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137)

-77화-

이드나카가 애매한 시선을 보내왔지만 카시어스는 개의치 않았다. 물고 빨고 해도 시원찮을 애인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애인을 만나고도 물고 빨지 못한다는 것은 끔찍했다.

그래서 카시어스는 극단적인 방법을 취했다. 황궁의 소란스러움으로부터 린델을 보호하고, 자신이 얼마나 린델을 아끼는지도 과시하고, 또한 린델의 미움을 받지 않게, 그를 크고 넓은 백장미 궁에 가둬두었다.

오늘로 7일째. 린델을 백장미 궁에 둔 것은 성공적이었다. 특히 린델이 직접 손으로 쓴 편지가 최고의 성과였다.

열렬한 연애 중에, 연애를 하고 있다는 자각을 하는 것은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다. 손과 발이, 그리고 심장까지 간지러워진다. 육체적인 갈급함과 별개로 정신적인 만족이 더 컸다.

그래서 더욱 보고 싶어졌다. 분명 기쁘게 웃으며 반겨줄 터였다. 선이 고운 얼굴을 떠올리는 것은 손쉬웠다. 잡은 손의 부드러움을, 품에 안았을 때의 느낌 역시 마찬가지였다. 목덜미에서 맡을 수 있는 향기와 온기까지 마치 곁에 있는 것처럼 선명했다. 얼굴을 보고,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끌어안을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중증이었다.

카시어스는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며 이드나카를 보았다.

“특이한 점은 없고?”

“2층 테라스에서 계속 정문을 보고 계셨습니다.”

이드나카는 린델과 약속한 말을 건넸다. 그리고 그건 카시어스를 퍽 만족시켜 주었다.

“기다리고 있나 보군.”

“예.”

카시어스는 린델의 편지를 접어 넣으며 시종장을 불렀다. 멀찍이 대기하고 있던 시종장은 눈치 빠르게 문필 도구가 담긴 상자를 황제 앞에 대령했다. 카시어스는 짧게 쓴 답장을 이드나카의 손에 쥐어주었다.

“답장을 꼭 받아 오도록.”

“알겠습니다.”

“좀 더 고생해야겠다, 이드나카.”

“영광입니다.”

계속 편지 심부름꾼을 하게 될 거라는 카시어스의 언질에 이드나카는 정중하게 웃었다. 황제의 편지를, 그것도 애인과 주고받는 편지를 배달하는 것은 신뢰의 증거였다. 근위시종으로 환영할 심부름이었다.

이드나카가 떠나고 카시어스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아직 만날 사람이 한 명 더 남아 있었기에 그는 자리를 지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근위시종이 장년의 사내를 데리고 나타났다.

한때는 검었을 머리가 회색으로 변한 장년의 사내는 동부의 대제후인 파슨 공작이었다. 그 역시 그란디스 메시스에 맞춰 닐르에 도착한 것이 그제였다.

“신의 축복을 받은 위대한 불꽃의 지배자이시며, 열하나의 강과 일곱 산맥의 군주이시며, 법과 정의의 수호자이신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빛나는 영광이 무궁하기를 기원합니다.”

“일어나라. 파슨 공작.”

“황공하옵니다.”

무릎을 꿇고 절을 한 파슨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시어스는 조금 전까지 루터 왕세자가 앉아 있던 의자를 권했다. 파슨 공작이 자리에 앉자 아까와 같은 상황이 똑같이 반복되었다.

카시어스는 샹그리아를 마시며 침묵했고, 파슨 공작은 근위기사단의 훈련 광경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이제 근위기사단은 기동 훈련을 하고 있었다. 군에 총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기사의 의미가 과거에 비해 퇴색되었다. 하지만 판금으로 중무장한 근위기사단의 위력은 여전했다. 근위기사들이 올라탄 300여 마리의 말들이 쐐기꼴 대형을 유지하며 전속력으로 달렸다. 멋진 광경이었다. 지축을 흔들며 질주하는 300여 명의 기사가 가진 힘은 무시무시하도록 파괴적인 것이었다.

파슨 공작은 황제가 가진 힘에 질리면서도, 부럽고, 원통했다. 과거의 대제후들은 기사단을 거느리고 산천을 누볐다. 하지만 타레놀 칙령 이후에는 귀족들은 이빨 빠진 사자가 되고 말았다. 파슨 공작은 근위기사단을 보며 과거의 영광을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고 결의를 다졌다. 그리고 자신이 기사단의 선봉에 서는 것이다.

