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화창한 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이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떠 있었다. 가을에 접어들었지만 이른 오후의 햇살은 강렬했다.
빅토리아 황태녀의 거처인 다섯별의 궁은 화원으로 유명했다. 색색의 장미는 물론이고 계절마다 아름다운 꽃들이 피고 졌다. 정원 한 중간에 위치한 커다란 분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가 햇살에 반짝였다. 그 아름다운 배경 속을 린델과 샤트밀 후작 영애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돔형의 우아한 정자 아래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카시어스는 살짝 입매를 당겼다.
하얀 양산에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샤트밀 후작 영애, 캐서린과 검은색 예복을 차려 입은 린델은 썩 잘 어울렸다. 트윈문 파티에서 춤을 출 때보다 환한 햇살 아래서 싱그러움이 더 했다. 그래서 카시어스는 꽤나 속이 쓰렸다. 웃지 말라고 했는데도 린델이 잘 웃어줘서 그런지도 몰랐다.
시답지 않은 이야기로 재잘거리는 것은 캐서린이었다. 그리고 린델은 성실한 청자였다. 캐서린이 어색하지 않도록 적당히, 때로는 과장스럽게 호응해 줬다. 캐서린은 지금 린델의 고향에 대해 질문을 퍼붓고 있었다. 이번에 신분을 되찾은 린델의 사연이 꽤나 궁금했던 모양이다. 거리낄 것 없던 린델은 질문에 착실히 대답하고 있었다.
“그럼 폐하와는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혼자서 길을 헤매고 있었는데, 변복을 하신 폐하와 우연찮게 만났습니다.”
“어머나, 운명이군요.”
“네. 폐하가 아니셨다면 타지에서 객사했을 겁니다.”
두 사람은 정자와 꽤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집중하고 있는 카시어스에게는 그들의 이야기가 잘 들렸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지만 카시어스의 굳어진 입매는 풀리지 않았다.
냉철의 마법사니까 너무 웃어주지 않을 거라며.
카시어스는 린델을 불러다가 약속을 지키라고 경고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사실 이렇게 질투하고 있는 자신이 어딘가 정상이 아닌 것 같긴 했다.
“그렇게 뚫어져라 보시면, 정말 어딘가에 구멍이 날지도 몰라요.”
옆에서 카시어스를 지켜보고 있던 빅토리아가 한마디 했다.
“그러게 말이다. 짐이 당부했던 것을 지키지 않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할까?”
“폐하께서 잘못하셨어요. 에스코트를 린델 경에게 맡기시다니요. 우리 캐서린이 얼마나 예쁜데요.”
캐서린은 빅토리아의 이종사촌 여동생이었다. 친인척 중에 유일하게 비슷한 나이 또래의 여자라서, 빅토리아는 캐서린을 유독 아꼈다. 이종사촌 여동생을 두둔하는 빅토리아 때문에 카시어스는 쓴웃음을 삼켰다. 객관적으로 보면 캐서린이 귀엽기는 했지만, 굳이 따지자면 린델이 더 예뻤다. 어린 숙녀가 동경의 마음을 품을 만큼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카시어스는 웃음을 흘렸다. 열다섯 살짜리 꼬맹이랑 치정 싸움을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린델의 마음은 자신에게 있었다.
“그는 짐이 세상에서 가장 잘생겼다고 했어.”
“?!!”
“그리고 빅토리아. 객관적으로 봐도 캐서린보다는 린델이 더 예뻐.”
카시어스는 자신과 린델의 자랑을 동시에 했다. 찻잔을 들어 올리려던 빅토리아가 아연한 눈길로 쳐다보다가 소리 없이 웃는 게 느껴졌지만 카시어스는 상관하지 않았다. 자랑을 하는 데 카시어스는 부끄러움이 하나도 없었다.
황제의 애인이란 사람들 사이에서 욕망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었다. 린델도 마찬가지였다. 카시어스가 아무리 린델을 아끼고 보호해도 그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다만 안전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할 수는 있었다. 린델을 감금하지 않는 이상에야, 그는 사람들과 어려움 없이 어울려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린 것과 별개로 직접 눈으로 지켜보자니 속이 쓰렸다.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폐하. 속이 쓰릴 정도로 질투가 나서요.”
“하하하. 그것 참 큰일이군.”
