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초가을의 변덕스러운 바람이 정원을 휘저었다.
돌풍이 불 때마다 나뭇잎들이 부대끼며 샤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하얀 장미 꽃잎 하나가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하늘하늘 춤을 추던 꽃잎이 안착한 곳은 글자가 빼곡히 적힌 책 위였다.
테라스에 앉아 느긋하게 책을 읽고 있던 린델은 난데없는 훼방꾼의 등장에 고개를 들었다. 2층 테라스에서는 정원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낯설고도 아름다운 장미 정원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할엔라드 제국은 장미를 사랑했다. 주신이자 운명을 관장하는 신인 젯타스의 상징이 장미였다. 귀족은 물론이고 신전과 일반 가정집에서도 너 나 할 것 없이 정원과 화분에 장미를 심었다.
여기도 마찬가지였다. 특이한 점은 정원의 장미가 모두 흰색이라는 점이었다. 이곳이 백장미 궁이라고 불리는 이유였다.
할엔라드 제국의 황궁인 라드라비그에는 수많은 건물과 정원, 정자, 분수, 석상, 계단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제각각의 아름다움과 역사적 사연을 품고 있는 건축물들 중에서 백장미 궁은 조금 더 특별했다. 구조적으로 보자면 황궁 건물 중에 유일하게 높은 담벼락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리고 백장미 궁의 진정한 가치는 이곳이 바로 황제의 비밀스러운 별저라는 점이었다.
역대 황제들이 휴식을 가장하여 태업을 하거나, 특별한 파티를 열거나, 비밀스러운 회의를 하는 장소로 쓰였다.
이드나카가 말하길 당금의 황제께서는 백장미 궁을 그다지 애용하지 않으신다고 했다. 또한 제국의 역사상 백장미 궁에서 침식을 허락받은 이는 린델을 포함해 단 셋뿐이라며 대단한 영광이라고도 말했다.
처음 백장미 궁을 둘러보던 린델은 이드나카의 설명을 정정해 주고 싶었다. 이건 영광이 아니라 감금이었다.
“음. 감금은 아니지.”
린델은 일부러 소리를 내서 자신의 생각도 정정했다. 정확히는 감금은 아니었다. 황제의 명령으로 자신은 궁 밖으로 나갈 수 없었지만, 밖에서 손님이 방문하는 것은 허락되었다. 그래서 평소와 같은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연금과 유폐, 그리고 과보호 사이의 어디쯤이었다.
불편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백장미 궁전이 낯설고 어색한 것만 제외하면 공작 저택에서 지내던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애쉰 부인은 물론이고 린델의 시중을 들어주던 시녀와 시종이 모두 함께 있었다.
린델의 불만은 딱 하나뿐이었다. 황제의 침실에서 깬 그날 이후 지난 7일 동안 카시어스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자신은 밖에 나가지를 못하고 카시어스는 찾아오지를 않았으니 당연했다.
“너무하시잖아요.”
린델은 저 멀리 보이는 정궁을 향해 중얼거렸다.
거의 매일 같이 만났다. 사흘에 한 번, 혹은 나흘에 한 번씩 입궁해 황제를 배행했다. 그리고 카시어스 역시 해가 질 때쯤 찾아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이제는 같은 황궁에 있는데도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세투아의 말에 의하면 요즘 황궁은 뒤숭숭하다고 했다. 올텐 소백작이 암살자라는 것은 아직 공표되진 않았지만 조금씩 이야기가 퍼지고 있는 중이랬다. 동시에 전례 없는 내사에 궁내청과 근위대가 바짝 얼어붙었다고 했다.
세투아는 노골적으로 카시어스가 린델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백장미 궁으로 거처를 옮기게 한 것이라고 했다. 린델도 그런 이유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시어스 본인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지 못한 데다 얼굴도 보지 못하고 있으니 기분이 좀 그랬다.
그립다 못해 좀 미워지려고 했다.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복잡한 감정에 흔들린다. 심장이 뛰면서 차갑게 시렸다. 사랑에 빠지면 심장이 내 것이 아니라는 말을 이제야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
“린델 님.”
시큰거리는 심장을 손으로 누르고 있는데, 어느새 다가온 이드나카가 옆에서 불렀다. 린델이 백장미 궁으로 거처를 옮긴 후에, 카시어스가 보낸 선물은 모두 그가 가지고 왔다.
