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137)

-73화-

라드라비그의 중심. 태양의 방.

할엔라드 제국의 중심은 당연히 황제가 기거하는 황궁인 라드라비그였고, 그중에서도 황제의 침실인 태양의 방이 가장 핵심이었다. 황궁 설계자인 세울드르 백작은 철저하다 못해 강박적일만큼 태양의 방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배치했다. 알현실, 집무실, 회의실, 사실, 서재. 모든 것이 황제의 동선에 맞춰 있었다.

그중에서도 황제의 침실인 태양의 방은 오로지 제국의 지배자를 위한 장소였다. 황제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이곳에서 잠을 잘 수 없었다. 황후도, 황자녀들도, 총애받는 후궁이나 애첩도 예외는 없었다. 그게 규례라고 이드나카에게 들었다.

린델은 자신이 정말 태양의 방에 누워 있는 게 아니길 빌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침대 전면에 위치한 커다란 테라스 창에 달빛이 가득했다. 수면등과 달빛에 드러난 실내는 마냥 낯설지 않았다. 배행 마법사로 몇 번이나 황제의 침실을 드나들었던 린델은 테라스 기둥 앞에 서 있는 도자기로 만든 커다란 독수리 상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침대 발치에 있는 의자에 카시어스가 앉아 있는 것도 확인했다. 그의 눈빛은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린델은 침대에서 벗어나야 하나 망설이며 마른세수를 했다.

“몇 시죠?”

“2시.”

“어, 음……. 지금 돌아갈 수 있을까요?”

린델은 질문을 하며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보았다. 셔츠에 바지만 입고 있었고 발도 맨발이었다. 그래도 대충 옷을 챙겨 입고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안 돼.”

“그럼 다른 방으로 옮기는 것은요? 여기 있으려니 송구해서요.”

“그것도 안 돼. 황제의 침대 위에서 잠든 사람은 많아. 그냥 있어.”

“네.”

단호하게 두 번이나 안 된다고 하니 달리 방법이 없었다. 린델은 당신께서 주시는 특혜가 너무 부담스럽다는 말을 꿀꺽 삼켰다.

그 와중에 카시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가 손을 뻗어 린델의 턱을 슬쩍 들어 올렸다.

“목에 난 상처는 다 나았어.”

“세투아 님의 실력이 정말 좋으시죠.”

“기절시킨 것은 미안해. 네가 너무 흥분해서 그랬어. 조용히 달랬어야 했는데, 그럴 자신이 없었거든.”

“괜찮아요. 악몽 같은 거 안 꿨어요. 우…….”

안심하고 정신을 잃은 덕분에 푹 자다가 깬 기분이었다. 괜찮다고 하는데 카시어스가 상처가 있었던 목을 쓰다듬는 바람에 린델은 앓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움츠렸다. 간지러웠다.

“왜?”

“간지러워서요.”

“그렇게 귀엽게 굴면 화를 못 내잖아.”

“제게…… 화나셨어요?”

린델은 귀엽다는 말보다 카시어스가 화가 났다는 데 더 집중했다. 카시어스가 목을 쓸던 손을 거두었다. 애매하게 구겨진 그의 미간을 보며 린델은 마음을 졸였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나 싶었다.

“잘했다고 치하를 해야 할지, 왜 그랬냐고 질책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폐하?”

“길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느냐?”

“예. 할 수 있습니다.”

뜻 모를 카시어스의 말에 갸우뚱거리던 린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고 일어났더니 정신이 맑았다.

“올텐 소백작. 에드워드의 진짜 이름은 데튼이라고 하더군.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조직에 소속된 프로 암살자고, 올텐 소백작의 이름을 도용해 3년 전에 황궁에 잠입했어. 근위시종의 수행원이 된 것은 올해 봄이고 이번 내사에 꼬리가 잡혔어. 시베르 백작이 너무 성급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녀석을 자극해 버렸지. 그는 배후가 누구인지 몰라. 조직을 찾아 뒤지면 알 수 있겠지만, 아직은 아니야. 여기까지. 궁금한 것을 물어봐.”