웃음을 터트리는 카시어스를 보며 빅토리아는 부러움에 휩싸였다. 트윈문 파티 때도 그랬지만 황제께서는 애인에게 푹 빠져 계셨다. 세상 가장 귀한 것을 보는 눈빛에는 열기가 어려 있다.
빅토리아는 캐서린과 나란히 걷고 있는 린델을 바라보았다. 황제의 피후견인이자 애인인 그는 여전히 스캔들의 중심에 있었다. 황제께서 직접 살인 누명을 벗겨주고 그의 신분을 되찾아 준 것은 이미 널리 퍼진 상태였다. 일반 평민도 아닌, 종사 출신의 고아였다. 하지만 이제 그는 곧 작위를 가진 귀족이 될 터였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면 출신은 문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테누안의 공주가 황제와 파혼하고 새로운 약혼 사실을 공표한 것도 황제의 입김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파혼과 약혼 사실을 알리기 전에, 테누안의 루터 왕세자가 황제와 독대를 했었다. 둘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황제가 압력을 가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 통설이었다.
황제께서는 사랑에 빠진 사내였다. 그리고 그의 사랑은 정치적인 사건이었다.
황태후께서는 황제께서 여인보다는 사내를 총애하시는 데 만족하신 듯했다. 알아본 바로는 씨디프 공작의 양자 입적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양자 입적에, 작위 수여까지 일사천리로 이루어질 게 확실했다.
그렇게 된다면 또 한바탕 시끄러워질 것이다. 지금도 그랬다. 쥴란 공작의 두 아들의 싸움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첫째 아들인 니콜라스가 총기 폭발 사고를 당한 지 한 달이 지난 지금에, 북관에서 복무하고 있는 데스탄 역시 총기 폭발로 다쳤다. 니콜라스는 그나마 치유 마법으로 대부분의 상처를 회복했지만, 데스탄은 손가락을 하나 잃었다고 알려졌다.
쥴란 공작의 후계자들이 서로를 향해 비수를 들이댔다. 평소라면 한참 시끄러워졌겠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
린델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신분을 비웃으면서도, 그가 어디까지 높이 올라갈지 가늠하느라 바빴다.
황제의 모습을 보자면 그는 아마도 아주 높은 곳까지 올라갈 것이다.
빅토리아는 과연 황제께서 무엇을 얼마나 그에게 줄까 궁금해하면서 입을 열었다.
“데스탄이 황도로 돌아온다고 들었어요. 사실인가요?”
빅토리아는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그제야 카시어스가 빅토리아를 바라보다가 사납게 웃었다.
“누님이 눈물로 매달리는데 매몰차게 거절을 할 수가 없었지.”
“그게 그의 미래를 위해서 좋은 일은 아닐 텐데요.”
데스탄이 사람을 써서 린델을 습격했다는 것을 빅토리아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두 형제 사이에 싸움을 붙인 것이 카시어스라는 것도 뒤센트 자작에게서 들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후계를 둘러싼 형제의 싸움이지만 결국 죽는 것은 데스탄일 것이다.
“어디까지 정리를 해야 할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어.”
“폐하?”
주제와는 상관없는 대답에 빅토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칼을 들고 덤벼드는 무뢰배는 응당 목을 베어야겠지. 제 분수도 모르고 바지 자락을 물고 늘어지는 늙은 개는 조금 두들겨 패는 것으로 끝낼 생각인데, 그러자니 바위 위에 앉아 마리오네트를 조종하는 암 늑대가 꼴 보기 싫어졌어. 그런데 안타깝게도 암 늑대를 잡을 결정적인 미끼가 없는 게 문제야.”
칼을 든 무뢰배, 늙은 개, 암 늑대. 카시어스는 구체적으로 실명을 거론하지 않았다. 주위에는 근위시종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빅토리아는 마지막에 언급한 암 늑대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쥴란 공작 부인, 그녀 본인은 루미아나 대공주로 불리는 것을 더 좋아하는 황친으로 빅토리아에게는 고모 할머니가 된다.
빅토리아는 그녀와 좋은 기억이 없었다. 화려하고 온화한 얼굴을 하고는 사사건건 사람 속을 뒤집어 놓았다. 여섯 살의 생일 때, 루미아나 대공주의 발에 걸려 어머니의 드레스 자락에 차를 쏟은 기억도 있었다.