카시어스는 정오가 되면 매일같이 꽃을 한 아름 보냈다. 첫 날은 장미였고, 둘째 날은 백합이었다. 그리고 셋째 날은 다시 장미, 그리고 다음은 튤립이었다. 꽃과 함께 카시어스가 직접 손으로 쓴 소네트도 도착했다. 소네트는 아주 달콤하고 아름다웠다. 린델은 감사의 답장을 보내면서 부디 넓으신 아량으로 외출을 허락해 달라고 격식에 맞춰 아주 정중하게 부탁했다.
그러나 황제가 적어 보낸 것은 단 하나의 단어였다.
안 돼.
오늘까지 총 세 번의 부탁을 매번 같은 단어로 모두 거절당한 린델은 약이 오를 대로 올랐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이드나카에게 편지를 한 번 더 들려 보냈다. 카시어스가 과연 어떤 대답을 할지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폐하께서 보내셨습니다.”
다행히 이드나카가 편지를 내밀었다. 카시어스가 좋아하는 푸른색 봉투에 황제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린델은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받아 든 편지를 그 자리에서 펼쳤다. 자신이 적어 보낸 바람은 짧았다. 그리고 카시어스의 대답도 역시나 짧았다.
보고 싶어요.
나도.
멋지고 유려한 문장으로 아름다운 소네트를 적어 보내신 분께서 성의 없이 짧은 단어만 달랑 적었다. 편지지를 쥔 린델은 손을 떨었다. 무어라 한 마디 해주고 싶은데 그럴 방도가 없었다. 놀림을 당하는 것 같은데, 그런데도 괜히 웃음이 나왔다.
울지도 웃지도 못한 린델은 편지지를 접어 봉투에 집어넣으면서 이드나카를 보았다.
“죄송한데, 한 번만 더 수고해 주세요.”
“예. 그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얼른 적어 올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린델이 테라스에서 서재 안쪽으로 다급히 걸어갔다. 이드나카는 린델이 서탁 앞에서 편지지에 글을 적는 것을 지켜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황제의 명령으로 린델을 따라다닌 이드나카는 두 사람의 관계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황제의 피후견인으로 소개받았던 청년은, 이제 황제의 애인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두 사람은 주위에 보란 듯이 아주 요란하게 연애를 하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전령이 된 이드나카가 속이 다 간지러울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피도 눈물도 없는 철혈이라고 평해지는 황제께서 사랑에 빠진 사내의 행동을 모두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꽃을 보내고, 사랑의 소네트를 쓰고, 값비싼 선물을 안겼다. 평소 황제에게 쥐어짜인 고관들은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동시에 강도 높은 내사가 진행되면서 여전하시다고 욕을 삼켰다.
황제의 연애는 모두의 관심거리였다. 특히 해사한 미모의 청년이 후궁이 될 거라고 다들 입을 모아 말했다. 황제는 황궁의 아무 건물이 아니라 백장미 궁에 애인을 머물게 했다. 그건 아주 명확한 신호였다. 별도 달도 따다 줄 것처럼 굴고 있는 황제가 청년에게 작위를 하사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떠들어댔다.
덕분에 린델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린델에게 줄을 대려고 이드나카에게까지 뇌물이 흘러들어 올 정도였다.
황제는 이드나카를 불러 특별히 경고에 가까운 당부를 했다. 균형 잡힌 처신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그리고 믿고 맡긴다고까지 했으니 영광이었다. 이드나카는 황제가 직접 골라 쓸 만큼 현명하고 유능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뇌물 덕분에 주머니가 두둑해지는 것은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린델이 편지를 들고 다가왔다.
“다 됐어요. 가능하면 답장을 꼭 받아와 주세요.”
“네. 폐하께서는 웃으시면서 답장을 적어주실 겁니다.”
편지를 받아 든 이드나카는 웃으면서 정중하게 대답했다. 린델의 두 번째 편지를 받아 든 황제께서는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아주 흥겹게 답장을 적었다.
당시 황제의 질책을 듣고 있던 재무성 장관이 체면을 잊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을 정도였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 린델은 아주 애매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웃으시면서 답장을 적으셨다고요?”
“네.”
“저는……. 음, 아니요. 괜찮아요.”
“계속 정문을 바라보고 계셨노라고 전하겠습니다.”
