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가족이 생긴다. 아니, 생길 수도 있었다. 그 가능성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가슴이 시리도록 뛰었다.
“표정이 좋지 못하군. 기분이 어떠냐?”
린델은 멍하니 카시어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늘 자신의 기분을 물어왔다. 그럴 때면 기분과 생각을 정리하기 좋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잘 모르겠어요. 실감이 안 나요.”
“그들이 가족이길 바라느냐?”
“그것도,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린델은 제대로 대답을 못 하는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진짜 실감 나지 않았다. 카시어스는 입매를 당겼다. 평소 빠릿빠릿하게 굴던 녀석이 반응이 느렸다. 확실히 충격이긴 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루터 왕세자는 기회주의자다. 그가 네 형제가 된다고 하더라도 기대를 많이 하지는 마라.”
“……그런가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카시어스가 다가와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손의 온기에 조금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돌아가서 쉬어라. 장미의 심판은 모레나 되어서 있을 거다. 그때까지는 아무도 만나지 말고 있어라.”
“예.”
“나중에 보자.”
“알겠습니다.”
아까와 같은 인사였지만 린델의 반응은 달랐다. 빠릿빠릿하던 녀석이 느리게 눈을 깜빡거리며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것도 귀엽다고 생각하며 카시어스는 린델의 볼을 살짝 꼬집고는 물러났다.
카시어스가 손짓을 하자 시종들이 달라붙어 그의 옷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린델은 아직 무도회가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자신이야 이대로 돌아가면 그만이었지만 카시어스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린델은 카시어스가 제국의 황제라는 것을 상기했다. 그리고 제국과 테누안의 관계는, 정확히 카시어스와 테누안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도 떠올랐다.
“폐하.”
린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를 불렀다. 시종들의 손길에 몸을 내맡기고 있던 카시어스가 돌아보았다.
“왜 그러느냐?”
“제가, 제가 만약에 테누안의 왕자라면 문제가 되겠지요?”
린델은 어떤 가능성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카시어스의 말대로 테누안의 왕세자가 기회주의자라면 오랜만에 찾은 막냇동생이 황제의 애인이라는 사실을 이용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는 여동생을 두고 황제와 흥정을 하려고 했다.
그것 외에도 타국의 왕족이 마탑의 마법사가 되는 것도 곤란해질 것이다. 마탑은 제국의 가장 비밀스러운 무력 집단이었다. 어떤 마법이든 그것은 제국의 자산이었고 힘이었다.
자신이 아무 배경 없는 고아일 때보다, 테누안의 왕자라는 것이 정치적으로 더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제가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여러 가지로 폐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가족을 찾은 것은 기쁜 일이지만, 카시어스에게 폐가 되는 것은 싫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했다.
린델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카시어스는 기뻐하기보다는 걱정부터 하는 린델을 보며 웃었다. 왕자가 되어 누릴 수 있는 것을 기대하기보다는 제 위치를 확인하는 녀석은 확실히 믿음직스러웠다. 그래서 그를 좋아했다.
“글쎄, 신분이 아니라 국적이 바뀌는 것이니 충성 맹세는 무효가 되겠지.”
“정말요?”
“마탑의 입회도 무효가 될 테지.”
“충성 맹세가 무효라니. 말도 안 됩니다!”
린델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충성 맹세가 무효가 된다니. 그런 게 어디 있냐고 따지고 싶었다. 머리 한쪽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억울했다. 카시어스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은 로벅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럴 수만 있다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누명도 벗고 복수도 한 지금도 그 각오는 변하지 않았다.
충성이라는 것은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 그래도 그것이 무효가 되는 것은 싫었다.
“왕자라면 자국의 이익을 우선해야 하는 법이니까.”
“맹세가 무효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제 마음은 변치 않습니다. 전 성인이니까 어떻게 살아갈지는 스스로 정할 수 있습니다.”
“그게 뜻대로만 되는 건 아니지. 나라 간의 일이고 가족이니까 말이야. 린델. 네가 장미를 피우면, 테누안에서 왕자를 데리고 돌아가겠다고 하면 내가 반대할 명분은 없어.”
“그런…….”
린델은 대답 대신에 인상을 썼다. 아무리 성인이라고 하더라도 가문과 혈족의 이익을 위해서는 선택권이 없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테누안으로 한 번 가야 하긴 할 거다. 부모님을 만나야 하니 말이다. 미리 말해 두지만, 그곳이 아무리 마음에 들더라도 반드시 돌아와야 해. 아니면 꽤나 비싼 대가를 치를 거야.”
“대가라니요?”
“짐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널 되찾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 린델.”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카시어스의 목소리는 마치 사랑을 고백하는 듯 감미로웠다. 하지만 린델은 그가 전쟁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폐하?”
“누구나 파우시안 왕이나 용사 코샤스가 될 수 있지.”
“그게 무슨……. 그러시면 안 됩니다!”
파우시안 왕도, 용사 코사스도 모두 사랑하는 왕비와 연인을 위해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당황한 린델은 그러면 안 된다고 외쳤고, 카시어스의 시중을 들고 있던 근위시종들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사랑에 빠진 권력자는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르곤 했다. 그중에 전쟁은 최악이었다.
철혈의 황제라고 불리는 카시어스였다. 그는 한다면 하는 성격이어서 다들 조심스럽게 숨을 들이켜야 했다.
