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3/137)

-93화-

카시어스는 누군가를 위로하는 데 서툴렀다. 지금껏 그에게 위로를 바랐던 이는 빅토리아 말고는 없었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알고 있었다. 대부분은 한껏 슬퍼하다가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은 어딘가 망가지다 못해 자신을 놓아버리기도 했다.

린델에게 잉그란은 평범한 보호자가 아니었다. 은인이었고, 스승이었다. 그를 잃은 슬픔이 얼마나 대단할지 카시어스는 가늠할 수 없었다. 그저 넋을 놓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에게 복수하겠느냐?”

복수라는 말에 물기 어린 린델의 푸른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복수를 한다 해도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오지는 않아. 그러나 복수는 산 자를 위한 것이지. 네가 만족할 때까지 말이야.”

정상적인 위로가 아니었다. 그러나 슬픔에 빠진 린델에게는 몰두할 만한 일이 필요했다. 복수란 그만큼 달콤한 단어였다.

카시어스는 린델이 그러겠노라고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린델은 아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저 때문이에요.”

“린델?”

“제가, 제가 데스탄을, 그를 자극해서, 그를 자극하는 바람에. 그냥 모르는 척하고 지나칠 걸. 그를 이기겠다고…….”

“사건은 무도회 도중에 일어났어. 네 탓이 아니야.”

카시어스는 아니라고 했지만 린델은 고개를 저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사제님은 그렇게 돌아가실 분이 아니에요. 낯선 곳에서, 칼에 찔리다니. 평생을 선량하게 살아오셨는데. 흐윽. 제 보호자였다는 이유만으로,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이렇게……. 저 때문에……. 흐으으으.”

린델은 결국 제대로 된 문장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흐느꼈다. 카시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린델을 껴안았다.

“괜찮아.”

“안 괜찮아요.”

“괜찮아질 거야.”

시간이 흐르면 아픔도, 상처도 희석되기 마련이었다. 린델도 알고 있었지만 지금 당장은 죽을 것 같았다. 미칠 것 같았다.

죽은 자를 그리워하고 슬퍼하는 것은 모두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오갈 곳 없는 죄책감이 린델의 어깨를 짓눌렀다.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고 싶어도 잉그란은 이제 없었다.

“네 탓이 아니야, 린델.”

카시어스의 다정한 말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꽉 끌어안은 온기에 안도하면서도 서러워졌다.

그가 주는 사랑에 눈이 멀었다. 머리로는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행복에 겨워 주위를 둘러보지 못했다.

“나 때문에…….”

재판 같은 거 보지 말고 로벅으로 돌아가라고 했다면, 데스탄을 무시했더라면, 사냥 대회에 불참했더라면, 마법사 같은 게 아니었다면, 카시어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살인 누명을 쓰고 쫓기는 일만 없었더라면.

헛된 후회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든 가능성을 따졌다. 많고 많았던 선택과 결과 중에 하나만이라도 달랐더라면 잉그란은 살아 있을 것이었다.

“당신 때문에…….”

린델은 카시어스의 품을 파고들면서 등을 꽉 부여잡았다. 오갈 곳 없는 원망이 카시어스를 향했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이 날 살려서, 사람들에게 과시해서, 당신이 잉그란을 불러서, 당신이 황제라서, 내가 당신과 사랑에 빠져서.

카시어스만이 아니었다. 제멋대로인 운명이, 무정한 일곱 신이, 그리고 멍청한 자신이, 불합리한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모든 게 서럽고, 분하고, 누구에게든 화를 내고 싶은 격한 감정이 울컥울컥 샘솟았다. 이성적인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저주의 말을 쏟아내고 싶었다.

“당신을 좋아하지 말 걸. 애인 같은 거 말고……. 흑. 흐윽. 그냥, 그냥…….”

무거운 후회가 힘없는 울부짖음이 되어 흘러나왔다. 말도 안 되는 폭거였지만 카시어스는 묵묵히 안아주었다. 그래서 더 눈물이 났다. 그냥 도망자로 살아야 했다. 황제의 측근이나 애인 따위가 될 게 아니라, 머나먼 곳에서 수배범으로 숨죽여 지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린델은 잉그란에게 가족을 찾은 것 같다는 사실을 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제든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일이라도 잉그란을 만나서 어쩌면 자신이 테누안의 막내 왕자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잉그란은 운명이란 제멋대로라고 말하며 웃을 터였다.

