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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86/137)

-86화-

남부에서 내란을 일으켰던 잔당들이 습격을 계획하고 있다는 첩보가 있다고 카시어스가 말했다. 카시어스는 그들을 조용히 처리하는 대신에 요란하게 일을 키울 거라고 알려주었다. 보안 때문에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다만 내부에 동조자가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들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위해 사냥을 하는 것이었다. 카시어스는 위험한 일은 없을 거라고 했지만 린델은 안심하지 못했다.

내부의 동조자. 그건 배신자를 뜻했다.

위험한 단어였다. 살짝 입매를 당긴 린델은 천천히 신전 내부를 둘러보았다. 충성 맹세를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앉은 이들 중에 역심을 품은 자가 있었다.

일곱 신들께 땅에서 난 첫 번째 수확을 바치는 제의는 신의 대리인인 황제가 주관함으로서 세속적인 맹세가 되어버린다. 제대에 올린 제물은 신께 바치는 것이지만, 영주들이 무릎을 꿇는 상대는 황제이기 때문이었다.

린델은 닐르에 와서야 충성이란 단어가 낭만적이고 고결한 마음이 아니라, 효율적인 통치 수단이라는 것을 배웠다. 충성을 맹세하고 목숨을 바쳐 권력과 명예를 얻는 것은 고요정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약속이었다. 그렇게 지배자와 피지배자와의 절묘한 균형이 거대한 제국을 굴러가게 만드는 것이라고 카시어스가 말했다. 그리고 인간이기에 약속을 깨고 이탈하는 자가 생긴다고도 했다.

감당하지 못할 헛된 욕심을 꿈꾸는 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익숙하다면 익숙한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하던 린델은 황족과 황친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데스탄이었다. 우연이었던 듯, 그는 인상을 확 찡그리더니 곧 비웃음을 흘렸다. 네까짓 게 뭐냐는 눈빛이었다. 거리가 멀긴 했지만 그의 눈빛이 캐롤라인과 닮아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흠.”

순식간에 기분이 나빠진 린델은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데스탄 때문에 죽을 뻔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끝까지 노려봐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국가적인 제의 중이었고 시끄러워지는 것이 싫은 린델은 무심한 척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손가락을 하나 잃고 북관에서 황도로 돌아온 데스탄은 잔뜩 독이 올라 있었다. 그의 형인 니콜라스와의 대립이 노골적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도 세투아에게서 들었다.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그는 형제 중에 하나는 죽을 거라고 덤덤히 말했다.

장엄하고 화려한 이곳에 음모와 모략이 난무하고 있었다. 휩쓸리지 말고,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카시어스의 경고를 이런 식으로 깨닫는 것이 씁쓸했다.

린델은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서 있는 카시어스를 바라보았다. 황금과 보석으로 된 커다란 황관을 쓴 뒷모습에서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힘이 느껴졌다. 그런 그를 닮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함성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종소리가 울리고 강철로 만든 방패를 든 빅토리아가 대신전의 정문에 나타났다. 자리에 앉아 있던 귀족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파이프 오르간을 반주로 성가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일곱 신과 황제의 영광을 찬양하는 오랜 성가는 고요정어였다. 린델은 천천히 가사를 음미했다.

하늘 높은 곳에 계신 당신께 영광을.

당신의 영광을 찬미하나이다.

우리는 당신의 위대함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감사를 드리나이다.

아름다운 노래와 함께 빅토리아가 중앙 통로의 붉은 카펫을 밟으며 걸었다. 은색으로 수놓은 하얀 예복과 망토가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쏟아져 내리는 색색에 물들었다.

긴 망토를 끌며 제대 앞에 도착한 빅토리아가 정중히 무릎을 꿇었다.

“불꽃의 지배자이신 황제 폐하께 고합니다. 일곱 신의 축복이 탐스러운 결실을 맺었습니다. 약속된 자비를 일곱 신께 바치옵니다.”

빅토리아가 커다란 목소리로 정해진 문구를 읊었다. 그녀가 머리 위로 올린 강철 방패가 추기경의 손을 거쳐 제대에 올렸다. 제의는 정해진 순서대로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카시어스의 손에는 신성한 나무라고 불리는 보라색 잎을 가진 자작나무 가지가 들려 있었다. 카시어스는 일곱 신의 꽃이 모두 피어난다는 전설을 가진 자작나무 가지에 성수를 찍어 빅토리아에게 뿌렸다. 그리고 강철 방패 위에 올려진 밀과 사과, 양모를 꺼내 거대한 화로에 태웠다. 신의 축복을 돌려드리기 위한 방법이었다.

일련의 과정이 끝나자 빅토리아는 충성을 맹세한 후 황제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물러났다. 그다음은 제의에 참석한 황족과 귀족들의 차례였다. 그들이 순서대로 카시어스의 손등에 입맞춤을 하는 것으로 길고 길었던 제의가 마무리되었다.

그 모든 광경을 끝까지 지켜본 린델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아름답고도 숨 막히는 광경이 한 편의 거대한 연극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 조금 서글펐다.

제의가 끝나면 본격적인 축제가 열렸다. 황도 사람들은 다른 곳의 영민들처럼 광장에서 황제의 이름으로 제공되는 술과 음식을 즐기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리고 제의에 참석했던 귀족들은 황제와 함께 황궁으로 돌아가 본격적인 연회를 즐겼다.

귀족들이 시종들의 안내를 받아 준비된 자리에 착석할 때쯤에 카시어스는 연회장과 가까운 사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제의를 지켜본 소감이 어때?”

근위시종들은 황제의 옷을 벗기느라 바빴다. 공물을 태운 화로와 가까이 있었던 황제에게서는 썩 향기롭지 못한 냄새가 났다. 씻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젖은 수건으로 몸을 닦고 향유를 발랐다. 머리도 마찬가지였다.

