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0/137)

-90화-

“테누안에는 아직 장미의 심판이 남아 있습니다, 폐하.”

“이런. 장미의 심판이라면 확실하겠지.”

카시어스는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장미의 심판이라면 루터 왕세자가 배짱을 부릴 만도 했다.

장미의 심판, 혹은 숨결의 장미라고 불리는 것은 대륙에 몇 남지 않은 영구 마법 중에 하나였다. 고요정시대의 끝자락에 왕비의 부정을 의심한 국왕이 대마법사에게 의뢰를 하여 아들의 친자 여부를 밝히는 마법을 만들게 했다. 사시사철 꽃봉오리를 맺는 장미는 한 혈통의 직계 자손의 숨결에서만 피어났다.

일종의 혈통 확인 마법은 몇 세대에 걸쳐 크게 유행했고, 지금도 적지 않은 나라와 가문에 남아 있었다. 제국에도 같은 역할을 하는 장미가 존재했다.

린델이 테누안의 막내 왕자라면 장미를 피울 것이다. 그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였다.

“다만 그렇게 되면 시일이 오래 걸린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린델리프를 테누안으로 초대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건 힘들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장미를 가지러 테누안을 왕복하려면 아무리 말을 빨리 달려도 보름은 넘게 걸릴 겁니다. 시간을 오래 끌기보다는 신속히 결론을 내리는 것이 좋을 듯한데, 폐하의 의중을 여쭙고 싶습니다.”

루터 왕세자는 의도가 뻔히 읽히는 질문을 했다. 기회주의자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 모습에 카시어스는 심술을 부리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루터 왕세자의 말대로 이런 일은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이 옳았다.

“그대의 말대로 신속히 결론을 내리는 것이 옳다. 그리핀이라면 테누안을 왕복하는 데 하루면 충분하겠지. 장미를 여러 송이 준비해야 할 것이다, 루터 왕세자. 심판은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황제 폐하. 부왕과 왕비께서도 린델리프를 찾았다는 소식을 들으시면 감격하실 겁니다.”

루터 왕세자는 린델이 자신의 동생이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장미가 피기 전까지는 확신하지 않는 것이 좋다. 루터 왕세자.”

“15년 만에 막냇동생을 찾았다고 생각하니 들뜨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겠지. 이제 그만 무도회장으로 돌아가서 즐기도록 하라.”

“지금 제 동생을 만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린델은 황제의 명령으로 퇴장한 상태였다. 루터 왕세자는 가능한 빨리 막냇동생을 만나고 싶었다. 충격을 받고 있을 동생을 달래고 제 편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하지만 카시어스는 여지를 주지 않았다.

“재회는 장미가 피고 난 다음이어도 늦지 않아.”

“폐하. 그는 제 동생입니다.”

“아직은 아니지. 그리고 영원히 아닐 수도 있다.”

카시어스는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린델을 봐서라도 어느 정도 기어오르는 건 봐줄 수 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한껏 들뜬 루터 왕세자도 그건 알아들었다. 그러나 며칠 전과 달리 오늘의 경고는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

“저는 그가 제 동생이라는 것을 확신하지만, 신중한 것이 좋겠지요. 물러가옵니다.”

그대로 뒤돌아 나가는 루터 왕세자의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웠다. 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 카시어스는 몇 번째인지도 모를 쓴웃음을 삼켰다.

지금 무도회장으로 돌아간 루터 왕세자는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린델이 자신의 남동생이 맞다며 한껏 떠들어댈 게 분명했다. 여동생을 값비싸게 팔아먹으려고 했던 위인이었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남동생의 값을 얼마나 매겨야 할지 머리를 굴릴 것이다.

일국의 왕족이나 귀족에게 가족이란 민가에서처럼 두터운 정을 나누는 관계가 아니었다. 서로를 이용하기에 바빴다. 계승권을 가진 형제의 경우는 견제하고 짓밟았다. 국가의 이익을 위한 희생을 당연하게 요구했다.

카시어스에게도 가족이 그러했다. 형제들에게 견제받았고, 충성심을 매번 시험받고 증명해야 했다.

