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린델 역시 잠시 숨을 멈췄다. 아직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워든이 아니라 캐롤라인의 입으로 직접 에드리아나를 죽였다는 말을 해야 했다. 린델은 에드리아나의 부모님인 케손 백작 내외를 찾았다. 두 사람은 로벅의 영주인 델라우드 백작과 함께 있었다. 그들은 이미 오늘의 일에 대해 언질을 받았다.
무대의 막이 올랐다. 이제 절정만 남아 있었다. 린델은 손 안의 유리잔을 꽉 쥐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당신이 에드리아나 아가씨를 죽이고, 신전의 종사에게 누명을 씌었다고 고발을 하겠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렇게 되면 당신도 무사하지 못해요. 거짓 증언을 했잖아요. 감옥에 갈 거라고요.”
“무섭지 않습니다. 당신이랑 결혼할 수 없다면 파국을 선택하겠습니다.”
“현명하게 행동해야지요, 워든 경. 그랬다간 우리 둘 다 망해요. 알잖아요.”
“그러니까 저와 결혼하면 됩니다.”
캐롤라인의 부드러운 회유에도 워든은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는 캐롤라인을 숭배했다. 캐롤라인이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한다고 하더라도 낙담하기보다는 정부로 남았을 것이다.
그런 워든이 캐롤라인을 협박하다시피 한 것은, 그 역시 협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캐롤라인을 따라 닐르로 거처를 옮긴 워든은 그동안 크고 작은 사고를 겪었다. 마차가 고장 난 것만 3번, 마차 강도에, 저택에 불이 난 것도 2번이었다. 그냥 불운하다고 하기에는 뭔가 이상하다고 여겼을 때였다.
워든이 아끼던 말이 원인을 모를 이유로 죽은 다음 날이었다. 클럽과 살롱에서 몇 번 만나 인사만 했던 사내가 찾아와 협박을 한 것이 3일 전이었다. 그동안 일어난 사고를 일으킨 것은 자신이라며, 같은 사고가 캐롤라인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했다. 웬 미친놈이냐며 멱살을 잡고 소리를 쳤다가 간단히 제압당하고 말았다.
사내의 요구는 간단했다. 지정된 장소에서 캐롤라인이 에드리아나를 죽였다고는 고백을 하게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워든은 물론이고 캐롤라인의 목숨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태연히 말했다.
말도 안 되는 협박을 한 사내가 워든의 앞에 내민 것은 황제의 인장이었다. 사내가 말하길 황제께서는 살인 누명을 쓰고 도망친 린델의 사정을 모두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롤라인을 굳이 죽이실 생각은 없다고, 그저 죄를 직접 고백하는 것이 황제의 뜻이라고 밝혔다.
캐롤라인은 귀족이니 사형은 당하지 않는다며,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자택에서 연금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상기시켜 주었다. 살인을 저지른 캐롤라인과 결혼할 수 있는 사람은 워든뿐이라고도 부추겼다.
선택권이 없는 협박이었다. 도망칠 수 없는 궁지에 몰린 워든은 회유와 부추김에 넘어갔다. 워든은 어떻게든 캐롤라인이 살기를 바랐다. 또한 그녀와 결혼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을 무시하던 그녀가 자신에게만 의지하는 미래는 끔찍한 유혹이었다.
하지만 캐롤라인은 그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
“당신은 결혼밖에 몰라요? 됐어요. 마음대로 하세요. 고발을 할 테면 해봐요. 당신 말을 누가 믿겠어요? 당신이 저랑 결혼하려고 거짓 고발을 한다고 생각할 거예요.”
“당신은 에드리아나 아가씨를 죽였습니다. 돌로 머리를 내리치는 것을 제가 봤습니다.”
“맞아요. 내가 죽였어요. 그런데 증거 있어요? 아무도 안 믿을 테니 정신 차려요. 자꾸 헛소리를 하면 다시는 만나지 않을 테니까 그리 알아요.”