루미아나 대공주는 지난 두 번의 내전에서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살아남은 유일한 황제의 형제였다. 황실의 어른으로, 그리고 중앙 귀족파의 거두인 쥴란 공작의 부인으로 힘은 꽤나 컸다. 정치적으로는 중립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루미아나 대공주가 황제를 싫어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이 황제가 되면 그 정도는 더 심해질 것이다. 발을 걸었을 때처럼 사사건건 훼방을 놓을 게 뻔했다.
“저는 암 늑대가 싫어요. 감히 청을 드리건대, 미끼가 없으면 만들어버리세요.”
생긋 웃으면서 루미아나 대공주를 몰락시킬 증거를 만들어버리라고 청하는 빅토리아를 보며 웃었다. 루미아나 대공주가 반란에 개입한 정황은 있지만, 결정적인 물증은 아직 확보하지 못했다. 잡음 없이 옭아매려면 완벽한 증거가 필요했다.
“카아테르의 통치론에 의하면 지혜로운 군주가 지켜야 할 법은 단 둘뿐이라고 했다. 그게 무엇인지 말해 보거라. 빅토리아.”
“공정한 법 집행과 공정한 세금 제도라고 했습니다.”
“거물을 상대로 한 조작된 미끼는 반발을 살 뿐이다. 다들 눈치챌 테니 말이다.”
공정한 법 집행과 세금 제도는 제국의 통치 기조였다. 대륙을 정복하고 덩치를 키워가는 동안 제국은 꾸준히 귀족의 권한을 축소시켜 왔다. 사병을 금지시키고, 평민들처럼 세금을 내게 하고, 법정에서 판결을 받게 만들었다. 그것이 귀족다운 소임이라는 것을 정착시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다만 황제 역시 과거의 통치자들처럼 기분대로 귀족의 목을 자를 수가 없어졌다.
황제와 귀족 사이의 파워 게임은 이제 우아하게 바뀌었다. 황제는 귀족의 파벌을 갈라 세를 억눌렀다. 그러면서 세금을 내고 법을 지킨다면 지위와 안전을 보장했다.
루미아나 대공주를 치기 위해 암묵적인 룰을 깨는 것은 귀족들에게 불신을 심어주게 된다. 자신들도 언젠가 루미아나 대공주처럼 될 수 있다는 의심은 결코 좋지 않았다.
“그러시면 정교한 덫을 만들면 되죠. 제 발로 들어가게 말이에요.”
빅토리아가 아주 간결한 답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게 어려운 법이었다. 루미아나 대공주는 아주 노련했고 틈을 만들지 않았다. 이번 일에 그녀를 얽혀들게 만들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했다.
“말처럼 쉬웠으면 좋겠구나.”
“폐하께서는 유능한 사냥꾼이시니, 늑대 사냥쯤이야 쉽게 하실 겁니다.”
“아부도 제법이다만, 짐은 덫보다는 직접 활을 쏘는 것을 선호한다. 어쨌든 곧 사냥이 있을 테니 준비하거라.”
사냥이 있을 거란다. 그건 그냥 언질이 아니라 확언이었다.
“제가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오늘 당장 해야 할 일이 있다.”
“예. 명하십시오.”
“캐서린에게 왜 린델에게 저렇게 딱 붙어 있었느냐고 물어보아라. 그리고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고도 하고.”
카시어스는 눈짓으로 린델과 캐서린을 가리켰다. 어느새 린델의 팔에 캐서린의 손이 올라가 있었다.
진지하기 짝이 없는 카시어스 때문에 빅토리아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카시어스는 개의치 않았다.
떨어져.
카시어스는 속으로 외쳤지만 두 사람은 더 가까워졌다. 사랑은 위험한 감정을 만들어냈다. 그저 린델이 신사답게 숙녀를 에스코트 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그 꼴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체면이고 뭐고 당장에 달려가서는 둘을 떼어놓고 싶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독점욕이 강하고 질투가 많은 줄은 몰랐다.
이번에는 캐서린이 린델에게 귓속말을 했다. 키가 작은 캐서린을 위해 린델이 허리를 살짝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참을 수가 없었다.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결국 카시어스는 욕망에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