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137)

-76화-

아름다운 빗으로 그의 머리를 빗으면 어울릴 것 같아서, 선물을 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런데 선물을 카시어스가 준 용돈으로 하게 생겼다.

잠시 고민하던 린델은 곧 마음을 정했다. 쓰라고 받은 용돈이니 카시어스에게 선물로 되돌려 준다고 여기기로 했다. 무엇보다 정말로 이렇게 예쁜 빗을 카시어스에게 주고 싶었다. 그가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상인을 부르죠.”

“이 빗이 무척 마음에 드셨나 봐요?”

“음. 선물을 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어느 분께요? 미리 말씀드리는데, 선물을 받으시는 숙녀분께서는 폐하의 질투에 곤란해지실지도 몰라요. 신중하셔야 해요.”

백합이 섬세하게 세공되어 있는 빗을 들여다보고 있던 애쉰 부인의 말도 안 되는 오해에 웃고 말았다. 선물을 받을 사람이 카시어스인데, 그가 자기 자신을 질투하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문제없어요. 폐하께서는 그러실 수 없을 겁니다.”

“어째서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자기 자신을 질투할 수는 없잖아요.”

“어머나, 폐하께 선물하시려고요?”

“괜찮겠죠? 어, 음. 더 좋은 것을 가지고 계실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폐하와 어울릴 것 같은데. 빗은 좀 그런가요?”

생각해 보니 너무 충동적이었다. 카시어스가 선물을 받고 기뻐했으면 좋겠는데, 만약에 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낭패였다.

“린델 님의 선물이라면 폐하께서는 다 좋아하실 거예요. 특히 예쁜 빗이라면 더욱이요.”

“다행이네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연인 사이에 빗을 선물하면 상대의 머리를 빗고 싶다는 의미랍니다. 네, 맞아요. 아주 로맨틱하죠.”

“어…….”

안도하던 린델은 애쉰 부인의 설명에 빗을 든 채로 굳었다. 그런 의미가 있는 줄 몰랐다.

“그러니까 좋아하실 거예요.”

애쉰 부인이 의미심장하게 말했고, 덕분에 린델은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조금 부끄럽긴 한데 그래도 카시어스의 머리를 빗어준다고 상상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간지러운 욕심에 린델은 그냥 고개만 끄덕거렸다.

린델의 순진한 반응에 애쉰 부인은 빗을 선물하는 또 다른 의미가 청혼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약지에 자리한 반지가 결혼을 상징하는 것처럼, 아무리 세월이 바뀌어도 숙녀의 머리를 빗어줄 사내는 남편뿐이었다. 신랑이 신부에게 줄 결혼 예물 중에 빗이 꼭 들어가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아주아주 예쁜 빗을 주문하셔야겠어요.”

“네.”

애쉰 부인이 가볍게 놀리자 린델은 조금 더 빨갛게 변한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풋풋하고 화사한 감정에 애쉰 부인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연애는 이렇게 하는 법이다. 황제처럼 귀애하는 애인을 어디 가지 못하게 가둬두는 게 아니라 말이다.

습격이 있었다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황제의 과보호는 너무 심했다. 다행히 린델이 큰 불만이 없어서 그렇지, 아니었으면 크게 싸움이 났어도 날 법한 일이었다. 거기에다 얼굴은 보여주지도 않은 채 꽃만 보내는 것도 연애의 기술치고는 과했다.

애쉰 부인은 황제께 차라도 한잔 마시고 가시라고 강하게 말씀을 드려야겠다고 마음먹으면서 다시 선물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목록 작성이 완성되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시종이 나타나 제라르가 찾아왔다고 알려왔다.

2시였다. 이틀에 한 번씩 있는 검술 연습 시간. 린델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애쉰 부인도 자연스럽게 뒤를 따랐다.

