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지난번 사냥대회의 연회에서 한 번 인사드린 적이 있습니다.”
“제 아버님이 하스넨 남작님과 동문이셨죠.”
“제가 보낸 선물이 마음에 드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자리가 정해져 있던 향연과 달리 무도회에서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있었다. 덕분에 린델의 주위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궁정 사교계에서 린델의 위치를 정치적으로 따지자면 친황제파에 속하는 평민 마법사였다. 공식적으로는 황제를 피후견인으로 두었고, 비공식적으로는 황제의 애인이었다. 린델이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교계 인사는 없었다.
황제가 애인을 백장미 궁에 머물게 하다못해, 이번에는 살인 누명을 벗기고 제 신분을 찾아주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궁정 사교계에서 권력의 척도는 황제의 총애였다. 황제는 요란하고도 노골적으로 굴었고, 덕분에 오늘 무도회에서 린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어떻게 해서든 린델과 연결 고리를 만들어서 인사를 하면서 눈도장을 찍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모여들었다.
예의 바른 환영도, 판에 박힌 안부도, 혹은 중의적인 악의도 린델은 모두 받아넘겼다. 황제의 측근으로 지내려면 그에 걸맞은 처세가 필요했다. 상대의 이름을 외우고 성향을 파악하고 적당히 거리를 두는 법을 배우는 중이었다.
지금껏 린델은 호의로서 사람을 대해야 한다고 배워왔다. 하지만 궁정 사교계에서 만만하게 보이면 안 된다는 것을 이미 몸으로 경험했다. 거기에 카시어스의 충고도 더해졌다. 적극적으로 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린델은 쏟아지는 인사에 사무적으로 굴었다. 뒤에서는 너무 딱딱한 게 아니냐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조심하는 게 최선이었다.
사실 어렵지도 않았다. 사교계 인사들은 대부분 수다쟁이어서 맞장구만 치면 끊임없이 이야기가 이어졌다.
대부분은 자기 자랑이었다. 누구 백작이 아주 멋진 말을 가지고 있다. 멋진 요트를 가지고 있다. 멋진 성을 가지고 있다. 멋진 것을 가지고 있다는 자랑 다음에는 초대로 이어졌다. 린델은 기회가 된다면 찾아뵙고 싶다고 무난하게 대답했다.
“어머, 저기 저분이 테누안의 왕세자시죠?”
이런저런 이야기 중에 누군가가 막 입구에 들어선 남자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너 나 할 것 없이 말을 보탰다.
“향연 중에 숙소로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 다시 오신 모양이네요.”
“공주님은 이번에도 동행하지 않으신 것 같은데요?”
“그럴 수밖에요. 수치를 안다면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겠죠. 적어도 황궁 안에서는 말이에요.”
“황제 폐하께서는 자비로우시다니까요. 저라면 당장에 내쫓았을 텐데.”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냉소와 비웃음이 담겨져 있었다. 린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루터 왕세자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사실 자신은 루터 왕세자나 리세나 공주에게 개인적으로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욕심 때문에 무모하게 일을 벌였다고 생각했지만 린델의 입장에서 그들에 대해 무어라 말하기란 어려웠다. 그들은 타국의 왕족이었고 약혼과 파혼은 정치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사실 린델이 신경 쓰는 것은 따로 있었다. 린델은 루터 왕세자의 이야기를 흘려들으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권좌에 앉은 카시어스가 여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 향연과 무도회에는 타국의 귀빈들이 다수 참석했다. 할엔라드 제국은 여러 속국을 거느리고 있었고, 그란디스 메시스는 공식적인 하례 행사가 있었다. 그란디스 메시스의 첫째 날은 대신전에서 신들께 제의를 올렸고, 둘째 날과 셋째 날에는 황궁에서 속국이 바친 하례품을 선보이는 것이 순서였다.
할엔라드 제국의 힘이 강해질수록 하례품의 목록은 길고 화려해지고, 귀빈들의 신분도 높아졌다. 제국은 과거 어느 때보다 강력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남부 내전이 끝나고 두 번째로 맞이한 그란디스 메시스에 참석한 귀빈들의 신분은 왕과 왕족이 대부분이었다.
