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알아차린 린델은 두 번째로 신을 찾았다. 카시어스에게 안긴 채 움직인 적은 몇 번 있었다. 그래도 그건 벨룬드 공작 저택 내였다. 보는 사람도 두 손에 꼽았다. 하지만 지금은 제국을 대표하는 귀족들 앞이었다. 부끄럽다는 생각 따위는 할 수도 없었다. 머리가 얼어버리다 못해 숨이 쉬어지지도 않았다. 정신을 차린 것은 복도에 들어서서 사람들의 시선이 사라지고 난 다음이었다.
“폐하?”
“응?”
“지금, 지금…….”
린델이 말을 잇지 못하는 와중에 시종이 복도에 붙은 문을 열었다. 황제의 휴게실이었다. 카시어스가 휴게실 안으로 들어서며 입을 열었다.
“그들은 지금 네가 포도주를 뒤집어쓴 일이 아니라, 짐에게 안겨 사라졌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을 거야.”
“이러시면 안 돼요.”
“왜?”
왜냐고 물으며 카시어스가 린델을 의자에 앉혔다. 린델은 카시어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태연히 웃고 있었지만 린델은 속이 탔다.
왜냐니?
이유야 잔뜩 있었다.
“우선 폐하의 옷이 더러워지고, 그리고 다들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폐하의 명예에 누가 될 거예요.”
근위시종들이 같이 자리하고 있었다. 린델은 작은 목소리로 재빠르게,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황제가 애인을 안아 올린 채 사라졌다. 이게 어떻게 이야기가 퍼질지 상상하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명예에 누가 되기는. 다들 좋아할 건데.”
“폐하.”
카시어스가 개구쟁이처럼 키득거리는 바람에 린델은 조바심이 났다. 다들 좋아하긴 하겠지만 그건 명예와 별개였다.
“오늘의 일이 역사가 되어 기록으로 남을까? 아마 아닐걸? 기록이 남는다면 널 총애했다는 사실만 몇 줄 적히겠지. 괜찮아.”
“안 괜찮아요. 다음부터 그러시면 안 돼요.”
“애쉰 부인만큼이나 깐깐하군. 괜찮다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그것보다는 옷을 갈아입어야지. 옷을 챙겨 와라. 씻을 물도. 반짝이는 얼굴로 돌아가서 다시 춤을 추자. 아셰리드엘. 보란 듯이.”
카시어스가 명령을 내리자 시종들은 저마다 재빠르게 움직였다. 린델은 어디에서 놀라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옷을 챙겨 오라는 명령과 춤을 추자는 명령 중에 무엇을 먼저 물어야 할까 싶었다.
“갈아입을 옷이 있어요?”
“몇 벌 더 만들게 했거든. 언젠가 황궁에서 갈아입고 갈 날을 위해서 말이야.”
카시어스의 대답은 명쾌했다. 린델의 예복을 만든 것은 황실 재단사였으니 몇 벌 더 만들었다면 그럴 수 있었다. 그 동기는 불순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운이 좋았다. 때마침 시종이 세숫물을 대령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린델은 얼굴과 머리에 묻은 포도주를 씻어냈다.
“신고식이 고약해.”
“신고식이요?”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던 린델은 카시어스를 보았다. 긴 의자에 앉은 카시어스는 아까부터 계속 웃고 있었지만 이를 드러내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데뷔탄트에게 망신을 주는 거지. 일부러.”
“그 아가씨는 드레스를 밟고 넘어졌어요.”
린델은 넘어진 아가씨를 떠올렸다. 그녀는 드레스를 밟았다면서 완전히 새빨개진 얼굴을 하고는 용서를 구했다. 그렇게 유순한 얼굴을 하고는 일부러 넘어졌다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야 책임을 면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들 알아. 어린 아가씨가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누군가 저를 싫어하는군요.”
“놀라지도 않는군.”
너무 솔직하게 핵심을 짚어버린 린델 때문에 카시어스는 힘이 빠지고 말았다. 린델이 화를 내지 않아서 더 그랬다. 이제 겨우 데뷔탄트가 된 황제의 애인은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았다. 어린 아가씨라면 눈물을 삼키다 못해 충격을 받아 쓰러질 만한 일이었다.
이런 일을 대비해 혹시나 싶어 제라르를 붙여놓았는데, 그는 이번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린델이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고결한 명예를 따지면서도 자신을 향한 악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대범하기 짝이 없었다.
카시어스의 예상대로 린델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자신이 타깃이 된 이유도 알았다. 황제의 총애는 원래 무섭고 무거운 법이었다. 데스탄처럼 사람을 사서 죽이려는 게 아니라면 이 정도 장난이야 그냥 웃어넘길 수 있었다.
“이 정도야 별것 아니죠. 간지럽지도 않은걸요.”
“네게는 별것 아니겠지만, 짐에게는 꽤나 중요해. 짐이 아끼는 피후견인이 망신을 당한 채 퇴장당하는 걸 두고 볼 수가 없거든. 그거야말로 명예의 문제지.”
“그냥 손만 잡아주셨어도 됐어요. 다리를 다친 게 아니니까요.”
“네 다리가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춤을 춰야지. 왈츠가 좋겠어.”
