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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80/137)

-80화-

지금껏 조용히 서 있던 케손 백작 내외와 델라우드 백작 역시 숨을 들이켜면서 린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진짜 그였다. 하지만 그는 호수에 빠져 죽은 지 오래였다.

“어떻게…… 어떻게 네가 여기 있지? 넌 죽었어. 호수에 빠져서 죽었잖아. 아버지가 그러셨다고.”

“돌라낭 여신께서 절 살리셨죠. 결백을 증명하라고요.”

“무슨…….”

그제야 캐롤라인은 정신을 차렸다. 에드리아나를 죽인 범인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이건 신이 주신 기회였다. 캐롤라인은 반색을 하며 외쳤다.

“장관님, 그가 범인이에요! 제가 아니라 린델이 에드리아나를 죽였어요. 제가 봤어요!”

“저는 아가씨를, 아가씨는 저를 범인으로 지목했습니다. 증인인 워든 경께서 누가 범인인지 말해 주시겠죠.”

“그래. 그가 말해 주겠지.”

캐롤라인은 자신만만했다. 워든이 자신을 버릴 리 없다고 여겼다. 지금껏 그래왔기 때문이다.

“그는 아가씨를 범인이라고 할 겁니다.”

“뭐?”

“그는 진실을 말하기로 했습니다.”

캐롤라인의 귀에는 린델이 워든을 매수했다는 소리로 들렸다. 캐롤라인은 그 순간에도 자기 좋을 대로 말했다.

“그는 날 협박했으니 내게 불리한 증언을 해도 신빙성이 없어.”

“그럼 누가 살인자인지 알 수 없겠군요.”

“네가 죽였잖아. 반지 때문에.”

“아가씨가 죽였습니다. 질투 때문에.”

린델은 지지 않고 대꾸했다. 이 상황에서도 거짓말을 하다 못해 당당하기까지 한 캐롤라인을 보자니 속이 답답했다. 원래라면 얌전히 그녀의 말을 들었을 테지만 이번만큼은 오기가 생겼다.

그리고 고분고분하지 않는 린델의 태도는 캐롤라인을 자극했다.

“이게 어디서 꼬박꼬박 말대답이야!”

버럭 소리를 지른 캐롤라인이 버릇대로 팔을 치켜들었다. 뺨을 치려는 동작에 린델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충격은 없었다. 린델의 옆에 서 있던 뒤센트 자작이 캐롤라인의 손을 내쳤다.

“다음은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뒤센트 자작이 엄중하게 경고했다.

“당신은 또 뭐야?”

“이분은 황제 폐하의 피후견인이십니다. 들어보셨을 겁니다. 아셰리드엘 경은 황제 폐하의 총신이고, 당신이 함부로 입을 놀릴 분이 아니십니다.”

린델이 황제의 총신이라는 뒤센트 자작의 설명에 캐롤라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황궁에 출입할 신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황제의 피후견인에 대해서는 캐롤라인도 들은 게 많았다. 트윈문 파티 때 황제가 금발의 청년과 춤을 추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총애가 극에 달아 사내인데도 후궁이 될지 모른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런데 그게 린델이라고?

거짓말이었다. 거짓말이어야 했다. 그게 사실이면 끝장이었다.

“거짓말……. 그럴 리 없어. 네가 어떻게, 어떻게…….”

현실을 부정하던 캐롤라인은 순간 이 모든 게 함정이라고 생각했다. 아니고서야 워든이 결혼하자고 억지를 부릴 리 없었다. 캐롤라인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델라우드 백작과 케손 백작 내외가, 그리고 린델까지 타이밍 좋게 함께한 것은 누가 봐도 이상했다.

“이건 함정이야. 내게 누명을 씌우려는 함정이라고. 좋아. 재판을 해. 누가 살인범인지 명명백백하게 따져보면 될 거 아니야!”

마지막까지 발악하는 캐롤라인을 보며 린델은 인상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벽을 마주하면 이런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속이 울렁거려서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의 진심 어린 사과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습은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설득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린델은 카시어스가 말한 두 배로 되갚아 주는 게 무엇인지 진짜 배우고 싶어졌다.