사실만 건조하게 나열하는 카시어스 때문에 린델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그러나 궁금한 것을 물어보라는 소리에는 엉뚱한 것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휴게실 바로 옆에서 트윈문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파티는 어떻게 되었죠? 큰 소리가 났는데.”

“무사히 잘 끝났어. 비명 소리는 묻혔거든. 그러고 보니 너와 춤을 추지 못한 건 아쉽군. 또 다른 건?”

드디어 카시어스가 웃었기 때문에 린델은 좀 더 신중히 질문거리를 떠올렸다.

“이런 일이……. 음, 그러니까 폐하께서 위험에 처하는 일이 자주 있나요?”

“자주는 아니야.”

“그럼요?”

“올해는 처음이군. 작년에는 두 명이 사전에 잡혔고, 한 명이 칼을 들고 덤벼들었지. 그리고 재작년에는……. 내전의 끝자락이라서 좀 많았어. 여덟 번이던가?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전에도 말했지만 대인 전투에서 날 이길 놈은 없거든.”

카시어스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굴었지만 린델은 할 말을 잃었다. 그에게 적이 많다는 것은 알았다. 그래도 이렇게나 많이 위협을 받을 줄은 몰랐다.

“세상에. 그렇게 위험하실 줄은 몰랐어요.”

“위험한 건 내가 아니야. 린델, 너야.”

“제가요? 오늘 일은 올텐 소백작이, 그러니까 그가 옷을 가져다주는 바람에 그랬던 것뿐이에요.”

당시 상황을 떠올린 린델은 살짝 인상을 썼다. 카시어스가 옷을 가져오라고 명령했고, 그에 움직인 사람 중에 한 명이 올텐 소백작이었다. 그는 이드나카와 함께 린델의 옷시중을 들려고 같이 움직였다. 굳이 따지자면 운이 나빴다고 할 수 있었다.

“넌 운이 썩 좋지 않아.”

“예. 확실히 그런 편이죠.”

린델은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카시어스의 말을 인정했다. 최근에 자신의 인생은 꽤나 여러 가지 의미로 다사다난했다. 대부분 결과는 좋았지만 시작은 끔찍할 정도로 재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잘못되었다면 목숨을 잃을 뻔한 일들이 잔뜩 일어났다.

“그것과 별개로 위험한 것도 맞아. 내 적은 이제 너를 노릴 테니까. 그래, 황제의 총신이자 총희는 위험한 자리지.”

“그건 이미 알고 있어요.”

“네가 마법을 써서 위기를 벗어나려고 했던 것은 알아. 하지만 무모했어. 갑옷에도 약점이 있어. 낮은 확률이긴 하지만 날카로운 칼날은 막지 못하곤 해. 모르진 않았겠지?”

갑옷 마법을 썼다는 사실을 알아본 카시어스에게 놀랐던 린델은 뒤이은 질문에 한 박자 늦게 대답해야 했다.

“어…… 알고는 있었어요.”

“그런데도 그랬단 말이야?”

“그때는 생각나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약점이 생각났어도 했을 거예요. 그게 최선이었으니까요.”

추궁을 하는 카시어스의 질문에 린델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수호 마법 중에서 물리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방패와 갑옷을 마스터했다. 방패는 한쪽 면의 충격을 막아주는 것으로 보통 심장을 중심으로 상체 전면에 마법을 걸었다. 그리고 갑옷은 방패의 상위 마법이었다. 고왕국 시대의 기사가 입는 강철 갑옷처럼 전신을 보호했다. 방패는 단 한 번의 물리적 충격으로 마법이 깨지는 반면에, 갑옷은 축적된 물리적 충격의 총량이 한계를 넘기지 않는 한 계속 유지되었다.

린델은 카시어스에게서 참전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후, 실전에서 유용한 수호 마법을 익히는 데 몰두했다. 특히 방패보다 효율이 좋은 갑옷을 마스터하려고 엄청 노력을 기울였다. 이틀 전에 갑옷을 마스터했을 때는 카시어스에게 자랑할 순간을 기대했었다.

