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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88/137)

-88화-

그러나 냉철한 이성이 제라르를 말렸다. 고백을 받은 린델이 당황할 것이라는 것과, 지금처럼 곁을 내주지 않을 거라는 불길한 미래가 머리를 스쳤다.

마음을 졸이는 대신에 깔끔하게 차이는 것이 홀가분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건 자신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제라르는 지금껏 요령 좋게 살아왔다. 원하는 것을 손쉽게 가졌고 가질 수 없는 것은 쉽게 포기했다. 하지만 린델만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런 게 짝사랑인가 보다. 제라르는 자신이 온갖 고전에 등장하는 불쌍한 남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제라르 경?”

고개를 갸웃거리는 린델은 귀엽기만 했다. 이 모습을 다시 못 보는 건 사양이었다. 제라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려고 할 때였다. 예상 밖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이런. 제라르, 여기서 만나는군.”

제라르도 린델도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옆쪽에서 데스탄이 웃으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그와 어울리는 귀족 자제들이 여럿이었다.

그들이 길을 막다시피 했기에 두 사람은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제라르의 경우 지난 결투 이후로 데스탄과의 얄팍한 우정은 박살 난 상태였다. 그리고 린델은 마차 습격 사건의 배후가 데스탄이라는 것을 알게 된 다음에 그를 적으로 여기고 있었다.

우연찮게 마주친다고 해도 웃으면서 환담을 나눌 상대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건 결투가 빌미가 되어 북관으로 쫓겨났다가 손가락을 잃은 데스탄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로 본 체 만 체하며 지나쳐도 무방한 사이였다. 그런데 일부러 데스탄이 말을 걸어온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라고 제라르와 린델은 저마다 생각했다.

이름을 불린 제라르가 살짝 앞으로 나서서 데스탄을 상대했다.

“오랜만이군, 데스탄. 딱히 할 말은 없으니 이만 실례하도록 하지.”

“섭섭한걸? 우리 사이에 이렇게 딱딱하게 굴 건가?”

제라르가 우연하게 피하려고 했지만 데스탄이 일부러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도회장에서 정원으로 이어지는 계단 바로 앞이라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곳이었다.

뜻하지 않게 대치를 하게 된 탓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도 그럴 것이 데스탄과 제라르가 지난 결투 이후로 사이가 나빠졌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그 시발점이 된 황제의 애인이 또다시 같은 자리에 있었다. 흥미진진한 상황이었다.

제라르는 속으로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일부러 사람들의 이목을 끈 데스탄의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우리 사이에 딱딱하게 굴면 또 어떤가?”

“오랜 친구 입장에서 자네 꼴이 조금 안타까워서 말이야. 그 대단한 실력으로 고작 하는 일이 남……. 아, 입에 담기 어려운 폭언은 삼가야겠지. 오늘은 신들께 경배를 드리는 아주 중요한 날이니까. 그러니까 어쨌든 자네 같은 인재가 근본도 없는 고아의 뒤꽁무니나 따라다니고 있다니. 자네의 화려한 경력에 큰 흠이 될 것 같아, 오랜 친구로서 걱정이 든다네.”

싱글싱글 웃는 데스탄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제라르의 걱정이 아니라 린델의 모욕이었다. 데스탄을 위시한 젊은 청년들도 비웃음을 흘렸다.

길을 가로막은 이유가 너무 저열해서 제라르는 차마 옆에 선 린델을 돌아보지 못했다. 린델의 주위에는 그의 환심을 사려는 이들이 모여들어 아부를 해댔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서는 험담이 쏟아졌다.

근본 없는 고아는 린델을 지칭하는 가장 양호한 단어였다. 황제를 홀린 요부, 더러운 남창, 주제도 모르는 암캐. 황제의 지극한 총애에 대한 반작용으로 린델을 향한 시기와 질투 역시 엄청났다. 워낙 황제가 싸고도는 덕분에 린델의 귀에 고약한 험담이 흘러들어 가는 일이 없긴 했다. 데스탄도 중간에 말을 멈추긴 했지만 그가 흘리는 뉘앙스가 무엇을 뜻하는지 린델이 모를 리 없었다.