“파슨 공작.”

“예, 폐하. 하명하십시오.”

망상에 젖어 있던 파슨 공작은 황제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이것을 읽어라.”

“예.”

파슨 공작은 황제가 내민 쪽지를 받아 들었다. 전서구의 발목에나 매달 법한 가느다란 것이었다. 이게 무엇인가 하고 의아해하던 파슨 공작은 곧 얼어붙었다.

100명. 출발. 성공.

단 세 단어뿐이었다. 받는 사람의 이름도, 보낸 사람의 이름도 없었다.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파슨 공작은 이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자신이 루미아나 대공주에게 보낸 쪽지였다. 글씨체도 자신의 것이었다. 이게 어째서 황제의 손에 들어갔는지 짐작조착 가지 않았다.

이건 어떤 증거도 될 수 없었다. 하지만 황제는 알고 있었다.

“파슨 공작.”

“예, 예. 폐하.”

황제의 부름에 망연하게 쪽지를 바라보고 있던 파슨 공작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리고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하고는 황제를 대면했다. 아름다운 황제는 무표정했다.

“그건 증거가 되지 못하지. 단어 세 개만 적힌 쪽지일 뿐이니까.”

“그, 그것이…….”

속내를 들킨 파슨 공작은 말을 더듬었다. 황제는 소리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지만 그래서 더 무서웠다. 황제가 무엇을 얼마나 더 쥐고, 더 알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계획은 완벽했다. 아니, 허술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보가 새어 나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손에 쪽지가 있었다.

파슨 공작은 커다란 욕심에 비해 배짱은 그만큼 미치지 못하는 위인이었다. 망상과 탁상공론만으로 끝났을 야심이 현실이 된 것은 루미아나 공주의 은밀한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네세리님의 용병을 남부 반란 세력의 잔당들에게 소개시켜 주면 자치권을 인정받게 해줄 수 있다고 속삭였다. 자치권이 있다면 합법적으로 개인 사병을 거느릴 수 있었다.

감히 황제에게 덤벼들 수 없었던 파슨 공작은 자신을 대신해 싸워줄 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솔깃했다. 자금을 지원하고 용병을 소개시켜 주는 것만으로 자치권을 인정받을 수 있다면 위험한 모험을 해볼 만하다고 여겼다. 루미아나 대공주에게서 확실히 성공할 수 있는 계획을 듣고는 확실히 마음을 굳혔다.

그게 지난겨울의 일이었다. 파슨 공작은 몬스터와 관련된 소문을 퍼트리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약속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 황제의 손에 쪽지가 들려 있었다.

“그대의 입으로 직접 듣겠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짐을 노릴지 모두 고하라. 어떤 정보냐에 따라 목숨은 물론이고 재산과 명예도 지켜주겠다고 황제의 이름으로 약속하지.”

차갑게 미소 짓는 황제를 보며 파슨 공작은 덫에 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라고 잡아떼야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파슨 공작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쪽지를 움켜쥐었다. 그는 야심에 비해 담도 배짱도 작았다.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목숨을 걸 만큼의 의리도 없었다.

파슨 공작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검을 흘리십시오!”

제라르가 힘껏 외쳤다. 하지만 린델은 제라르의 말대로 하지 못했다. 아니, 검을 흘리기는커녕 버티지도 못하고 놓쳐버리고 말았다.

“엇.”

린델이 헛숨을 내쉬는 사이에 연습용 검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맑은 소리를 냈다. 다섯 번째였다. 묵묵히 검을 주워 든 린델은 한숨을 삼키며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무렇지 않은 척 굴고 싶었지만 속이 상해서 얼굴이 굳었다.

검을 배운 지도 2개월이 넘었다. 린델은 부지런했다. 매일같이 기초 동작을 연습하면서 몸에 익혔다. 하지만 재주가 없었다. 검 흘리기 같은 기본 기술에서 계속 막혔다. 검술 실력은 단숨에 느는 것이 아니었고 조급해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느낌이 왔다. 마치 미뉴에트를 죽어라 연습해도 계속 실수할 때와 같았다.

모든 것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단 하나의 사실이었다.