대화는 자연스럽게 춤을 춰야 하는 당위성으로 흘러갔다. 린델은 카시어스의 화술에 말려드는 것을 알면서도 싫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카시어스는 제 힘을 일부러 과시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타고난 지배자였다. 존재만으로 자연스럽게 주변을 장악했다. 다만 그는 필요에 의해 움직였다. 주목을 받은 채 춤을 출 수밖에 없게 한 것도, 방금 전에 보란 듯이 안아 든 것도, 왈츠를 추자고 하는 것도 모두 그러했다.
총애하는 애인이라는 과시와 곤란함에서 벗어나게 해준 친절은 대부분 배려였다. 그런 그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번은 뻗대보았다.
린델은 몸을 돌려 카시어스 앞에 섰다. 그러자 카시어스가 앉으라고 눈짓을 했다. 린델은 가까이 있는 의자에 앉으면서 입을 열었다.
“꼭 춰야 하나요?”
“물론.”
“명령이라고 하시면 따르겠습니다, 폐하.”
말간 얼굴을 하고 명령을 하라는 린델 때문에 카시어스는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린델은 정말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는 듯 눈빛을 보냈다. 어지간히도 춤을 추기 싫은 모양이었다. 거기다 애인은 잠시 안 하겠노라고 했던 영향이기도 할 것이다.
고집쟁이 애인이었다. 그래도 카시어스는 이렇게 실랑이를 벌이는 순간이 좋았다. 린델은 의도하지 않게 밀당을 잘했다. 남의 속도 모르고 지금처럼 약을 올린다. 본인은 아주 진지한 게 핵심이었다. 그러니 휘둘려줄 수밖에 없었다.
“정말 고집쟁이야.”
“제가요? 저는 폐하의 신실한 종입니다.”
“말은 잘하지.”
“황공하옵니다.”
“황명이다, 아셰리드엘. 짐과 왈츠를 춰.”
“명 받들겠습니다.”
그냥 명령도 아니고 황명이라고 직접 말해주시니 린델은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에 더해 충성 맹세를 하는 군인처럼 가슴에 손을 얹었다. 반쯤 장난이었고, 그걸 아는 카시어스도 웃었다.
“사주한 이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아?”
“알 수 있습니까?”
“네게 포도주 세례를 선사한 아가씨랑 그녀의 동행인을 족치면 알아낼 수 있어.”
족친단다. 아주 거친 단어를 사용하는 카시어스를 보며 린델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웃으면서 넘길 일을 굳이 키우고 싶지 않았다.
“해프닝으로 끝내겠습니다.”
“네 적이 누군지는 알아야지.”
“?”
“가만히 당하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야. 열 배로 돌려주지는 못하더라도 두 배로 갚아준다는 마음가짐을 가져.”
되갚아준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린델은 눈을 깜빡거렸다. 두 배로 갚으려면, 포도주를 두 번 뿌리면 되는 건가 싶었다. 아무래도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 린델은 솔직히 말했다.
“제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네게 그런 재주가 있었다면, 내 근심이 절반으로 줄어들었겠지. 좀 더 두고 보자.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카시어스는 다음을 기약하면서도 속으로 혀를 찼다. 린델은 다른 이들에 비해 임계점은 아주 높았다. 창피를 당했음에도 그러려니 했다. 마음이 좁은 것에 비하면 낫지만, 그래도 당하기만 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니었다. 순한 녀석이라 가르쳐도 잘 배울 것 같지도 않았다.
장기말로 이용된 아가씨를 족치지 않아도 배후를 몇 명으로 좁힐 수 있었다. 린델을 대신해 그들 모두 본보기를 보여야 하나 생각했다.
“제가 폐하의 근심이 될 수는 없지요. 명하십시오. 따르겠습니다.”
“명령한다고 네가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아?”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린델은 진심이었다. 카시어스가 필요 없는 것을 하라고 한 적은 없었다. 카시어스도 린델의 마음을 알았지만 그러라고 하지 않았다.
“말은 잘하지. 양을 늑대로 바꾸려는 꿈을 꾸는 게 잘못이지.”
“양이 늑대가 되긴 해요.”
“그건 동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그렇게 장난을 치는 사이에 시종이 예복을 가져왔다. 짙은 보라색에 금실을 수놓은 것과, 검정에 가까운 푸른색에 짙은 은사가 섞인 보라색 실을 수놓은 것이었다.
“검정으로.”
옷을 고른 것은 카시어스였다. 린델은 카시어스처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옷을 갈아입을 만큼 배짱이 좋지 못했다. 시종과 함께 가림막으로 향했다.
근위기사 단장인 시베르 백작이 휴게실 안으로 들어선 것은 그때였다. 린델은 가림막 안으로 들어서기 직전에 시베르 백작을 보았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누군가를 다급히 찾는다고 느낀 순간에 사건이 터졌다.
엄청난 힘이 린델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린델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움직이지 마. 목을 따버릴 테니까.”
린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단숨에 이해했다. 휴게실 안에 있는 사람이 모두 자신을 보고 있었다. 느긋하게 앉아 있던 카시어스가 어느새 칼을 빼어 들고 서 있었다. 근위시종들은 모두 엉거주춤 뒤로 물러났고 앞선 것은 칼을 든 카시어스와 시베르 백작뿐이었다.
목덜미에 서늘하게 와 닿는 것이 칼이라는 것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인질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