린델과 제라르가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을 매서운 눈빛으로 지켜본 애쉰 부인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녀는 제라르를 린델의 친구로 삼은 황제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린델을 바라보는 제라르의 눈빛은 열렬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감정에는 둔한 데다가 황제를 향한 사랑에 빠져 있는 린델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들떠 있는 게 확연했다. 자고로 라이벌이란 멀찍이 떨어트려 놓아야 하는 법인데, 황제께서는 너무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애쉰 부인은 극성스러운 보호자였다. 그리고 황제의 최측근이기도 했다. 그녀는 린델이 제라르와 춤 연습을 한 것에 대해 황제의 투덜거림을 잔뜩 들었다. 그 이후 절대 두 사람만 한 공간에 두지 않았다. 애쉰 부인은 린델과 제라르가 대련장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을 확인한 후, 시종을 딸려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타타탕. 타앙. 탕. 탕.

말을 탄 기사들의 손에 들린 소총이 불을 내뿜었다. 수십 발의 일제 사격으로 과녁이 된 통나무에 무수한 총알구멍이 생겼다. 뒤이어 예비 소총에서 다시 총알이 발사되었다. 두 번의 일제 사격 후, 흑색 화약의 포연을 가르고 기사들이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들의 손에는 소총이 아니라 칼이 들려 있었다. 1열 횡대로 늘어서 달리던 기사들은 칼을 휘둘러 과녁이었던 통나무를 정확하게 두 동강 냈다.

근위기사단의 대규모 훈련 현황을 지켜보게 된 루터 왕세자는 감탄을 거듭했다. 그 역시 뛰어난 기사였다. 그리고 한 나라의 후계자이기도 했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기사단의 무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피부로 느끼고 머리로 계산할 수 있었다.

통나무를 두 동강 내는 기사의 수가 어림잡아 300명이 넘었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완벽하게 무장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말도, 칼도, 소총도 모두 비쌌다. 특히 화약은 돈이 있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화약의 주요 재료인 초석은 할엔라드 제국과 시아무크 제국에서만 났다. 시아무크 제국이 공공의 적국인 상황에서 화약은 돈이 아니라 외교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귀중품이었다.

루터 왕세자는 제국의 강력한 힘이 두렵고도 부러웠다.

“전체 훈련은 오랜만이라서 다들 기합이 들어갔어. 그렇게 보이지 않나?”

“예. 그렇습니다, 폐하.”

루터 왕세자는 열심히 말을 달리는 기사 무리에서 눈을 돌려 옆에 앉은 황제를 바라보았다. 훈련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단상 위에 차양을 치고 관전을 하고 있는 황제는 더없이 아름다웠고, 오만해 보였다.

“짐이 왜 그대를 이곳에 불렀는지 아는가?”

얼음을 띄운 차가운 샹그리아를 마신 황제가 기사단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걸었다. 루터 왕세자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란디스 메디스의 사절단으로 제국의 수도인 닐르에 도착한 것이 어제였다. 9일간의 여독을 풀기도 전에 황제의 부름을 받았다. 근위시종이 안내한 곳은 알현장도, 사실도 아닌 황궁 북쪽 끝에 위치한 훈련장이었다.

날씨는 지독하게 맑았고 볼거리는 풍부했다. 그리고 황제가 자신을 부른 이유도 대충 짐작이 갔다. 하지만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라면 그대에게 과격한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미심장하기 짝이 없는 암시였다. 그래서 루터 왕세자는 마른침을 삼켰다.

“폐하의 심중을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대의 부친도 짐의 옆에 앉았었군. 그리고 온건한 방법으로 약혼을 파기했지. 위약금이 제법 비쌌어.”

황제는 여전히 루터 왕세자를 보지 않았다. 그사이 다시 전열을 정비한 기사단들이 총을 쏘고 통나무를 향해 달려갔다. 시끄러움이 가라앉는 것을 기다려 황제가 입을 열었다.

“짐은 매우 불쾌해. 대법전의 허점을 언제 알았는지는 묻지 않겠지만, 그게 외교적 결례라는 것을 몰랐다고 할 텐가?”

“폐하.”

“짐은 위약금을 두 번 지불할 생각이 없다.”