연애에도 기술이 필요한 법이었다. 소싯적에 연애 경험이 풍부한 이드나카에게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백장미 궁에서 출입이 가능한 곳은 정문뿐이었다. 그건 황제를 기다리고 있다는 간접적인 증언이었다.
믿음직스럽게 웃고 있는 이드나카가 무엇을 하려는지 이해한 린델은 따라 웃고 말았다.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 숨기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부탁드릴게요.”
“맡겨만 주십시오.”
이드나카가 절을 하고 서재를 나섰다. 그가 사라지자 이번에는 애쉰 부인이 나타났다. 선물이 잔뜩 도착했다는 말에 그녀를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황금색으로 꾸며진 화사한 응접실에는 애쉰 부인의 말대로 값비싸 보이는 다양한 크기의 선물 상자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린델이 백장미 궁에 기거하게 되자마자 선물들이 쏟아졌다. 그리고 애쉰 부인의 지도에 따라 선물을 보낸 사람들의 이름과 내용물을 확인하게 되었다. 애쉰 부인은 이런 선물은 돌려보내지 않는 것이 규칙이라고 말했다. 다만 아주 특별히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라면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게 좋다는 충고도 했다. 선물 받은 것을 사용하는 것은 그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신호라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값비싼 선물들은 목록을 작성한 후에 창고로 직행했다.
선물 상자를 여는 것은 애쉰 부인이 맡았다. 목록을 작성하는 것은 나이 지긋한 시종의 몫이었다.
다이아몬드로 만든 백합 모양의 브로치, 사파이어로 된 목걸이, 그리고 각종 반지와 장신구들이 줄을 이었다. 모두 훌륭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린델은 반짝이는 보석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심드렁히 장신구를 확인하던 린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따로 있었다.
“상아랑 은으로 된 머리빗입니다. 손거울까지 같이 있네요. 귀부인들이 쓸 법한 것이죠.”
신분 높은 귀부인이 애용하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빗이었지만 애쉰 부인은 살짝 얼굴을 굳혔다. 사내에게 여인이 쓸 법한 물건을 선물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특히 황제의 애인인 린델의 위치를 생각하면 이건 일종의 놀림이자 모욕이었다.
애쉰 부인은 재빨리 보낸 이의 이름을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반황제 파라고 알려진 모 백작 부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애쉰 부인은 혀를 찼다.
귀족의 딸로 태어나 황자의 젖유모로 황궁 생활을 했던 그녀는 값비싼 선물의 의미가 뇌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딱히 대가를 바라지 않는, 황제의 애인에게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게 하고 싶어 하는 이들의 발버둥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끔 이렇게 사람의 속을 긁으려는 방법으로도 쓰였다. 값비싸고 훌륭한 선물이니 흠이 되지는 않지만, 받는 사람만 기분이 상할 수 있게 말이다. 그나마 린델이 이런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빗이 든 상자를 안 보이는 곳으로 치우려고 하는데 린델이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그것 좀 자세히 볼게요.”
“이게 마음에 드세요?”
지금껏 심드렁하기만 하던 린델이 빗을 보고 싶다며 손을 내밀었다. 애쉰 부인은 의아한 기분으로 빗을 내밀었다.
“예. 아주 예뻐요. 이런 건 어디서 구입하죠?”
“소품 상인을 불러 주문하면 됩니다. 상인을 부를까요?”
린델이 물건에 관심을 보이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린델이 걸치고 있는 의복과 장신구는 모두 애쉰 부인의 취향에 맞춘 결과물이었다. 린델은 취향도 물건을 고르는 안목도 괜찮았지만, 결정적으로 욕심이 없었다. 주어진 것에 만족할 뿐 더 가지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빗을 들고 요모조모 따지는 지금의 반응이 아주 신선했다.
애쉰 부인은 반색을 하며 상인을 부르길 권했다. 그러나 린델은 쉬이 그러라고 하지 못하고 애매하게 얼버무렸다.
“음, 비싸겠죠?”
“폐하께서 주신 용돈이 잔뜩 남아 있습니다. 린델 님께서 하나도 안 쓰셨지요.”
린델의 의식주는 후견인인 카시어스가 모두 책임지고 있었다. 용돈도 주었지만 쓸 곳이 없어서 거의 다 남아 있었다. 린델도 그걸 알았지만 그래서 더욱 망설여졌다.
상아와 은으로 된 빗을 보자마자 카시어스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