카시어스와 나란히 앉은 이들은 모두 한 나라의 지배자였다. 그들 중에 가장 눈에 띄는 이는 유일한 여자인, 엣썬의 여왕이었다.
린델은 그녀가 카시어스의 옛 애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자로 태어나 황제가 된 카시어스는 스물아홉 살이 된 지금까지 독신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애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없는 게 이상했다. 그래도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기분이 꽤나 별로였다.
탐스러운 갈색 머리를 틀어 올리고 다이아몬드로 된 티아라를 쓴 그녀는 누가 봐도 우아한 미녀였다. 카시어스의 바로 옆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꽤나 친밀해 보였다.
며칠 전, 카시어스가 샤트밀 후작 영애에게 너무 웃어주지 말라고 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올리비아 여왕은 아름다웠고 카시어스와 나란히 있자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시큼하게 가슴을 채웠다. 어쩌면 자신은 카시어스처럼 훼방을 놓을 수 없어서 더욱 속이 쓰린 건지도 몰랐다.
“올리비아 여왕께서는 여전히 아름다우시네요.”
린델이 카시어스와 여왕을 바라보고 있자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린델이 옆을 보자 멜라인 자작 부인이 부채를 흔들며 웃고 있었다. 멜라인 자작 부인은 린델에게 가장 값비싼 선물을 보내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어필한 사람 중에 한 명이었다. 동글동글하고 순한 인상과 달리 궁정 사교계에서 모르는 소문과 가십이 없다고 알려진 정보꾼이며 수다쟁이로 유명했다.
즉, 그녀 앞에서 제대로 표정 관리를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린델은 의도적으로 웃지도, 인상을 쓰지도 않았다.
“폐하와 여왕께서 나란히 계시니 눈이 부실 지경입니다.”
“호호호. 따지자면 폐하의 미모를 따를 여인이 없지요. 린델 경께서는 모르시겠군요. 10년 전에는 정말 폐하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는 것이 어려웠답니다.”
10년 전이면 카시어스가 열아홉 살 때였다. 린델은 카시어스의 나이를 가늠하며 그때를 상상해 보았다.
열아홉의 카시어스라니.
어떤 모습일지 그려지지 않았다.
“굉장히 아름다우셨겠죠?”
“그럼요. 물론이죠. 파티에 참석하시면 쓰러지는 아가씨들이 속출했었답니다.”
린델이 관심을 보이자 멜라인 자작 부인이 흥을 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선황께서 황궁 파티에서는 가면을 쓰라고 하셨을 정도니까요.”
“수많은 아가씨들이 간절히 바라보는데도 불구하고, 춤 신청 한 번 하지 않은 것도 유명하셨습니다.”
“그때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과히 즐기지 않으셨지요.”
사람들의 입에서 카시어스의 과거 이야기가 줄줄이 흘러나왔다. 올리비아 여왕과의 만남에 대해서도 언급되었다. 엣썬의 선왕은 올리비아 여왕의 큰 오라버니였는데, 사람을 고문하고 비명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의 광증이 깊어졌고 결국 부인은 물론이고 아들과 딸, 그리고 형제들까지도 누명을 씌워 죽이고 말았다.
당시 올리비아 여왕은 할엔라드에 시집을 왔다가 남편이 죽어 미망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큰 오라버니에게 자신은 물론 두 아들까지 목숨을 위협받게 되자, 그녀는 제국의 황제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그녀는 황제의 애인이 되었고 제국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성공시켰다. 그리고 엣썬의 왕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인생 또한 이야기책에서나 나올 법한 것이었고, 오랫동안 회자되고 있었다.
린델은 올리비아 여왕과 자신의 시작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 카시어스에게 도움을 받았다. 그건 카시어스가 곤경에 빠진 이를 돕는 성자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철저하게 계산적이었다. 지리적으로 엣썬 왕국은 시아무크 제국과 할엔라드 제국의 완충 지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카시어스의 입장에서는 우방국인 엣썬의 안정이 먼저였기에 올리비아 여왕을 지지한 것이었다. 자신의 경우에는 디비티에라는 쓸모에 의해 카시어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어쨌든 비슷하다고 생각하자 또다시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번에는 조금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질투라는 감정의 색은 다채로웠다.
