린 여동생 구도처럼 잘 어울리긴 했다. 그럴 거라고 예상하긴 했는데, 막상 두 눈으로 보자 괜히 춤을 추게 만든 것이 후회될 정도였다.
꼬맹이에게도 질투하는 제 자신이 한심스럽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옆에 세우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카시어스가 혀를 차는 동안에 대연회장 안의 사람들은 황제와 그의 애인을 힐끔거리느라 바빴다.
“샤트밀 후작 영애라니. 뭐, 어울리기는 하네요.”
“저러다가 진짜 궁을 하사받는 거 아니에요?”
“아까 보셨잖아요. 별도 달도 다 따다줄 것처럼 구시는데, 저기 저 브로치에 다이아몬드 크기 좀 보세요. 그깟 궁이 대수겠어요?”
황제가 옆자리에 앉힌 거야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보란 듯이 손등에 입맞춤을 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애인을 향해 몸을 기울이고는 다정히 말을 건네는 모습은 열렬한 구애자의 그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후궁은 아니지 않나요? 근본도 없는 평민인데.”
“고귀하신 분의 취향이 참으로 고상하지 못하네요.”
“그러게요. 흔한 얼굴이잖아요.”
“얼굴이 아니라 다른 게 고상한 모양이죠. 안 그래요?”
은밀한 농담에 웃음이 퍼졌다. 파티의 메인이 춤이라면, 수다는 디저트였다. 상대의 약점을 잡아 흉보는 것은 언제나 재미있는 일이었다. 특히 정치적으로 반왕파의 입장이라면 더욱 그랬다.
“과거에 평민 출신의 후궁이 여럿 있었지만, 대부분 끝이 좋지 못했죠.”
가장 날카로운 가시를 드러낸 것은 루미아나 대공주였다. 그녀의 옆에선 귀부인들이 아름다운 부채를 바쁘게 펄럭거리며 까르르 웃었다.
“확실히 그렇긴 했죠.”
“천한 피가 어디 가는 건 아니니까요.”
모두 대공주와 친밀한 귀부인들이었다. 붉은 입술에서 향기로운 독이 쏟아졌다. 평민 출신으로 후궁이 되었다가 몰락했던 이들의 과거사를 들먹이며 수다를 즐겼다.
루미아나 대공주는 조용히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춤을 추고 있는 황제의 애인을 바라보았다. 후궁이란다. 웃기지도 않았다. 비웃음을 터트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 루미아나 대공주는 부채를 살짝 움켜쥐었다.
어린 계집애에게 황위를 물려주려고 결혼도 하지 않고 버티더니 겨우 저딴 사내란다. 근본도 모르는 평민을 옆에 끼고 도는 모양새는 천박하기 짝이 없었다.
루미아나 대공주는 일찍부터 황제의 애인에 관해 뒷조사를 했다. 일부러 그의 고향이라는 불센부크에 사람을 보냈지만 건진 건 없었다. 남부 내전으로 엉망이 된 불센부크에선 그를 기억하는 이를 찾을 수가 없었다. 관공서에 남아 있는 서류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한 것이 전부였다. 가족이 모두 죽고, 친척조차 없는 천애 고아였다. 출신도 모호하고 배경도 없는 사내를 황제가 애인으로 삼은 것이 너무 이상했다. 하지만 그 이상을 캘 수가 없었다. 하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사람들의 말대로 황제가 정말 사랑에 빠지긴 한 모양이었다. 그게 약점이 될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웃기게도 사람들은 황제의 스캔들을 좋아했다. 궁정 사교계는 가십에 열광했고, 특히 연애사에는 죽고 못 살았다. 철혈이라고 불리던 황제가 연애를 한다니 마음껏 뜯고 씹으며 즐겼다. 그건 루미아나 대공주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은 황제의 몰락이었다. 정확히는 황제와 그의 주변에 있는 이들이 모두 죽어 나자빠지는 것이었다.