테누안 왕가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었다. 카시어스는 루터 왕세자에 관련된 기억을 하나 더 떠올렸다. 타국의 사건 사고는 잘 알려지지 않는 법이었다. 그러나 당시 카시어스에게는 테누안 출신의 가정교사가 한 명 있었고, 그에게서 좀 더 은밀한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다. 리세나 공주의 생일 파티가 열리던 배가 바다에 가라앉은 것은 루터 왕세자 측에서 손을 쓴 것이라는 것이었다.

테누안 국왕의 첫 번째 부인이자 루터 왕세자의 어머니가 되는 셰인 왕비는 병으로 일찍 죽었다. 그리고 후비인 크리스틴 왕비가 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녀는 두 명의 왕자와 고대하던 딸을 낳아 왕을 기쁘게 만들었다. 크리스틴 왕비가 낳은 왕자가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셰인 왕비의 소생인 루터 왕세자와 그의 외가의 입지가 점점 좁아진 것은 당연했다.

그러던 와중에 배가 침몰했다. 크리스틴 왕비는 두 명의 왕자를 모두 잃으면서 신경 쇠약에 걸렸다. 그리고 왕의 하나뿐인 아들이 된 루터 왕세자는 아무 견제 없이 제 세력을 키웠다.

지금은 와병 중인 테누안의 국왕을 대신해 루터 왕세자가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린델의 등장이 그의 위치를 위협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루터 왕세자가 린델을 살뜰히 아낄 리는 없었다. 이권을 챙기기 위해 이용할 건 뻔한 일이었다.

“쯧.”

카시어스는 가볍게 혀를 찼다. 테누안의 국왕도, 그리고 왕세자도 그리 썩 믿을 만한 자들이 아니었다.

린델이 가족에게 얼마나 얽매이느냐가 문제였다. 부모님이 보고 싶다고 테누안으로 가고 싶어 할 수도 있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자신의 손을 떠난 녀석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린델을 불러라.”

카시어스는 대기하고 있던 시종장에게 지시했다. 목적을 위한 수단은 여럿이었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했다.

테누안의 루터 왕세자와 리세나 공주의 인사를 받은 카시어스는 린델에게 퇴장을 명령했다. 린델은 잠시 고민했지만 명령을 거역하지 않고 따랐다. 카시어스가 모든 것을 이야기해 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백장미 궁으로는 돌아가지 않았다. 황제의 사실에 안내되어 카시어스를 기다렸다. 그동안에 린델은 제라르와 이드나카에게 테누안이 잃어버린 왕자에 대해 아는 게 있냐고 물어보았지만 소득이 없었다.

제라르는 아예 모르는 일이라고 했고, 그나마 이드나카만이 아주 큰 사고가 있었다는 것 정도만 기억하고 있었다. 타국의 소식은 쉽게 전해지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에 이드나카가 테누안에 대해 알려주었다. 대륙의 남쪽 끝에 위치한 왕국은 기후가 온난하고 살기 좋은 곳이라고 했다. 제국에 복속된 지 오래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테누안에는 아직 국왕과 왕비가 살아 계십니다.”

이드나카의 이어지는 설명에 린델은 앉은 자리에서 눈을 깜빡거렸다.

왕과 왕비.

그러니까 실종된 왕자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뜻했다. 어쩌면 자신의 부모님일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머리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가족을 찾기를 간절히 바랐다. 근본도 없는 고아라는 소리를 듣기 싫었다. 시커먼 구멍과도 같은 아득한 과거가 무서웠다.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신전의 제대 앞에 무릎을 꿇고 신께 얼마나 빌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현실적으로 가족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는 기도하는 것을 멈췄다. 그저 평안한 삶을 살기를 바랐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가족을 찾았다. 그것도 일국의 왕자란다. 자신이 테누안의 잃어버린 왕자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분들이 제 부모님이……. 그러니까 루터 왕세자께서 착각하신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왕세자가 되시는 분이 이런 중요한 일을 착각하실 리 없지요. 그리고 제가 보기에도 린델 님과 리세나 공주님은 무척이나 닮았습니다. 그건 확실합니다.”

“닮았다고 다 혈연인 건 아니죠.”

