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품 안의 녀석은 따뜻했다. 살아 있었다.
“다음부터 그러지 않겠다고 해. 날 위해서라도 말이야.”
“언제나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드릴게요.”
“그것으론 안 돼.”
“폐하.”
린델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카시어스는 린델이 굴복하지도 납득하지도 않을 것임을 알았다. 이건 자신이 져야 하는 싸움이었다.
카시어스는 입술을 올리며 웃었다. 자신은 신의 대리자이며, 열한 개의 강과 일곱 산맥을 지배하는 황제였다. 명령 하나로 수천, 수만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작은 나라 하나쯤이야 박살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어여쁜 애인을 이길 수 없다.
“내게서 항복을 받아낸 이는 너밖에 없어.”
“영광입니다.”
“말은 잘하지. 갑옷이 만능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주지하도록 해.”
“네.”
결국 린델을 꺾지 못한 카시어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착하고 순종적인 녀석이었다. 불합리하다 싶은 명령도 싫다는 소리 제대로 한 적 없이 열심히 따랐다. 그런데 이상한 곳에서 고집이 셌다.
가진 것을 누리고 편히 지내라고 해도 부지런히 움직여서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만들고 싶어 했다. 애인을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고 독점하겠다고 선언한 주제에 약혼자의 권리를 존중하겠다며 고백을 하지 않았다. 위험한 순간에 목숨을 우선하기보다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한다.
선함과 부지런함은 린델의 천성이었고, 그건 명령 한 번으로 바뀔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린델이 충성스러운 부하처럼 맹목적이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의 뜻대로 따라주지 않으니 그건 또 속상했다. 갈팡질팡하는 마음이 감미롭고도 아픈 것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널 어떻게 해야 할까.”
린델을 끌어안은 카시어스는 한탄처럼 중얼거렸다. 그러자 어깨에 기대어 있던 린델이 어깨를 떨며 웃었다.
“전에도 같은 말을 하신 적이 있어요.”
“그래?”
“차원의 틈이 있던 동굴에서요.”
“아아. 그랬었지.”
그때가 어떤 순간인지 기억났다. 완벽한 순간을 기뻐하며 린델에게 매료되었었다. 사랑스러운 녀석을 끌어안고 입술을 대고 싶어서 안달이 났기도 했다. 고민하지 말고 뜻대로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네가 너무 예뻐 보여서 어떻게 해냐 하나 싶었지.”
“어……. 지금은요?”
“착하고 예쁘고, 말도 안 듣는 애인을 어디에 가둬야 할까 생각했어.”
“가둬요? 저를요?”
“응. 커다란 황금 새장 같은 거에, 안전하게 말이야.”
“제가 들어갈 새장이라면 정말 커야겠네요.”
린델은 농담으로 받아들인 듯 가볍게 웃었지만 카시어스는 아니었다. 새장이 아니라 무거운 영광을 족쇄로 채워줄 계획을 세워두었다. 그래도 오늘 같은 날이면 린델을 안전한 곳에 가두어두는 상상을 멈출 수가 없다.
“큰일이지.”
적당히 대꾸한 카시어스는 끌어안고 있던 린델의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그러자 린델이 화들짝 놀라 얼굴을 옆으로 피했다.
“왜?”
“안 그러시기로 하셨잖아요.”
“그건 아니지. 정확하게는 유혹하겠다고 했어.”
카시어스는 린델의 말을 정정하며, 그의 귀를 핥았다.
“폐하.”
린델이 그의 품 안에서 부르르 떨면서 작게 외쳤다. 깜찍한 반응이었다. 린델을 안은 지 딱 10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러나 힘을 주고 버티는 녀석을 꺾을 수도 밀어붙일 수도 없었다. 유혹을 하면 넘어오기는 하겠지만 그랬다간 제대로 미움을 받을 터였다. 미래를 위해 10일을 더 참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다.
속으로 한숨을 삼킨 카시어스는 그대로 린델의 뺨과 콧날에 입술을 대고는 침대 위로 넘어졌다. 끌어안은 팔은 풀지 않았다. 그러자 힘을 주며 벗어나려던 린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카시어스는 다정히 린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아무것도 안 해. 이대로 자자.”
“이대로요?”
“왜? 키스하고 싶어? 그것 말고 딴 것은 어때?”
“아니요. 지금이 좋아요.”
린델은 재빨리 대답했다. 카시어스가 작정하고 덤벼들면 자신은 꼼짝할 수가 없다.
“내가 정말 많이 참는다.”
한숨처럼 투덜거린 카시어스의 손이 린델의 옆구리를 슬쩍 쓸었다. 요상한 감각에 린델은 흠칫 떨었다.
“참으신다면서요.”
“이제 네가 내 애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 그런데도 끌어안고 자는 게 다라니. 이게 무슨 청승이야.”
청승이라고 하면서도 카시어스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웃고 있는 게 분명했다.
린델도 자신이 꽉 막혔다고 생각했다. 이미 한 침대에 누운 상태에서 도리를 운운하는 것도 웃겼다. 그러나 카시어스가 투덜거리면서도 부탁을 들어준다는 사실이 좋았다. 키스하자고 유혹하는 게 아니라 빈틈없이 끌어안아 주는 게 기뻤다.
높은 곳에서 만인을 굽어보시는 철혈의 황제께서는 다정하고 상냥한 애인이었다.
세상에 좋은 사람은 많이 있었다. 살면서 도움도 많이 받았다. 그래도 이렇게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줄은 몰랐다. 부푼 마음은 한없이 커져서 감당하기가 힘들어졌다.
린델은 카시어스의 등에 팔을 둘러 꽉 힘을 주어 안았다.
“나중에 말할게요.”
“뭘 말할 건데?”