노련하고 분주하게 손을 놀리는 시종들에게 몸을 내맡긴 카시어스는 멀찍이 선 린델에게 말을 걸었다. 제의 때문에 린델은 평소 입던 마법사의 약식 망토 대신에 백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신선한 모습인데 오늘은 마주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카시어스는 일부러 린델을 향해 섰다.

덕분에 린델은 카시어스의 알몸에서 슬쩍 시선을 빗긴 채 대답해야 했다.

“아주 장엄하였습니다, 폐하.”

“식상한 감상 말고.”

“신전의 종사였었던 경험을 비추어보자면, 많은 분들께서 엄청난 수고와 노력을 기울였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린델의 솔직한 감상에 카시어스는 물론이고 같은 자리에 있던 모두가 저마다의 방법으로 소리 없이 웃었다. 길고 성대한 제의를 작은 실수 하나 없이 끝내기 위해서는 엄청난 인력과 시간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란디스 메시스가 가까워지면서 근위시종들은 물론이요, 황제인 카시어스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매년 해왔던 일이라 익숙했지만 그렇다고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 와중에 고생했다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여러모로 이상해질 수밖에 없었다.

카시어스는 미묘하게 바뀐 분위기를 읽으며 입을 열었다.

“가만 보면 너도 일 중독자야.”

“아니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폐하.”

“궁내청장이 제발 너를 만나게 해달라고 애원할 때, 외면한 것이 못내 아쉽구나. 너도 함께 수고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폐하께서 불러주시기를 기다렸습니다.”

린델은 백장미 궁에 자신을 가둔 것은 당신이지 않냐고 우아하게 되물었다. 그럴듯하게 궁정어를 구사하는 린델 때문에 카시어스는 웃었다.

“모든 일은 끝난 후가 더 바쁘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지? 지금이라도 궁내청장이 널 가루가 되도록 쥐어짤지도 몰라.”

“궁내청장께서는 그리 무서운 분이 아니십니다.”

“궁내청장이 들으면 좋아하겠지만, 그랬다가는 네가 사람 보는 눈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 게다.”

그렇게 시답지 않은 수다를 떠는 동안에 카시어스의 치장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란디스 메시스는 황제의 힘과 권력을 내보이는 자리였다. 그는 어느 때보다 화려했다. 마지막으로 약식 황관을 쓰고 고풍스러운 목걸이까지 건 카시어스가 린델을 돌아보았다.

“향연은 처음이지?”

“예. 그렇습니다, 폐하.”

일반적인 연회와 달리 향연은 식사를 하면서 공연을 보는 것이었다. 린델은 배행 마법사로 그의 곁을 지키는 대신에, 세투아를 비롯한 마탑의 마법사들과 함께 향연에 참석하게 되었다. 카시어스의 배려였다.

“음식도, 공연도 훌륭할 거야. 대신에 식사 시간이 세 시간은 훌쩍 넘을 테니 각오해야 해.”

“세 시간이나요?”

“어지간한 인내심이 없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앉아 있기 힘들지.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다니는 것은 괜찮지만, 혼자서는 움직이지 않도록 해. 세투아를 대동하거나, 아니면 내 자리와 멀지 않으니 이드나카를 찾아. 누가 부른다고 따라가지 말고.”

후견인으로서의 조언이 어느새 물가에서 노는 어린아이에게 주의를 주는 것처럼 바뀌었다. 황제가 그의 애인을 챙기는 것은 이제 유난스럽지도 않은 일이었다. 다들 그러려니 했지만 당사자인 린델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제가 어린아이도 아니고, 누구를 따라가겠습니까.”

“마탑의 원로들에게 너는 어린아이나 다름없지. 네 말재주라면 예쁨받을 테니, 적당히 어울리면 된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나중에 보자.”

카시어스는 이제부터 그란디스 메시스의 공식 일정을 소화하느라 정신없이 바빠질 예정이었다. 한 공간에 있어도 제대로 된 대화조차 못 할 확률이 높았다. 다시 여유롭게 만날 수 있는 것은 밤이 한참이나 늦은 다음에나 가능했다. 카시어스는 다음을 기약하며 린델에게 손을 내밀었다. 린델은 손을 맞잡는 대신에 무릎을 꿇고 오늘 수많은 사람들의 입술이 닿았던 카시어스의 손등에 입맞춤을 했다.

“불꽃의 지배자이신 황제 폐하께 변치 않는 충성과 빛나는 영광을 바치겠습니다.”

“너의 충성과 영광은 오래 전부터 짐의 것이었다. 일어나라.”

“감사하옵니다.”

린델은 카시어스의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시어스가 애매하게 웃고 있었다.

“설레게 왜 이러는 것이냐?”

“이제는 떨지 않고 할 수 있습니다.”

충성 맹세는 충동적인 것이었다. 대신전에서 본 제의의 영향이었다. 이유를 소리 내어 말하기가 부끄러워서 린델은 적당히 둘러댔다.

“말은 잘하지.”

“이제 물러나겠습니다.”

“허락한다.”

린델은 카시어스에게 인사를 하고는 세투아와 함께 사실을 빠져나왔다. 오늘은 세투아가 린델의 가디언이었다. 린델은 그와 함께 연회장으로 가서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궁내청장이 세심히 신경 쓴 향연은 매우 훌륭했다. 음식도, 공연도 흠잡을 것 하나 없었다. 마탑의 수다스러운 원로들에게 둘러싸인 린델은 카시어스의 말대로 꽤나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

향연이 열리는 동안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작은 사고는 그다음에 이어진 무도회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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