“황제 폐하께서는 감사하게도 제가 원하는 것은 뭐든 들어준다고 하셨어요. 캐롤라인 아가씨, 당신을 보기 싫다고 한마디만 하면 그렇게 해주시겠노라고 약속하셨지요.”

“?!!”

“그게 무슨 뜻인지 아세요?”

린델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한 캐롤라인을 향해 일부러 물었다. 하수나 할 법한 협박이었다. 그래도 죄를 뉘우칠 생각을 하지 않는 캐롤라인에게는 권력으로 찍어누르는 것이 제일 효과적이었다.

린델은 주먹을 꽉 쥐었다. 얼굴에도 의식적으로 힘을 주었다. 심장이 떨렸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저는 당신이 죄를 인정하고, 에드리아나 아가씨에게, 케손 백작님과 백작 부인께, 그리고 제게 사과를 했으면 해요. 그리고 재판을 받고, 지은 죄만큼 벌을 받기를 원합니다.”

“무슨…….”

“당신은 귀족이니까 교수형을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죄를 인정하고 진심 어린 반성을 한다면요. 그러니까 사과하십시오. 잘못했다고.”

가장 하고 싶은 말이었다. 알렉스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카시어스를 만나지 않았다면 자신은 살인자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운 좋게 황제의 도움을 받고 호의호식하고 있다고 해서 그때의 분노가, 억울함이, 막막함이 가시는 것은 아니었다.

린델이 바라는 것은 거창한 복수가 아니었다. 비록 황제의 힘을 등에 업고 협박을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그녀가 진심으로 반성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잘못했다는 사과를 듣고 싶었다.

캐롤라인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캐롤라인 아가씨.”

린델의 재촉에도 캐롤라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왜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리로는 사과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야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근본도 모르는 고아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수치스럽고 억울했다.

이건 음모였다. 함정이었다. 아무리 황제라도 이럴 수는 없었다. 자신은 결백해야 했다.

캐롤라인은 린델을 노려보았다. 황제의 남첩이 된 것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권력에 빌붙어 자신을 핍박하고 있는 저놈이 원흉이었다. 린델이 호수에 빠져 죽기만 했다면 이런 수모를 당할 일도 없었을 터였다.

부들부들 떨면서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고 있던 캐롤라인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애써 붙잡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과감하게 놓아버렸다.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녀는 기절로 도피했다.

휘청거리다 쓰러지는 캐롤라인을 붙잡은 것은 뒤센트 자작이었다.

“기절했습니다.”

캐롤라인이 기절을 했다는 말에 린델은 물론이고, 두 명의 장관, 한 명의 순회 재판관, 두 명의 백작, 한 명의 백작 부인, 그리고 만약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두 명의 시종까지 모두 제각각 한숨을 내쉬었다. 때문에 커다란 한숨 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뒷수습은 금방이었다.

캐롤라인은 법무청 장관의 명령에 의해 기절한 채로 치안대에 끌려갔다. 자백이 근거였다. 린델은 케손 백작 내외와 로벅의 순회 재판관, 그리고 델라우드 백작과 함께 앞으로 있을 재판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잔뜩 흥분한 케손 백작 부인을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

마지막으로 건설청 장관인 일로아나 백작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저택을 빠져나왔을 때, 린델은 완전히 지친 상태였다. 그래도 자신의 앞에 선 마차가 타고 왔던 것과 다르다는 것을 못 알아차릴 정도는 아니었다. 마차뿐만이 아니었다. 마부도, 시종도 다른 사람이었다.

“자작님. 마차가 달라요.”

린델은 옆에 선 뒤센트 자작의 팔을 슬쩍 잡아당기며 뒤로 물러났다. 마차 강도를 당한 이후에 린델은 신중해졌다. 특히 마차 강도 말고도 마차를 바꿔치는 수법이 있다는 것을 듣고는 꼭 마차와 마부를 확인하는 습관을 들였다.

