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태어나고 죽는 것은 필멸의 인간이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이란다.”
“그래도 너무해요.”
“꽃피우지 못한 가능성이 안타까운 것도, 그리고 함께한 추억을 그리워하는 것도 모두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지.”
“모르겠어요.”
“더 울어도 돼.”
어린 마음에 린델은 잉그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더 울어도 된다는 말에 눈을 뜰 수 없을 때까지 울고 또 울었다.
그러다 나이를 더 먹고, 더 많은 죽음을 접하면서 사랑하기에 슬퍼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더 이상 목소리를 듣지도, 미소를 볼 수도 없었다. 영원한 이별에 슬퍼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린델은 잉그란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사제님.”
린델은 눈을 감고 반듯하게 누워 있는 잉그란을 불러보았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장례식 전에 시신을 염하고 보호하는 신전의 지하실은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어둡고, 축축하고, 서늘했다. 그리고 석대에 누운 잉그란의 얼굴은 창백했고, 입술은 파랬다. 죽은 자의 모습이었다.
“잉그란 사제님.”
머리로는 잉그란이 대답하지 않을 거라는 것은 알지만 한 번 더 불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다.
잉그란은 일흔 살의 노인이었다. 그래도 무릎 관절이 나쁜 것 말고는 정정했다. 감기에도 잘 걸리지 않을 정도였다.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가 없고, 잉그란이 영원히 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 이별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가 살해당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한 적 없었다.
카시어스에게서 잉그란의 부고 소식을 들은 것은 늦은 저녁이었다. 린델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믿지 않기로 했다. 궁을 나오는 것은 힘들었다. 카시어스는 안전을 강조하며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지만 린델은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다섯 명의 근위 기사에게 호위를 받고 나서야 신전으로 올 수 있었다.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에 근위시종에게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잉그란은 신전의 사제들과 함께 나눔의 선행을 베풀고 신전으로 돌아오는 길에 패싸움을 하는 무리에 휩쓸렸다고 했다. 문제는 다른 사제들은 그저 밀쳐지고 넘어진 게 다였는데, 잉그란만은 등에 칼을 맞았다는 점이다.
살해라니.
린델은 아득함을 느끼며 석대를 손으로 짚었다. 서늘한 냉기가 손바닥에 스며들면서 정신이 들었다. 굳어 있던 머리가 뻑뻑하게 굴러갔다.
처음 등을 칼에 찔렸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정확하게 폐를 찌른 솜씨는 전문가의 것이라는 설명에 그대로 얼어버렸다.
시골 마을에서 반평생 동안 사제로 살아온 잉그란이 원한을 살 만한 일은 없었다. 연고도 없는 닐르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린델은 잉그란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황제의 총신이자 애인에게는 적이 생기게 마련이었다. 지금 린델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명확한 증거도 증인도 없었지만 린델은 자연스럽게 데스탄을 떠올렸다.
아니, 그가 아닐 수도 있었다.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은 많았다. 궁에서 보호받고 있는 자신을 괴롭힐 수 없으니 잉그란을 노린 것이었다. 순간적인 깨달음이 무겁고도 커다란 죄책감이 되어 린델을 덮쳤다.
마치 눈을 뜬 채로 악몽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막상 잉그란을 마주하자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그를 잃었다.
잉그란은 린델의 은인이었고, 스승이었고, 삶의 지표이자 하나뿐인 가족이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이제는 그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만이 떠올랐다. 별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고, 바보 같은 고민 상담을 하고, 세월이 느껴지는 거친 손에 머리가 쓰다듬어질 일은 이제 없을 것이다.
뜨거운 것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눈물이 되어 흘러내리는 것은 금방이었다.
“사제님.”
목에서 바람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후회도, 복수도 나중의 일이었다. 지금은 그저 슬피 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열이 오른 머리는 멍하기만 했다. 그런데도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잉그란은 레몬을 좋아했다. 그러나 로벅은 제국의 북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산골 마을이었고, 레몬이 자라기에는 불가능한 자연환경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외지에서 볼일을 보고 돌아올 때면 잉그란을 위해 레몬을 일부러 구해 올 때가 많았다. 잉그란은 어렵게 구한 레몬을 꿀과 설탕에 절여 오래도록 먹었다. 가끔은 레몬빵을 만들어 먹는 사치도 부렸고, 또 어떨 때는 생으로 레몬을 까서 먹기도 했다.
린델이 로벅으로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잉그란이 행복한 얼굴을 하고 레몬 껍질을 까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얼떨결에 레몬 조각을 하나 받았다. 레몬에서는 아주 달콤한 향기가 났기 때문에 린델은 냉큼 입 안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레몬은 끔찍하게 시었다.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고 있자 잉그란이 껄껄껄 웃으면서 어서 뱉으라고 손을 내밀어주었다.
신전 식구들은 모두 레몬을 생으로 먹는 잉그란의 취향을 이해만 했다. 바룬 사제님도, 또 다른 종사인 롭 역시 린델과 마찬가지로 신 과일이나 음식을 잘 못 먹었다. 그래서 잉그란이 맛있게 생레몬을 먹을 때면 다들 한곳에 모여 원래 취향이란 다양한 거라며 쑥덕거렸다. 따사로운 추억이었다.