사교계에서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거는 것은 공공연한 적이 된다는 의미였다. 이미 관계가 틀어졌으니, 이번 경우는 그냥 모욕을 주는 것으로 분풀이를 하는 것이었다.

제라르는 발끈하며 덤벼드는 대신에 같이 싱긋 웃어주었다. 궁정 사교계에서 잔뼈가 굵은 제라르는 우선 화제부터 바꾸었다.

“자네가 나를 걱정해 주다니. 내일 서쪽에서 해가 뜨지 않을까 겁이 다 나는군. 아, 그것보다는 손을 다쳤다고 들었네. 그것도 오른손이라는 소리에 나야말로 자네를 걱정했어. 칼을 쥐는 것은 괜찮은가?”

제라르는 턱 끝으로 장갑을 끼고 있는 데스탄의 오른손을 가리켰다. 데스탄에게도 약점이 여럿 있었다. 크게 이슈가 되지 못했지만 데스탄은 그의 형인 니콜라스와 후계자 싸움 중이었다. 둘 다 총기 사고를 당했지만 황제의 도움을 받아 말끔하게 나은 니콜라스와 달리 제라르는 오른손의 약지를 잃었다. 충분히 통탄할 만한 일이었다.

제대로 속을 긁은 듯 데스탄이 미간을 찡그렸다.

“물론이지. 아무 문제가 없네.”

“다행이야. 자네의 빛나는 재주가 퇴색된다면 나야말로 퍽이나 아쉬웠을 테니. 아, 그렇다면 예전처럼 다시 대련을 할 수 있을까? 우리의 우정을 생각해서 말이야.”

“물론이네. 언제든지.”

“그렇다면 필라무트의 제전에 같이 참가하지 않겠나? 궁내청장께 말씀드리면 한 자리를 마련해 주실 텐데. 어떤가?”

필라무트의 제전이란 말에 두 사람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사람들이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그란디스 메시스가 열리는 열흘 동안, 황제가 주최하는 온갖 연회와 공연, 경기가 열렸다. 그중에서도 전투의 신인 필라무트를 기리는 검투대회는 젊은 근위기사들의 단발 결투였다. 승자에게는 황제가 직접 선물을 하사하는데다가, 서로의 자존심이 걸려 있기에 피투성이가 되고도 칼을 놓지 않았다.

서로 앙숙이 된 제라르와 데스탄이 다시 결투를 하게 된다면 볼만한 구경거리였다. 우아한 제안을 거절했다가는 자존심 문제가 된다. 사냥 대회와 똑같은 패턴이었다. 덫에 걸린 것을 알아차린 듯 인상을 구기던 데스탄이 곧 웃음을 지었다.

“좋아. 문제없지. 여러분, 저와 제라르가 필라무트의 제전에 참석할 겁니다. 많이들 보러 와주십시오.”

데스탄이 매끄러운 목소리로 사람들의 주목을 끌자 다들 환호를 보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불리한 것은 데스탄이었다. 그런데 그가 나서서 주목을 끄는 모습에 제라르는 의아함을 느꼈다.

“황제의 배행 마법사. 그대도 꼭 구경하러 오기를 바라.”

지금껏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데스탄이 처음으로 린델을 보았다.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린델은 자신을 바라보는 데스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경멸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카시어스는 적극적으로 적을 만들지 말라고 했지만 뭔가 한마디 하고 싶었다. 어차피 데스탄과의 사이는 좋아질 것도 없었다.

“결과는 지난번과 같을 텐데, 그다지 흥미롭지 못한 대결일 것 같습니다. 데스탄 경.”

린델은 웃지도 않고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일부러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고 한 것은 몇 번 되지 않았다. 그것도 높으신 신분의 귀족은 처음이었다. 있는 대로 용기를 끌어모았지만 심장이 떨렸다. 그래도 해야 할 말은 해야 했다.

너 따위는 제라르의 상대가 되지 못해.

가벼운 도발에 린델의 차가운 표정은 데스탄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데스탄은 얼굴이 일그러뜨리며 으르렁거렸다.

“못 하는 말이 없군.”

“사실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그 뻣뻣한 태도가 화를 불러들이는 거야, 황제의 배행 마법사.”

“충고 감사드립니다, 데스탄 경.”