“세상에 닮은 사람은 여럿 있다고 하니 그럴 수도 있겠지요.”

린델은 신중하게 굴었지만 이드나카는 거의 확신했다. 서로 마주 보던 두 사람은 남녀 쌍둥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아주 닮아 있었다. 그리고 아무 확신도 없이 루터 왕세자가 일을 벌였을 리 없었다.

이드나카는 그래도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린델을 보며 운명에 대해 생각했다. 고아 출신에 살인자로 쫓기던 청년이었다. 도주 중에 황제를 만나 총애를 받게 된 것도 놀라운 일인데, 이제는 그의 신분이 왕자라고 했다. 어느 이야기 속의 주인공의 운명이 이렇게나 극적일까 싶었다.

황제가 린델을 후궁으로 삼을 거라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황제의 총애는 이미 지극했다. 걸림돌이라고 할 만한 것은 그의 신분뿐이었다. 물론 황제가 무시하면 그만이긴 했지만, 그가 테누안의 왕자라면 그것조차 필요 없었다.

이드나카는 린델이 여인이 아니라는 것이 내심 아쉬웠다. 그가 여자였다면 황후가 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랬다간 빅토리아 황태녀와 정적이 될 테니, 그건 좋지 못한 일이었다. 린델이 황제의 애인인데도 불구하고 황태녀와 사이가 좋은 것은, 그가 남자이기 때문이었다.

황궁의 권력 구도를 가늠하고 있던 이드나카가 잠시 입을 다무는 사이에 제라르가 말을 이었다.

“저는 린델 경이 막내 왕자였으면 좋겠습니다.”

“제라르 경?”

“그렇게 되면 데스탄이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할 겁니다. 그 녀석이 린델 경께 정중히 인사를 해야 할 테니, 그 모습을 보고 싶군요.”

제라르가 심술궂게 말했다. 무도회장에서 린델이 당한 모욕을 생각한다면 데스탄이 일찍 떠난 것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린델이 테누안의 왕자가 맞다면 공작의 아들인 데스탄보다 격이 높다. 제국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해상 무역의 중심지 중에 하나인 테누안은 물류가 넘치는 부국이었다. 자존심 강한 데스탄의 얼굴이 일그러질 걸 상상하는 게 즐거울 정도였다.

마냥 기뻐하기에는 복잡한 상황이긴 했다. 린델이 테누안의 왕자라면 제라르에게는 기회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제라르는 린델이 모욕을 받는 것보다는 그게 나았다.

가벼운 농담에 진지하기만 하던 린델이 활짝 웃었다.

“이번에도 제라르 경이 복수를 해주시니 미리 감사하다고 인사드리겠습니다.”

“응원을 받았으니 녀석을 멋지게 때려눕히도록 하죠.”

“아주 기대하겠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근위시종이 찾아와 황제의 부름을 알렸다. 린델은 제라르에게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도회장을 통하지 않고도 황제의 휴게실로 가는 길이 있었다. 근위시종의 안내를 받아 휴게실에 도착한 린델은 카시어스에게서 간단히 설명을 들었다.

리세나 공주의 선상 생일 파티, 폭발 사고, 실종된 막내 왕자. 왕자의 이름과 나이, 외모, 날짜까지 모든 것이 린델의 정황과 맞아 떨어졌다.

“착각일 수 있지 않을까요?”

린델은 이드나카에게 했던 질문을 다시 했다. 배가 가라앉았다는 날과 자신이 바다 위에서 발견된 날은 하루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확률은 아주 높았다. 하지만 그래도 린델은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따지고 싶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진위 여부를 가리는 건 어렵지 않아.”

“어떻게요?”

“혹시 장미의 심판이라는 것을 들어본 적 있느냐?”

“네. 설마……. 제가 그걸 하게 되나요?”

성서를 몇 번이나 정독한 린델은 장미의 심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직계 핏줄의 숨결에만 만개하는 장미의 존재는 여러 이야기 속에서 등장했다.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장미가 너를 증명할 거야.”

“그게…… 그렇군요.”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서 이상하게 대답했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린델은 정정할 여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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