갑옷이 칼날을 막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을 세투아에게서 듣기는 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갑옷이 와해될 확률은 길을 걷다 넘어져 코가 부러지는 그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약점이 떠올랐어도 자신은 움직였을 터였다.

“최선이 아니야. 그의 칼이 네 목을 꿰뚫을 수도 있었어, 린델. 너는 날 믿고 조금 더 기다려야 했어. 위험천만하게 암살자를 자극하는 게 아니라.”

“하지만…….”

“다음부터는 기다린다고 해. 상황이 최악으로 흘러간다고 해도 그건 살아 있어야 가능한 거야. 죽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세투아 님께서 말씀하시길, 갑옷에 꿰뚫릴 확률은 아주 낮다고 했어요.”

“린델.”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을 거라고 말씀드릴 수 없어요. 저는 제 판단이 옳다고 생각해요. 시간을 끌어 소란을 키우는 것보다는, 빨리 해결하는 게 맞았어요.”

딱딱하게 대답을 한 린델은 카시어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음부터 그러지 않겠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커다란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암살자에게 납치되는 소란 따위는 일어나지 않아야 했다. 같은 순간이 온다면 자신은 또 그럴 터였다. 그게 최선이었다. 카시어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모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한 결과를 부정당하니 기분이 좋질 못했다.

“너는 도대체…….”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무력하게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또박또박하게 제 소신을 밝히는 린델은 비장하기만 했다. 카시어스는 린델이 불만을 참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도 카시어스는 무모하게 굴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암살자의 체격은 크지 않았고 린델의 뒤에 제대로 숨었다. 카시어스가 노릴 수 있는 것은 칼을 쥔 암살자의 손뿐이었다. 카시어스는 긴장하며 기회를 기다렸다. 린델의 목에 피가 흐를 때에는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겁을 먹은 표정을 짓던 린델이 그렇게 과감하게 움직일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잠깐의 실랑이에 암살자의 손에 들린 칼이 린델의 목에 닿았을 때는 한순간이나마 아득해졌다. 칼이 튕겨나가는 것을 확인하면서도 숨을 쉬는 것을 잊어버렸다.

사랑하는 이가 위험에 처하는 순간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이렇게나 끔찍한지 몰랐다.

흥분을 억누르지 못하면서도 하얗게 질린 린델의 얼굴을 보면서 왜 그랬냐고 화를 낼 뻔했다. 제멋대로 튀는 감정은 제어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속상해하는 녀석을 달래야 할지, 다시 한 번 질책을 하여 확답을 받아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죽을 뻔한 주제에 린델은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그 모습에 괜히 울컥해서 이대로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본능과 이성이 동시에 말렸다. 좋은 애인은 아니더라도 멍청이가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손을 잡아, 린델.”

카시어스가 손을 달라고 하자 린델이 순순히 잡아주었다. 따뜻한 온기에 카시어스는 쓴웃음을 삼켰다. 심정은 복잡하기만 한데, 그와의 접촉은 언제나 감각을 선명하게 만든다. 짜증스러움과 혼란까지도 말이다.

“나는 사람을 달래는 재주가 없어.”

“?!”

린델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노력했다는 건 알아. 용감했다는 것도. 그리고 그게 너의 최선이었다는 것 또한.”

“……네.”

“내가 너의 상관이라면 잘했노라 치하했을 거야. 결과가 좋았으니까. 하지만 때론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해. 위험에 처한 애인에게 무모한 용기를 바라지 않아. 진짜 심장이 멈춰버리는 줄 알았어.”

“매번 명령이라고 하시잖아요.”

카시어스의 솔직한 고백에 조금은 마음이 펴진 린델은 작게 속삭였다. 매번 명령이라고 하는 사람이 누군데 치하를 안 해주냐는 소심한 항의였다.

“잘했다고 하지 않을 거야. 너 때문에 너무 놀랐어.”

카시어스는 치하를 하는 대신에 자유로운 손을 뻗어 린델의 머리를 살짝 흩트려 놓을 만큼 쓸어 넘겨주었다. 그리고 간지러운 듯 목을 움츠리는 린델을 넉넉하게 끌어안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