린델은 끝까지 사무적이었고 그래서 데스탄은 더욱 이가 갈렸다. 그는 처음부터 린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 주제도 모르고 황제에게 붙어 호의호식하는 모습이 꼴불견이었다. 얌전하게 고개를 숙이고 고분고분하게 구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황제를 충동질해서 자신을 북관으로 보내게 했다. 세상 무서운 것 없이 도도하게 굴던 황제가 천하디천한 남창에게 휘둘렸다. 웃기다 못해 속이 터지는 사실이었다.

데스탄은 자신이 북관으로 쫓겨난 것이 린델의 탓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로 인해 손가락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모든 불운의 원인은 린델이었다.

평소 성질대로라면 뺀질뺀질한 린델의 뺨을 당장에라도 후려쳐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린델의 뒤에는 황제가 있었다. 신분이야 미천했지만 린델은 황제의 배행 마법사였다. 아무리 자신이 공작의 아들이라도 기분대로 손찌검을 했다가는 처벌을 피할 수 없는 상대였다. 그래서 더 속이 쓰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손을 쓰고 싶었지만, 마차 습격이 실패하고 나서는 린델의 호위에 틈이 없어서 기회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이 빌어먹을 새끼를 괴롭힐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데스탄은 근질거리는 오른손에 주먹을 쥐고는 한쪽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폐하께서 아무리 신들의 가호를 받으신다고 하더라도 너무 무모하시단 말이지. 출신을 알 수 없는 자를 기용하다니. 카울루스의 창이라는 아주 훌륭한 전례가 있는데. 안 그래?”

카울루스는 유명한 배신자의 이름이었다. 반역자의 자식으로 신분을 속이고 황제의 총신이 되어 부와 영광을 누리다가, 결국 황태후를 암살하려다가 교수형을 당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린델을 조롱하기 위한 것이었다.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던 사람들이 잠시 말을 멈출 정도의 모욕이었다.

린델에게는 고아라는 신분이 약점이었다. 하지만 린델은 데스탄의 조롱에 그다지 타격을 받지 않았다.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데스탄의 시비 따위야 간지럽지도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카시어스의 명예에 오점이 되는 것은 별로였다.

카시어스는 미래에 쓰일 역사 따위야 자신이랑 상관없다고 했다. 현재의 행복이 중요하다면서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린델은 그럴 수 없었다. 카시어스는 훌륭한 황제로 칭송받아야 했다.

무도에 재주가 있었다면 결투를 신청했겠지만 그건 무리였다. 그러니 남은 것은 말로서 그의 기세를 꺾는 것뿐이었다.

“데스탄 경의 충심이 감동스럽습니다. 제가 폐하께 과분한 사의를 받았으나, 안타깝게도 어심을 헤아릴 수 없어 경의 질문에는 답을 드리지 못하니 양해해 주십시오.”

“그 매끄러운 혓바닥을 폐하께서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그것 또한 알지 못한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어서 죄송합니다. 아, 데스탄 경께서 폐하께서 아끼시는 혈육이시니 직접 의중을 여쭤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황제가 날 총애하는 이유가 궁금하다면 직접 물어봐라.

세련되지 못한 화법이었지만 데스탄에게 타격을 주기는 충분했다. 물론 데스탄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그래서 더욱 그랬다.

잠시의 정적이 흘렀다. 구경꾼들은 부채를 흔들며 상황을 파악했다. 자존심을 내세운 유치한 말싸움에서 승패는 누가 먼저 흥분하고 말문이 막히냐로 갈라졌다. 누가 봐도 린델이 이긴 싸움이었다.

제일 놀란 사람은 제라르였다. 평소 조심스러운 성격의 린델이 이렇게 호전적일 줄은 몰랐다.

데스탄 역시 자신이 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인정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신이 천한 남창에게 당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이 천박한 놈이.”

“고귀하신 분의 심기를 어지럽혀 드려서 죄송합니다.”

“이놈이 끝까지.”

“끝까지 예의 바르군. 안 그런가?”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데스탄의 말을 끊는 사람이 있었다. 근위시종들을 대동한 황제가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린델은 물론, 제라르와 데스탄과 구경꾼들이 분분히 허리를 굽혀 황제에게 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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