가문의 문장이 없는 검은 마차는 자신이 타고 왔던 것과 비슷했다. 그래서 더 의심스러웠다.

잔뜩 긴장한 채 마법 주문을 외울 준비를 하고 있는데 뒤센트 자작이 살짝 손등을 두드려 왔다.

“괜찮습니다.”

“오스카, 손을 떼.”

마차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카시어스의 것이었다. 린델이 놀라는 사이에 멀찍이 떨어진 뒤센트 자작이 마차 문을 열었다. 실내등이 꺼져 있는 내부는 어두웠지만 린델은 망설이지 않고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린델은 실내등을 켰다. 정말로 카시어스가 앉아 있었다. 가면도 없이 붉은 머리를 묶은 채였다. 9일 동안 보지 못해서 그런지, 아니면 피곤해서 그런지 왠지 현실감이 없었다.

“폐하?”

“황궁이 아닌 곳에서 폐하라고 부르면, 날 싫어해서 그러는 거라고 여겨도 되지?”

“카시어스 경, 어쩐 일이세요?”

“내가 찾아온 것이 불만스러운 모양이야?”

카시어스는 웃으면서 툴툴거렸다. 그사이에 마차가 출발했고 린델은 조금 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카시어스가 9일 동안이나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이유를 생각한다면 뭔가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을 따지고 싶지 않았다. 그저 기뻤다.

“뵐 수 있어서 기뻐요. 무척이나.”

“필로나 남작 영애가 보통이 아니던걸? 끝까지 발뺌을 하다가 사과도 하지 않고 기절을 해버리다니. 내 평생에 그렇게 짜증 나는 인간은 처음이었어.”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옆방에 있었지.”

“옆방에 계셨다고요?”

“그래.”

카시어스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린델은 아무리 옆방이라도 그 소리가 들린 게 신기했다. 아니, 옆방에 있었다는 것은 지금보다 일찍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같이 와주셨으면 좋았잖아요.”

“혼자서도 해봐야지.”

“폐하께서, 그러니까 카시어스 경께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복수 자체를 못 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더욱 내가 있으면 안 되는 거야. 그래. 복수를 한 소감은? 기분은 어때?”

소감이란다. 혼자서 하는 건 맞다고 납득하던 린델은 잠시 인상을 썼다.

“모르겠어요. 속이 시원해야 하는데, 좀 복잡해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긴 했는데, 말이 안 통해서 너무 답답했어요.”

“그런 인간들이 있지. 얼굴이 굳었어. 손을 잡아줄까?”

뜬금없는 제안에 린델은 조금 흔들렸다. 하지만 얼굴을 마주하면 끌어안고 키스할 거라고 했던 남자의 손을 잡았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어, 음……. 손을 잡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안 하신다고 약속하시면요.”

“너무하잖아.”

“캐롤라인 아가씨를. 음, 호칭을 바꿔야겠네요. 필로나 남작 영애를 기절하게 만든 것보다 지금 카시어스 경을 볼 수 있는 게 더 기뻐요. 예, 진심이에요. 하지만 경께서 보낸 편지 내용을 생각하면 조심해야죠.”

“말은 잘하지.”

카시어스가 옆에 놓인 상자를 열고는 뭔가를 집어 들었다. 카시어스가 손을 잡아주는 대신에 내민 것은 붉은 끈으로 묶인 두루마리였다.

“읽어봐.”

린델은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두루마리를 받아 들었다. 종이가 아니라 양피지의 감촉이었다. 도대체 뭔가 싶어 천천히 두루마리를 펼쳐 읽던 린델은 그대로 굳었다.

두루마리에는 아름다운 요정어로 정중하게 파혼을 청하는 글이 적혀져 있었다.

“드디어 파혼당했어. 위로가 필요하니, 네가 손을 잡아줘.”

두루마리의 내용을 한 번 더 읽은 린델은 어이없는 기분으로 카시어스를 바라보았다. 위로가 필요하다는 남자는 아까보다 더 활짝 웃고 있었다. 아주 기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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