문득 린델은 로벅에 있는 신전 식구들을 떠올렸다. 바룬 사제는 잉그란이 관절염으로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신전을 돌보는 것이 힘들어지자 로벅으로 부임을 해 왔다. 호탕하고 활달한 바룬 사제와 잉그란의 사이는 좋았다. 그가 잉그란의 장례식을 집행할 것이었다.
닐르에서 로벅까지는 거리가 멀었다. 보통 타지에서 사망하면, 장례식은 그곳에서 치렀다. 좀 더 품을 들여 시신을 고향에 데려와 묻기도 했지만 그건 장례식과 별개였다.
잉그란의 장례식은 닐르에서 치러질 것이다. 린델은 인상을 썼다. 불합리한 일이었다. 존경받는 사제인 잉그란은 마을 사람들에게 마지막 배웅을 받아야 했다. 그는 이런 곳에서, 칼에 찔려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마지막이 이렇게 허망해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린델은 전문가를 고용해서 잉그란을 죽일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했다. 데스탄밖에 없었다. 린델은 오늘 저녁에 만난 데스탄을 떠올렸다. 비웃음, 경멸, 적의. 누군가를 싫어하면 괴롭히고 죽이려고 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아 하는 놈이었다. 마차 강도를 위장해 자신을 죽이지 못했으니 잉그란을 노린 것이다.
복수를 해야 했다. 자신의 손으로 그를 죽이지 않으면 이 원한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이미 데스탄은 죽은 목숨이었지만, 그냥 손 놓고 지켜보는 건 억울했다.
확실한 증거를 찾는 게 먼저였다. 심증이 아니라 그가 잉그란의 죽음을 지시한 배후라는 증거가 있어야 했다. 그렇다면 당장에 칼을 들고 찾아가 데스탄을 찌를 것이다. 그로 인해 자신이 살인자가 되고, 카시어스에게 정치적 부담을 주는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들끓는 분노에 터무니없는 살해 계획을 세우던 린델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하수나 하는 방법이었다. 완벽한 계획이 필요했다. 아니, 계획 따윈 필요 없었다. 자신도 데스탄처럼 전문가를 고용해 그의 등에 칼을 꽂아줄 수 있었다.
공정한 복수였다.
“아니, 아니야.”
린델은 열이 오른 머리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데스탄에 대한 분노는 정당했지만 그와 동시에 책임도 회피하고 있었다. 잉그란을 죽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데스탄과 악연을 쌓지 않았다면 잉그란이 이렇게 허망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잉그란에게 일찍 로벅으로 돌아가라고 했다면 화를 면했을지도 모른다. 사실을 직시하자 시커먼 것이 가슴을 채웠다. 부인하고 싶었지만 진실은 하나였다.
“나 때문에…….”
모든 건 자신 때문이었다. 최악의 적을 만들어놓고는 주변 사람들이 다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린델.”
자신을 탓하던 린델은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백장미 궁에서 린델이 애용하는 곳은 2층 남서쪽에 위치한 작은 사실이었다. 불을 거의 꺼놓은 응접실 입구에 카시어스가 서 있었다.
린델은 그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지 의아해하면서 벽난로 위에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2시가 넘었다. 무도회가 끝날 시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카시어스는 무도회에 입고 있었던 옷차림 그대로였다. 카시어스가 나중에 만나자고 하긴 했었다.
“눈이 부었어.”
카시어스가 가까이 다가와 얼굴을 매만지는 손길에 린델은 자신이 앉은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맞은편에 앉는 카시어스를 계속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을 보자니 안심이 되었다. 기뻤다. 슬펐다. 매달려 울고 싶었다.
린델은 울지 않기 위해 주먹을 꽉 쥐고는 입을 열었다.
“범인은…… 범인은 누군지 알아냈습니까?”
너무 많이 울어버린 탓에 목소리가 엉망이었지만 린델은 개의치 않았다. 잉그란을 찌른 자는 전문가의 솜씨를 가졌다고 했다. 혼란을 틈타 도망친 범인이 쉽게 잡힐 리 없었다. 사건이 일어난 것도 겨우 몇 시간 전이었다. 범인을 알아냈냐고 묻는 게 바보 같은 일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했는데, 카시어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미리 말해 두지만 범인도, 배후도 찾지 못할 확률이 높아.”
“제가 습격받았을 때는 금방 찾으셨잖아요.”
“현장에서 범인을 생포했으니까. 그리고 배후를 알아낸 것은 운이 좋았어.”
창백하던 린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카시어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얼마나 울었는지 린델의 얼굴은 초췌하다 못해 엉망이었다. 애쉰 부인의 말로는 린델은 이곳에 처박힌 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울다가 멍하게 있기를 반복하고 있는 중이랬다. 소중한 이를 잃어버린 자의 전형적인 반응이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린델은 원수를 갚아야 했다.
“배후는…… 데스탄 경일 거예요. 저를 이렇게나 싫어할 사람은 그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왜……. 하필이면.”
말을 채 마무리 짓지 못한 린델의 목소리가 떨렸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린델도 카시어스도 이유를 알고 있었다. 하필 잉그란인 이유는 단순했다. 린델에게 잉그란이 소중한 만큼, 잉그란의 죽음에 린델이 아파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데스탄은 악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