“너무 한곳에 계신 것 같습니다. 좀 걸으실까요?”
린델의 옆에 서 있던 제라르가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향연에서는 세투아가 가디언을 자처했지만, 무릎 관절이 좋지 않은 탓에 무도회에서는 의자의 신세를 져야 했다. 덕분에 지금은 제라르가 린델과 함께했다.
쏟아지는 정보와 코를 찌르는 향수 냄새에 어지러웠던 린델은 제라르의 제안을 내심 반겼다. 두 사람은 양해를 구하고 무리에서 벗어났다. 바람을 쐬기 위해 무도회장과 이어진 정원으로 빠져나갔다. 선스톤으로 밝혀진 정원은 대낮처럼 불빛이 환했다. 정원 중앙에 위치한 분수까지 무도회장의 연장선상으로 꾸며져 있었다. 춤을 추는 대신에 산책을 하거나 의자에 앉아 대화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제라르는 린델과 나란히 걸으면서 따라오는 기척을 살폈다. 거리를 두고 신중히 뒤를 쫓는 이들은 모두 셋이었다. 그것도 모두 제대로 무도를 배운 자들이었다. 황궁 안에서 호위를 붙일 정도로 황제는 린델을 과보호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을 통해 린델에게 일어난 일들이 황제에게 보고되는 것은 덤이었다.
“다른 건 괜찮았는데, 오델 자작의 향수 냄새가 너무 독해서 머리가 아팠어요. 바람을 쐬니 이제야 살 것 같네요.”
황제의 철저함에 혀를 차던 제라르는 린델의 한숨에 정신을 차렸다. 향기로운 술과 음식에, 사람들이 넘쳐나는 무도회장에는 다채로운 향기가 뒤섞였다. 그중에서도 린델이 말한 오델 자작은 독한 향수를 뿌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제라르 역시 오델 자작의 고약한 향기를 떠올리며 콧잔등을 살짝 찌푸렸다.
“지독하긴 했죠. 슬픈 이야기지만, 그의 몸에서 나는 체취보다는 독한 향수가 낫습니다.”
제라르는 오델 자작의 몸에서 나는 악취에 관한 몇 가지 에피소드를 린델에게 전했다. 사교계의 신인인 린델에게는 다양한 정보가 필요했다. 제라르는 린델과 함께하는 이 순간을 아주 소중히 여겼다. 황제의 훼방을 받지 않고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더 이상 숨길 것이 없는 린델은 과거 이야기를 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수확제를 앞두고는 정신없이 바빠지죠. 대청소가 있거든요. 매일같이 쓸고 닦지만, 천장 같은 곳은 특별한 날에만 청소를 하거든요. 사다리로도 닿지 않아서 발판을 만들고는 마을 청년들이 모두 동원되는데, 1년 동안 쌓인 거미줄을 걷어내고 먼지를 털어내고 난리도 아니죠. 장소가 천장이다 보니 다들 허리를 뒤로 젖혀서 일을 하다 보니, 일이 끝나고 나면 입에서 막 아고고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게 되어 있어요.”
린델은 훌륭한 화자였다. 자신의 경험을 생동감 있게 전하는 데 뛰어났다. 손짓을 해가며 설명하는 린델은 즐거워 보였다.
정원을 밝히는 불빛 아래 린델은 환하게 빛났다. 그의 기분을 반영하듯 눈빛도 표정도 반짝거렸다. 제라르는 사람에게 반하는 순간이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함께하면 기분 좋은 감각에 호의를 마음에서 키웠다. 함께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기회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 순간, 린델의 우아하게 뻗은 눈썹과 콧날이, 입술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린델 경.”
“예. 말씀하세요.”
이름을 부르자 린델이 돌아보았다.
“저는…….”
제라르는 고백을 하고 싶은 충동에 입술을 달싹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