카시어스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는 거의 입술만 달싹거렸는데도 들린 모양이었다. 사실 알아듣기를 바라긴 했다. 린델은 솔직히 말했다.
“고백이요.”
“지금 해.”
“때와 장소가 좋지 못하잖아요.”
“흥. 얼마나 멋지고 대단한 고백을 하는지 기대하지.”
코웃음을 친 카시어스가 팔에 힘을 주며 바싹 당겨 안았다. 린델은 기분 좋게 웃었다. 기대한다고 해도 별것 없었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연모한다.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카시어스라면 기뻐해 줄 것이다.
마음이 진정되자 카시어스에게 해야 할 말들이 우르르 떠올랐다. 황태후가 씨디프 공작을 소개시켜 준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암살의 위협을 받는 카시어스가 걱정스러웠다. 두 배로 갚아주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건 모두 기분 좋은 고요함에 어울리지 않는 주제들이었다.
린델은 내일을 기약하며 카시어스의 품 안으로 조금 더 파고들었다. 그에게 안겨 잠드는 것은 이제 익숙해졌다. 어린 시절에도 작은 방에서 혼자 자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의 온기와 심장 소리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았다.
달콤한 안온함에 린델은 기분 좋게 잠을 청했다.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인 린델은 백합을 들고 계신 하르멜라 여신의 천장화를 보며 이곳이 어디인지 떠올렸다.
황제의 침실에서 잤었지.
린델은 한 번 더 눈을 감았다 뜨고는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카시어스가 이쪽으로 돌아누워 있었다. 그의 팔은 자신의 허리를 단단히 감은 채였다.
카시어스가 잠든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린델은 조금 신기한 기분이었다. 기상 의식 때문에 카시어스는 언제나 자신보다 일찍 일어났다. 어떤 때는 아무 기척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지금껏 별생각이 없었는데, 눈을 감은 채 무방비하게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이상했다.
가장 힘이 넘치는 황금색 눈동자가 사라지자 순한 느낌이었다. 무서운 늑대를, 아름다운 천사를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저 조각을 깎아놓은 듯 잘생긴 남자였다.
린델은 카시어스의 이마에 흘러내린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싶은 것을 참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의 침실에는 커다란 벽난로 위에 황금색 탁상시계가 자리하고 있었다. 시계 바늘은 5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났다. 6시가 되면 승마를 배우러 가는 것이 첫 스케줄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공작 저택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야 할 듯싶었다.
주변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린델은 자신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있는 카시어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를 깨워서 가야 한다고 말을 해야 할지, 그냥 가야 할지 망설여졌다. 아무래도 전자가 맞을 것 같긴 한데 주무시고 있는 황제 폐하를 깨우기가 왠지 좀 그랬다.
“혹시…… 깨셨어요?”
카시어스는 사람의 기척에 민감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린델은 최대한 작은 소리로 조용히 물었다. 그러나 카시어스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잠깐 고민을 하던 린델은 슬쩍 몸을 뒤로 물리며 침대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아무래도 옷을 챙겨 입고 미리 준비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움직이는데 카시어스의 팔을 벗어나기도 전에, 그가 힘을 주며 잡아 당겼다.
“이렇게 일찍 어디를 가려고?”
“저 때문에 깨셨어요?”
린델은 설마 싶은 마음에 다급히 물었다. 카시어스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팔에만 힘을 주고 있었다.
“네가 일어날 때부터 깼어.”
“그럼 아까는……?”
“네가 뭘 하려는지 보려고. 더 자.”
“돌아가야죠.”
“저택에 뭘 숨겨둔 거야? 왜 자꾸 거기에 갈 생각만 해?”
장난스러운 질문에 린델은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엄청 근엄하게 연설을 하시기도 하고, 독설에 가까운 추궁을 하며 신하들을 쥐어짜기도 했다. 그러나 린델이 아는 카시어스 경께서는 꽤나 자유롭고도 무방비하게 시시한 농담을 던졌다. 린델은 적당히 운율에 맞춰 대꾸했다.
“꿀단지가 묻혀 있을지도요.”
“여기에도 꿀은 있어. 얼른 누워. 10분만 더 자자.”
다 큰 어른의 잠투정에 린델은 결국 자리에 누웠다. 그러자 카시어스가 바짝 끌어당겨 안았다.
“많이 피곤하신 건가요? 얼마 못 주무셨잖아요.”
“설마. 일찍 깬 김에 애인이랑 게으름을 부리는 거야.”
“더 주무세요. 기상 의식까지는 한참 남았어요.”
카시어스의 수면 시간은 겨우 3시간이 조금 넘었다. 기상 의식까지 더 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10분만 있다가 말을 타러 가자.”
“말이요? 저 때문이라면 안 그러셔도 돼요. 폐하께서 조금 더 주무시는 게 나아요.”
“말을 타고 난 후에는 같이 아침을 먹고. 같이 아침을 먹은 적이 없잖아.”
생각해 보니 그랬다. 같이 마차를 타고 이동을 하긴 했어도 나란히 말을 달린 적은 없었다. 아침 식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린델은 카시어스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아챘다. 자신도 기꺼이 그러고 싶었다.
“저도 좋아요.”
“그다음에는 널 좀 가둬야겠어.”
“……네?”
뜻밖의 말에 린델은 어리둥절했다.
가둬야겠다니?
어젯밤 이야기의 연장인가 싶은데 카시어스가 큰 손으로 뒷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왔다.
“좋은 곳이 생각났거든.”
“?”
이번에도 뜻을 알 수 없었다. 린델은 카시어스의 품에 안긴 채 눈만 깜빡거렸다. 머리를 쓰다듬는 카시어스의 손길은 하염없이 부드러웠지만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