카시어스는 돌려 말하지 않았다. 루터 왕세자의 야심은 그럴듯했다. 여동생을 황후로 만들거나, 비싼 몸값을 받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나라 간의 거래는 그렇게 하는 법이 아니다. 특히 테누안이 제국의 속국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일을 키우기 전에 좀 더 솔직해야 했다.

“그렇다면 결혼밖에 없습니다, 폐하.”

“그럴 리가. 방법이야 수없이 많이 있지.”

“어떤 방법 말입니까?”

루터 왕세자는 도전적으로 물었고, 카시어스는 그제야 그를 바라보았다. 올해로 서른두 살의 왕세자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똑똑한 야심가인 그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욕심과 미련에 어리석어졌다.

“그대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파괴적인 것이 그중 하나겠지. 감히 그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짐은 할 수 있다.”

평이한 목소리였다. 구체적인 위협도 없었다. 하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확언은 루터 왕세자를 입 다물게 만들었다.

“짐이 돌파구를 마련해 주겠다. 3일 내에 리세나 공주의 약혼을 공표해라. 그녀가 새로이 약혼을 하게 되면, 짐과의 약혼은 자연히 폐기될 테니까.”

“그것이야말로 결례입니다, 폐하.”

“시간 내에 공표한다면 운하 통행권을 갱신하도록 하지. 그러나 하루라도 시일을 넘길 시에는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겠다.”

카시어스는 파혼의 대가로 통행권 이상의 것을 줄 생각이 없었다. 루터 왕세자가 현명하게 굴었다면 좀 더 많은 것을 챙겨주었겠지만 이 경우에는 아니었다.

힘의 우위는 명확했다. 그것도 압도적이었다. 루터 왕세자는 자신이 처음부터 지는 싸움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황제가 이렇게나 강경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대법전의 허점을 알아낸 것은 재작년 가을의 일이었다. 열아홉이 된 여동생을 옆 나라의 왕세자에게 시집보내려는 계획을 엎은 것도 그때였다. 황제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받아내려고 2년을 기다렸다.

할 수 있다는 황제의 말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테누안은 할엔라드에 많은 것이 종속되어 있었다. 사치품, 밀, 화약 등등. 할엔라드가 당장에 밀의 수출을 막아버린다면 테누안에서는 아사자가 속출할 터였다.

무엇보다 황제가 말한 가장 폭력적인 방법이라면 전쟁밖에 없었다. 근위기사단의 대규모 훈련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상황에서 전쟁이라는 단어는 현실적인 위협이었다.

루터 왕세자는 속이 탔다. 억울했다. 하지만 힘의 논리는 잔인한 법이다. 질 수밖에 없으니 굽혀야 했다.

“3일은 너무 촉박합니다, 폐하. 본국에 돌아가서 적당한 신랑감을 물색하려면 적어도 2개월은 필요하니 부디 시간을 더 주십시오.”

“짐의 배려는 여기까지다, 루터 왕세자.”

황제의 권고는 차가웠다. 결국 항복한 루터 왕세자는 무기력하게 인사하고는 떠났다. 혼자가 된 카시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시종이 다가와 빈 잔에 샹그리아를 채워주었다.

그때 마침 카시어스의 눈에 이드나카가 대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린델에게 답장을 주러 간 그는 백장미 궁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즉 그가 여기에 있는 것은 린델이 또다시 편지를 보냈다는 뜻이었다. 카시어스는 손짓으로 이드나카를 불렀다. 아니나 다를까 이드나카는 린델의 인장이 찍힌 편지를 조용히 내밀었다.

카시어스는 지체 없이 편지를 뜯었다. 내용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간단했다.

제가 갈 수 없으니,

만나러 와주세요.

간단하고 직접적인 요청이었다. 글자 하나하나는 린델을 닮아 무척이나 유려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의 불편한 심기를 반영하듯이 꾹꾹 눌러쓴 게 보였다. 힘주어 눌러 찍은 마침표의 잉크가 진하게 번져 있었다. 이것을 쓸 때 린델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지 상상이 가서 불현듯이 웃음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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