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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72/137)

-72화-

잠깐의 정적 속에 자신을 붙잡고 있는 사람의 심장 소리가 맞닿은 등을 통해 들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자신의 것과 같이 말이다.

“올텐 소백작. 칼을 버려.”

위협적인 목소리로 항복을 권한 것은 시베르 백작이었다. 린델은 그제야 등 뒤에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올텐 소백작. 에드워드.

그는 근위시종 옆에서 자잘한 일을 도와주는 수행원이었다. 인사 몇 번 한 게 전부이긴 했지만, 성실하고 부지런하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왜 갑자기 인질극을 벌이는지 린델은 알 수가 없었다.

“다들 물러나.”

올텐 소백작은 항복은커녕 사납게 외쳤다. 그러자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황제의 애인이 인질이 되었으니 최악의 상황이었다.

칼을 고쳐 쥔 시베르 백작은 자신의 실책에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죽은 파이셀 자작의 방을 뒤져서 비밀 장부를 찾아냈다. 파이셀 남작은 어리석게도 그에게 뇌물을 바친 이들의 이름을 차곡차곡 적어두었다. 간단한 약어로 되어 있는 장부의 명단에는 특별한 게 없었다.

다만 장부를 살피던 부하가 가죽 표지 안에서 편지 하나를 발견했다. 올텐 소백작의 신원에 대한 내용이었다. 죽은 파이셀 자작이 올텐 소백작을 의심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편지의 내용을 보자면 올텐 소백작은 가짜였다. 외모는 엇비슷했지만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부하에게서 보고받은 시베르 백작은 올텐 소백작이 황제와 함께 휴게실에 갔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다급히 달려왔다. 신중하지 못한 판단이었다. 올텐 소백작은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황제의 애인을 인질로 잡고 말았다.

신분을 숨긴 채 황궁에 잠입한 이유는 뻔했다. 암살자는 붙잡히면 끝이었고, 그래서 마지막 발악을 하기 마련이었다. 인질의 목숨은 바람 앞의 촛불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나 다를까 날카로운 단검이 하얀 목을 찔러 들어 피가 맺혔다. 휴게실 안의 공기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시베르 백작은 옆에 선 황제를 돌아보고 싶은 것을 참았다. 암살자보다 황제가 뿜어내는 기운이 더 무서울 지경이었다.

“말을 준비해. 테라스 밖에.”

올텐 소백작이라고 불렸던 암살자는 벽에 등을 붙이며 외쳤다. 황제 암살이 실패했으니,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몇 없었다. 탈출을 시도하거나, 자살을 하거나, 붙잡히는 것뿐이었다. 모든 선택지의 끝은 죽음으로 이어질 테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발악을 해볼 생각이었다. 그의 손에 황제의 애인이 붙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귀애해 마지않는 애인은 아주 훌륭한 인질이었다. 철혈이라고 불리는 황제가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린델은 딱딱하게 굳다 못해 창백하게 질린 카시어스를 보며 인상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목에 닿은 서늘함과 따끔한 아픔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뜨거운 것이 목깃을 파고들고 있었다. 아마도 피일 터였다.

열 발자국이 될까 말까 한 거리에서 마주 선 사람들이 모두 심각한 얼굴로 자신의 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혼이 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다들 아무것도 못 하고 있다는 사실이 끔찍할 정도로 싫었다.

린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올텐 소백작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조금 다치는 것은 괜찮았다. 세투아도 트윈문 파티에 참석했다. 절명만 하지 않으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아니, 완벽하게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린델은 이틀 전에 마스터한 마법을 떠올렸다. 칼에 찔려도 무사할 수 있는 마법이었다. 목적이 정해지고 수단을 떠올리자 머리가 맹렬히 돌아갔다.

린델은 카시어스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고 있었다. 지팡이를 던져 치안대의 목깃을 벽에 꽂아버릴 정도였다. 잠깐의 틈만 있으면 충분했다. 린델은 카시어스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쳐도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뭔가 신호를 보내고 싶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이런 것도 아무나 쉽게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일을 저지르려니 심장이 심각하게 뛰다 못해 멈춰버릴 것 같았다. 손은 물론 팔다리도 덜덜 떨렸지만 힘을 주었다.

한순간만이라도 올텐 소백작의 손길에서 벗어나야 했다.

“말을 준비하라니까. 어서.”

“항복해라. 고통 없이 죽여주겠다. 황제의 이름으로 자비를 약속한다.”

올텐 소백작의 외침을 받은 것은 카시어스였다. 차가운 목소리에 다들 속으로 질리고 말았다.

암살자의 끝은 정해져 있었다. 죽음이다. 사로잡혀 고문을 받거나, 그 자리에서 죽거나 하는 차이뿐이었다. 고통 없는 죽음은 자비가 맞았다. 하지만 애인이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네 목에 칼을 찔러 넣어봐.”

“감히.”

올텐 소백작의 도발에 발끈한 것은 시베르 백작이었다. 그리고 그때 린델이 움직였다. 머리카락이 잡힌 채, 목에 칼이 들이대어 있었지만 양손은 자유로웠다. 칼의 위협 앞에서 린델이 돌발 행동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린델은 두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 잡고 있는 올텐 소백작의 손을 뿌리치면서 몸을 뒤틀었다. 머리 가죽이 쥐어뜯기는 아픔이었지만 온 힘을 다했다.