자신은 몸치였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자신이 몸치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덩치는 크지 않았지만 힘은 좋았다. 양털을 깎는 것도, 밀을 수확하는 것도, 짐을 옮기는 것도 평균 이상은 했다. 높은 지붕에 올라가서 잘 걸어 다녔다. 그런데 춤을 추면 어딘가 고장 난 것처럼 덜컹거렸고, 검을 쥐면 손발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몸을 쓰는 일에 재주가 없는 것을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린델 경, 괜찮으십니까?”

검을 쥔 린델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을 보고 제라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제가 재주가 없죠?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도 돼요. 스스로가 아주 확실하게 느끼고 있거든요.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해요.”

진실을 인정한 린델은 한없이 진지했고 그래서 제라르는 잠시 고민하다가 활짝 웃었다. 제라르는 뛰어난 기사였다. 린델의 실력이 형편없다는 것을 파악한 지는 오래였다. 하지만 린델에게 반해 있던 제라르에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만 린델이 객관적인 평가를 바라니까 적당히 좌절하지 않을 수 있는 대답을 해줘야 했다.

“솔직히 뛰어난 재주가 있다고는 말씀 못 드리겠습니다. 친구 사이니까 독하게 말씀드리자면, 경께서 검으로 대성하시려면 다시 한 번 태어나시는 게 더 빠를 겁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긴 했는데, 막상 직접 들으니까 슬프네요.”

“그래도 날과 손잡이를 구분하실 수는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지루한 반복 훈련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재주가 아니라 마음가짐의 문제니까요. 나머지는 시간이 해결해 줍니다. 검을 뽑으셨으니 불량배 한둘쯤은 상대하실 정도는 되셔야지요.”

제라르는 아주 온건하게 린델을 부추겼다. 린델이 더 이상 못 하겠다고 해버리면 둘 사이의 접점이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용기를 북돋아 주시니 고마워요, 제라르 경. 재주가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좀처럼 포기를 못 하겠어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어렸을 때부터 기사를 동경하고 있었거든요. 르시엘 연대기에서 나오는 천마 기사들이 너무 멋져서요.”

린델은 쑥스럽게 웃으면서 고백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검을 차고 다니는 기사와 군인들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동경하고 있었지만 사제가 되기로 한 자신이 넘볼 수 없는 세계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기회가 주어지자 욕심이 났다.

군인이나 기사가 아니더라도 간단한 서류만 있으면 장검을 소지하고 다닐 수 있었다. 그래도 제라르의 말처럼 불량배 한둘 정도는 가볍게 상대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면 그냥 허세일 뿐이다. 목표는 명확했다. 재주가 없을 뿐이지만 말이다.

“참 사람은 비슷하군요. 저도 르시엘 연대기를 읽고 기사가 되려고 꿈꾼 소년들 중 하나였습니다. 검 한 자루로 세상을 구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힘든 훈련도 꾹 참았지만……. 그래도 한 번은 다 싫다고 검을 집어 던졌다가 스승님께 엄청 혼났던 일이 기억나는군요. 기사는 체력이 전부라면서 매일같이 오래 달리기를 시키셨거든요. 아시겠지만 달리기라는 게 힘들고 지루하니까 어린 마음에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어요. 어쨌든 그래도 포기는 안 했습니다. 경의 말대로 멋지게 검을 허리에 차고 다니고 싶었거든요. 덕분에 남부끄럽지 않은 실력을 가지게 되었지만요. 여하튼 훈련은 중요한 겁니다, 린델 경.”

린델의 고백에 제라르 역시 고백으로 대응했다, 낯간지러운 고백을 통해 어린 시절의 꿈을 확인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다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 때였다. 이드나카가 나타났다. 그는 린델에게 황제가 보낸 세 번째 편지를 건네주었다.

“답장을 꼭 써달라고 하셨습니다.”

린델은 이드나카의 말을 들으며 편지를 뜯었다. 린델의 앞에 선 제라르도, 약간 비스듬히 비껴 서 있던 이드나카도, 그리고 거리를 두고 서 있던 시종도 편지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다들 린델이 입꼬리를 올리며 애매하게 웃는 것을 지켜보았다. 린델의 손에 들린 황제의 편지가 그를 기쁘게 만들었다는 것을 다들 알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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