“안 되기는. 감히 짐의 것을 훔치려는 자를 그냥 두고 볼 것 같으냐?”
이 자리에 없는 루터 왕세자에게는 물론이고 린델을 향한 경고이기도 했다. 정확히는 협박에 가까운 고백이었다.
너는 소중하다. 전쟁을 불사할 만큼.
황제의 고백이 그냥 고백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실감한 린델은 아연해졌다. 카시어스는 화사하게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강렬하고도 차가웠다. 그가 진심이어서 할 말을 찾기가 어려웠다.
무섭기 짝이 없는 고백이었다. 그래도 왠지 모르게 기뻤다. 몇 명이나 되는 사람이 연인에게서 너를 되찾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킬 거라는 고백을 받았을까 싶었다.
린델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현명하게 행동하겠습니다.”
“고백을 했더니 엉뚱한 답을 하는군.”
“폐하를 훔쳐갈 이가 아무도 없을 테니, 안심하고 있어서요.”
“너의 기대를 저버리기 위해 납치를 당할 수도 없고.”
“제 목숨도, 빛나는 영광도 모두 폐하의 것입니다. 어디에 있더라도 폐하께 돌아오겠습니다.”
린델은 카시어스를 위해 전쟁을 일으킬 수 없었다. 대신에 그의 곁으로 돌아오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다. 최선을 다한 고백을 하자 그제야 카시어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부가 제법이라니까.”
“진심입니다.”
“너는 짐의 비호 아래 있다. 장미를 피우더라도 그 사실을 명심해라.”
“예.”
경고와 농담, 그리고 고백이 오가면서 카시어스는 기어코 린델에게서 듣고 싶은 대답을 얻어냈다. 그사이에 근위시종 한 명이 휴게실로 들어왔다. 그는 시종장에게 눈짓만 보내고는 바로 카시어스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속삭였다. 린델은 근위시종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 못했다. 하지만 카시어스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사실이냐?”
“예. 절명했다 하옵니다. 시신은 올라 신전에 있다고 합니다.”
카시어스의 되물음에 대한 대답은 불길했다. 절명이란 단숨에 숨이 끊어졌다는 소리였다. 무도회 중에 근위시종이 찾아와 죽음을 알려야 할 정도의 중요 인물이 죽은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데스탄을 떠올리던 린델은 카시어스의 심각한 표정에서 불길함을 느꼈다.
“린델.”
“예.”
“네게 부고를 전하겠다.”
“……제게요?”
“잉그란 사제가 죽었다고 한다. 사실 확인을 한 번 더 할 테니, 기다려라.”
린델은 카시어스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다고 느꼈다.
잉그란 사제님이 죽었다고?
자신의 귀에 이상이 생긴 모양이었다. 하지만 카시어스의 침통한 표정도, 가라앉은 분위기도 진짜였다.
믿을 수 없었다. 오늘 낮에, 제의를 지내는 대신전에서 잉그란을 보았다. 직접 이야기는 나누지 못했지만, 3층에 앉아 있는 것을 똑똑히 확인했다. 그런데 죽었단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카시어스를 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이 현실 같지 않았다. 꿈을 꾸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어떻게……. 왜?”
왜냐고 묻는 자신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려왔다. 린델은 어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세상이 캄캄했다.
힘들고 위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린델이 가장 싫어하는 일은 시신을 염하는 것이었다. 지하실에 떠도는 고약한 냄새도, 차가운 냉기도 다 괜찮았다. 무섭지도 않았다. 다만 린델이 견디기 힘든 것은 죽음에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가족들을 마주하는 것이었다.
가장 고역인 것은 자신보다 어린 아이가 죽었을 때였다. 열두 살 때의 일이었다. 이제 겨우 뛰어다니게 된 제이콥이 차가운 시신이 되어 누워 있는 것을 보고는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무정한 신들을 원망했었다.
“왜 신들께서는 이렇게 어린 아이까지 데려가시는지 모르겠어요.”
살이 통통하게 올랐던 제이콥의 뺨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린델은 차마 제이콥의 시신에 손을 대지 못하고 멍하니 잉그란에게 물었다.
제이콥은 린델에게 특별한 아이였다. 제이콥의 어머니인 요한나는 린델의 은인이었다. 린델이 로벅에서 살게 된 이후로, 요한나는 수확제가 되면 매번 옷을 지어주었다. 호탕하게 웃으며 특별한 간식을 챙겨주는 것도 언제나 그녀였다.
그래서 린델은 제이콥이 태어났을 때 동생이 생긴 것 같았다. 불행히도 제이콥은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고 늘 열과 기침에 시달렸다. 린델은 열과 기침에 좋은 약초를 찾아 산을 헤맸다. 각고의 노력 덕분인지 제이콥의 증상은 조금씩 좋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는 의자에서 떨어져 죽었다. 탁자 모서리에 머리를 찧은 것이 불운이었다.
이렇게 어린 아이를 데려가시다니. 운명을 관장하시는 젯타스도, 죽음을 관장하시는 라고시아라도 모두 원망스러웠다.
“신의 계획을 어찌 우리가 알겠느냐.”
“제이콥은 이제 겨우 세 살이라고요. 이렇게 데려갈 거면, 데려갈 거면…….”
차라리 태어나게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다시 울었다. 그때만큼은 잉그란도 운명은 제멋대로라고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