린델의 반항에 올텐 소백작은 저도 모르게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카시어스가 소리 없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시베르 백작이 뒤를 따랐다. 그들이 채 한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린델의 목을 파고들어야 할 칼이 제멋대로 튕겨 나갔다. 뜻밖의 감촉에 올텐 소백작이 잠깐 멈칫하는 사이에 린델은 완전히 몸을 틀었고, 바라던 대로 틈이 생겼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카시어스가 들고 있던 칼을 그대로 집어 던졌다. 날카로운 칼이 올텐 소백작의 오른쪽 어깨를 꿰뚫고 벽에 꽂히는 것과 카시어스가 자유로워진 린델을 끌어안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모든 일은 순식간에 끝났다.

“으아악.”

“입을 막아.”

카시어스의 명령에 시베르 백작이 비명을 지르는 올텐 소백작의 턱을 후려쳐 기절시켰다. 폭력적인 소리에 린델은 뒤를 돌아보려고 했지만 카시어스가 얼굴을 붙잡아 왔다.

“도대체 무슨 짓이야?”

“?”

무슨 짓이냐는 질문을 린델은 이해하지 못했다. 린델은 눈을 크게 뜨고 카시어스를 보았다. 터무니없는 짓을 한 덕분에 심장이 귀에 달린 것처럼 쿵쿵 울려서 자신이 뭘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정신은 또렷한데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머뭇거리고 있자 카시어스가 인상을 쓰더니 뭐라 더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상처가 났어.”

얼굴을 잡은 카시어스의 손이 린델의 목을 스쳤다. 카시어스의 손끝에 피가 묻어 있는 걸 확인한 린델은 인상을 썼다. 자신의 목에서 피가 나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떠올릴 수 있었다. 심각하게 아프지 않았다. 린델이 목으로 손을 가져다 대려고 하자 카시어스가 손목을 낚아챘다.

“세투아를 불러라.”

카시어스가 명령을 내리자 누군가가 밖으로 나갔다. 카시어스에게 반쯤 안겨 있던 린델은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었다.

“괜찮아요.”

“안 괜찮아.”

“목이 좀 따끔거릴 뿐이에요. 피를 많이 흘리면 어지러워지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거든요. 아, 갈아입을 옷이 엉망이 되었으니 춤은 못 추겠죠? 아니, 그게 아니라. 괜찮은데, 정신이 없어서……. 죄송해요. 아무 말이나 막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이제 돌아가야 되겠어요.”

린델은 자신이 잔뜩 흥분했고, 그래서 생각 없이 말을 지껄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래서야 괜찮다고 해도 통할 리 없었다. 그래서 린델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객관적으로 제 상태를 파악한 린델은 얼굴이 질렸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대신 카시어스가 혀를 찼다.

“미리 사과하지. 용서해.”

“폐하?”

“악몽을 꾸면 깨워줄게.”

도대체 뭘 하려고 미리 사과를 하는지 의문을 갖자마자 강한 충격이 뒷목을 강타했다. 그가 일부러 기절을 시켰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래도 의식을 잃기 직전, 카시어스가 꽉 끌어안아 준 덕분에 린델은 안도하며 눈을 감았다.

어렸을 때부터 신전의 종사로 지낸 린델은 눈치가 나쁜 편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분위기를 잘 읽는 편이었다. 명석하기도 했기 때문에 인과 관계도 제대로 파악했다.

대연회장에 들어서는 순간에 쏟아지던 시선과 수군거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카시어스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배려를 하는 이유도 알았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자신이 황제를 배경으로 두고 있다는 것만으로 정치판 한가운데 서게 되었다. 카시어스의 말대로 제 한 몸 지킬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린델은 황태후가 씨디프 공작을 소개시켜 주었을 때,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황태후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다정한 할머니처럼 반겨주었다. 린델은 그녀가 카시어스를 협박했다는 사실을 잊은 척하며 웃었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온화한 얼굴의 씨디프 공작이 만나서 반갑다고 인사를 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평온한 대화 내내 린델은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

황태후는 후궁이 되라고 권하면서 양자 입적을 추천했다. 자신은 거절했고, 카시어스 역시 한 귀로 듣고 흘리라고 했다. 그런데 황태후가 굳이 씨디프 공작을 소개시켜 주었다.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긴 했지만 타이밍이 공교로웠다. 카시어스만큼이나 황태후 역시 그냥 움직일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카시어스에게 아무 말도 못했다. 섣부른 판단으로 괜히 신경 쓰게 만들기는 싫었다. 사실 그럴 시간도 없었다.

린델은 천천히 의식을 일깨우며 암살에 대해 생각했다. 올텐 소백작의 칼은 자신의 목을 그었지만, 그가 진정으로 노린 것은 카시어스였다.

암살이었다. 그건 데뷔탄트의 신고식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위험이었다. 제국의 황제에겐 적이 많았다. 그래도 황궁에서 암살 위협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린델은 처음으로 황제란 자리가 좋은 게 아니라고 생각하며 눈을 떴다.

수면등에 비친 천장화가 제일 먼저 보였다. 자애의 여신이자 수호의 여신인 하르멜라께서 그녀의 상징인 백합을 들고 자애롭게 굽어보고 계셨다.

린델은 천장화 하나만으로 자신의 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의 기억은 카시어스의 손에 기절을 한 것에서 끝나 있었다. 자신을 여기에 눕힌 것은 카시어스라는 것을 알겠는데, 여기가 어딘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어디지?”

“내 침실.”

카시어스의 목소리가 발치에서 들렸다. 멍한 머리로 그의 대답을 곱씹던 린델은 화들짝 놀랐다. 카시어스의 침실이라면 황제의 침실을 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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