“캐롤라인 아가씨.”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할 때까지는 이름도 부르지 말아요.”
딱딱하게 굳어버린 워든을 지나쳐 밀실을 나온 캐롤라인은 속으로 혀를 찼다. 할 말이 있다며 밀실로 불러냈을 때는 뭔가 싶었다. 그런데 겨우 저딴 협박이나 하다니 웃기지도 않았다.
못생기고 멍청한 개가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면 밟아주어야 했다. 세상에는 분수를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캐롤라인은 반사적으로 에드리아나를 떠올렸다. 바보 같은 계집이었다. 못생긴 주제에 입을 놀리니 그런 꼴을 당하는 것이었다.
제 분에 못 이겨 돌로 사람의 머리를 내리치고, 살인죄를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울 수 있는 캐롤라인은 자기 합리화에 능숙했다. 그래서 세상에 무서울 게 없었다.
“흥.”
가볍게 코웃음을 내뱉은 캐롤라인은 워든도, 에드리아나도 잊어버렸다. 대신에 최근에 사이가 부쩍 가까워진 루웰을 생각했다. 그는 어리고 귀여웠고, 결혼에도 적극적이기까지 했다. 루웰 말고도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는 남자는 많았다. 역시나 꽃의 도시라고 감탄하며 무도회장에 들어섰을 때였다.
캐롤라인은 이상함을 느꼈다. 무도회장에 음악이 멈춘 상태였다. 기묘한 술렁임 속에 가면을 쓴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을 향했다. 그것도 매우 불쾌한 눈빛이었다. 불길함을 느낀 캐롤라인은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필로나 남작 영애.”
캐롤라인을 부른 것은 가면을 벗은 델라우드 백작이었다. 게다가 그의 옆에는 케손 백작과 백작 부인까지 서 있었다.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는 그들을 보며 캐롤라인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로벅에 있어야 할 그들이 왜 이곳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가면을 벗어 던진 케손 백작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캐롤라인. 네가 에드리아나를 죽였어.”
“이모님?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다 들었어. 네가 에드리아나를 죽였다고.”
케손 백작 부인의 목소리가 조용한 무도회장에 울려 퍼졌다. 캐롤라인은 범인이 워든이라고 확신했다.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티를 내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에드나를 죽인 것은 신전의 종사잖아요.”
“네 입으로 그랬잖아. 맞다고. 내가 죽였다고. 에드리아나를 죽인 건 나라고 말했잖아.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들었다고!”
“무슨…….”
백작 부인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에 캐롤라인은 피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걸 어떻게 들었냐고 묻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아직도 모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살인자를 보는 눈빛은 칼날이나 다름없었다. 가면을 쓰고 있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 캐롤라인은 이 자리를 피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다짜고짜 모함을 하시니 드릴 말씀이 없네요. 전 이만 가보겠어요.”
“어딜 가려고.”
“이거 놓으세요.”
자리를 피하려는 캐롤라인과 그녀를 붙잡으려는 케손 백작 부인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델라우드 백작과 케손 백작이 그들을 말렸다. 상황을 정리한 것은 저택의 주인인 일로아나 백작이었다. 그는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길 것을 제안했다. 캐롤라인은 끝까지 버티고 싶었지만 상황이 불리했다. 결국 일로아나 백작과 함께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그렇게 사라지자 조용하던 무도회장이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밀실에서 오가는 대화를 엿듣다가 살인 사건의 진범이 밝혀진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범인이 미모의 귀족 영애였다는 것에, 그리고 죽은 피해자의 부모에게 그 사실을 들켰다는 사실에 다들 흥분했다.
물론 무도회장에는 흥분하지 않은 사람도 존재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뒤센트 자작이 옆에 선 린델에게 조용히 물었다. 살인의 진범이 모두에게 폭로되었으니 더 이상 볼 것도 없었다. 황제의 명령을 받은 법무청 장관이 무도회에 참석 중이었다. 그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다. 그래도 뒤센트 자작은 끝까지 린델의 의견을 물었다.