루미아나 대공주는 자기도 모르게 빅토리아를 찾았다. 사랑스러운 외모를 한 황태녀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이 뒤틀렸다. 루미아나 대공주는 황제보다 황태녀를 더 싫어했다. 자신처럼 황녀로 태어났음에도 제국의 황제가 될 종손녀가 미웠다. 다른 건 몰라도 그녀가 황제가 되는 꼴을 결코 보고 싶지 않다는 순수한 악의가 불순한 야심의 동기가 되었다.
루미아나 대공주가 바라는 것은 제국의 가장 높은 자리가 아니었다. 그저 미워하고 싫어하는 이들을 끌어내려 진창에 처박히게 하고 싶은 것뿐이었다.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일이 곧 현실이 될 터였다. 이제 준비는 끝냈고 결행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니 이런 작은 심술쯤이야 맛보기에 불과했다.
입술 끝을 끌어 올리며 웃은 루미아나 대공주는 멀찍이 서 있는 금발 머리 부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가 천천히 대연회장 구석으로 가서 어떤 젊은 귀족 청년의 팔꿈치를 슬쩍 치고 지나갔다. 동부에서 온 귀족 청년은 사치와 도박으로 빚을 잔뜩 졌다. 그 빚을 탕감받는 조건으로 청년의 애인이 파티장에서 소란을 일으킬 예정이었다. 한동안 황궁 파티에는 초대받지 못하겠지만, 딱히 그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소란이었다.
귀족 청년과 여인이 팔짱을 끼고 우아하게 움직였다. 마침 무도곡이 끝났다. 황제의 애인과 샤트밀 후작 영애가 움직이는 동선을 청년과 여인이 앞질렀다. 자리를 잡고 선 여인의 손에는 붉은 포도주가 잔뜩 담긴 잔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타이밍 좋게 치맛자락을 밟고는 호쾌하게 넘어졌다. 정확히는 그녀의 애인이 어깨를 밀쳤다. 당연히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포도주는 황제의 애인이 뒤집어썼다.
탄식과 잠깐의 정적, 그리고 이어지는 소란스러움 속에 들릴 듯 말 듯한 비웃음이 섞여 들었다.
그 비웃음이 이번에는 탄성으로 바뀌었다. 황제가 직접 애인의 손을 잡다 못해 망토를 씌우고는 그대로 안아 올렸기 때문이다. 정적 속에 황제는 단상 옆으로 이어지는 복도로 향했다. 황제의 휴게실이 있는 장소였다.
황제가 그렇게 퇴장하고, 샤트밀 후작 영애와 소란을 일으킨 여인 역시 숙녀들의 휴게실로 움직였다. 그들이 사라지자 대연회장은 금세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주제는 당연히 황제의 돌발 행동이었다. 총애가 정말 지극하다고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루미아나 대공주는 황제가 사라진 복도를 확인하며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작은 심술의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원래라면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는 놈과 함께 황제까지 치워버렸더니 속이 다 시원했다. 황제를 이렇게 손쉽게 처리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루미아나 대공주는 붉은 포도주를 가득 채운 잔을 손에 쥐었다.
겨우 포도주 한 잔이었지만, 그것은 린델의 예복을 망쳐버리기 충분했다. 린델은 불운한 상황에 화를 내기보다는 샤트밀 후작 영애가 무사한지부터 살폈다. 그리고 넘어진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황실 파티에서 우아하게 넘어진 아가씨는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경. 드레스 자락을 밟고 넘어졌어요. 부디 용서를…….”
사과하는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린델은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쓰게 웃었다. 용서하고 말 것도 없었다.
“괜찮습니다. 운이 나빴네요.”
“운이 나쁜 게 아니지.”
갑작스럽게 끼어든 목소리의 주인공은 카시어스였다. 린델이 돌아보기도 전에 뭔가가 린델의 어깨를 감쌌다. 그게 카시어스의 망토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과 동시에 그에게 안기다 못해 들어 올려졌다. 그러고는 그대로 카시어스가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