“캐롤라인 아가씨에게, 그녀에게 제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요. 조금 유치한가요?”
“아닙니다. 복수란……. 주제넘은 말씀이지만, 복수란 본인이 만족할 때까지 하는 법입니다.”
“네.”
뒤센트 자작의 말에 린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량하게 살아야 한다고 배웠고 그렇게 살아왔던 린델에게 복수란 사전적인 개념에 지나지 않았다.
남에게 받은 해를 그대로 돌려주는 것. 앙갚음. 혹은 분풀이.
이제야 그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했지만 여러모로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복수를 하면 속이 시원해진다고 했다. 그러나 캐롤라인의 죄가 폭로되었는데도 그렇게까지 기쁘지 않았다. 정확히는 씁쓸하고도 허탈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캐롤라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싶었다. 선량하고 겁먹은 얼굴로 사람을 살인자로 만든 그녀에게 자신이 살아 있노라고 알려주면 좀 더 완벽한 복수에 가까워질 것이다.
린델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캐롤라인은 오늘의 무도회가 그녀를 위해 준비된 무대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워든에게 협박당한 것도, 케손 백작 내외를 만난 것도 운이 나쁜 것이었을 뿐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녀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커다랗고 아름다운 방에 저택의 주인인 일로아나 백작과 델라우드 백작, 케손 백작 내외가 자리를 잡을 때도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캐롤라인은 잡아뗄 자신이 있었다. 어차피 증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모든 것이 워든의 거짓말이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처음 보는 노년의 사내가 로벅의 순회 재판관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을 때는 의아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뒤이어 나타난 중년의 사내가 법무청 장관이라고 했을 때는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법무청 장관이라고요?”
한껏 기세를 끌어올리고 있던 캐롤라인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공손하게 물었다. 그녀는 황궁의 정치 권력에 대해 아는 것이 얼마 없었다. 그래도 법무청 장관이 황제와 매우 가까운 권력자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깃털로 치장한 가면을 벗은 법무청 장관이 캐롤라인의 질문에 차갑게 대꾸했다.
“필로나 남작 영애께서 살인범이라는 것을 자백했으니, 법무청 장관이자 법관으로 그냥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살인범이라니요.”
“당신이 직접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셨습니다. 아마도 모르시겠지만, 이곳 저택에는 이슈라드의 무대를 모방한 간단한 장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남작 영애께서 워든 경과 나눈 대화를 무도회장에 있는 모두가 들었지요. 네. 영애께서는 살인을 자백했습니다.”
그 순간에 캐롤라인은 다리가 풀려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하지만 그녀는 버텼다.
“그건 워든 경의 모함이에요. 이야기를 들었다면 아시겠지만, 그는 제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 계속 의심했어요. 그래서 자기랑 결혼을 하자며 협박을 한 거라고요. 이모님, 아시잖아요. 그가 제게 엄청 집착하고 따라다니는 거.”
“자백은 자백입니다.”
캐롤라인의 질문에 답을 한 것은 케손 백작 부인이 아니라 법무청 장관이었다. 캐롤라인은 으르렁거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러고는 가련해 보이려고 애써 애처롭게 굴었다.
“그것이야말로 협박 때문에 그랬어요, 장관님. 워든 경의 증언 말고는 아무런 증거도 없는데, 그래서 그에게 약점을 잡힌 거라고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어요.”
캐롤라인은 모순된 거짓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어차피 워든의 증언 말고는 아무것도 없으니 이번 위기만 모면하면 될 거라는 얄팍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법무청 장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증인이 있습니다.”
“워든 경은 절 협박했어요. 그는 증인이 될 수 없어요.”
“또 다른 분이 계십니다.”
법무청 장관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벽에 붙어 서 있던 젊은 사내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캐롤라인은 그가 눈에 익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봤더라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사내의 검은 머리가 금발로 한순간에 변하고 말았다.
캐롤라인은 단숨에 그를 알아보았다. 린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