그와 함께 할 미래를 허망하게 잃어버렸다.

오늘 만나, 내일 헤어져, 영원히 이별한다. 잉그란이 알려준 고왕국 시대의 애가가 다시 한 번 가슴에 와닿았다. 지금은 당연한 것처럼 곁에 있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린델은 카시어스를 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당신이 미워.”

“그래.”

“좋아해. 좋아하고 사랑해요. 그러니까, 흐윽. 흑, 그러니까 죽지 말아요.”

물이 끓어 넘치는 것처럼 뜨거워진 머리는 어지러웠다. 정신이 가물거려 자신이 끌어안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 헷갈렸다.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내일 다시 만날 수 없다면 이 마음을 전해야 했다. 당신을 좋아한다. 달콤함도 쓰라림도 당신과 함께하고 싶다.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다음 이야기는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이명과 함께 의식이 멀어졌다. 린델은 애써 정신을 붙잡지 않고 열이 오른 눈을 감았다.

“이런…….”

정신을 잃고 온전히 체중을 실어 기대어 오는 린델을 끌어안은 카시어스는 몇 번째인지도 모를 한숨을 삼켰다. 열이 오른 린델의 몸은 몇 겹의 옷자락 너머로도 뜨거운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해열제라도 먹이지 않으면 큰일 날 듯싶었다.

카시어스는 당신 때문이라는 린델의 원망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린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잉그란을 닐르로 부른 것은 자신이었다. 데스탄과의 악연을 생각한다면 잉그란이 살해당하는 데 어떤 식으로는 영향을 미친 것 또한 사실이었다.

미워한단다. 그리고 사랑한단다. 제 마음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울면서도 고백을 한다. 린델다웠고 그래서 사랑스럽기 짝이 없었다.

카시어스는 그대로 린델을 안아 들고는 침실로 움직였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애쉰 부인에게 해열제를 부탁했다. 린델을 침대에 눕히고 편히 잘 수 있게 옷을 벗겼다. 기절하듯 잠이 든 린델은 미동도 없었다.

이불을 덮어주고 애쉰 부인이 전한 해열제까지 먹인 카시어스는 가만히 린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을 감고 있는데도 얼굴이 부어 있었다. 내일 아침이면 눈도 제대로 못 뜰 것이다.

“처음으로 못생겨지겠어.”

카시어스는 린델의 뺨을 살짝 꼬집으며 농담처럼 중얼거렸다. 린델의 개인적인 괴로움과 별개로 그를 둘러싼 상황은 복잡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린델이 장미를 피워낸다면 국적이 바뀐다. 그러면서 그가 할엔라드에서 가진 지위는 모두 사라질 것이다. 자신이 린델에게 미칠 영향력도 마찬가지였다. 후견인과 피후견인의 관계도 처음부터 다시 따져야 했다.

자신의 비호에서 벗어난 린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뻔했다. 그를 이용하기 위해 온갖 사람들이 덤벼들 것이다. 황태후조차 린델이 테누안의 왕자라고 하더라도 양자 입적을 할 수 있지 않냐고 넌지시 압박했다.

타국의 왕자라면 결혼을 할 때 신분 문제는 없겠지만, 절차가 복잡해진다. 아니, 그 전에 프러포즈부터 해야 하는데 상황이 나빴다. 스승이자 부모를 잃은 직후에 결혼을 하자고 하는 것은 후안무치한 짓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린델을 바라보며 이것저것 따지던 카시어스는 입매를 당겼다. 이틀 후면 자신은 더 이상 린델의 주군도, 후견인도 아니게 된다. 가질 수 있는 것은 애인이라는 타이틀뿐이었다. 이제 린델과의 관계를 이어주는 것은 변덕스러운 감정이었다.

좋아하고 사랑한다.

장렬한 고백은 기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린델이 변심이라도 한다면 정말 전쟁이라도 일으켜야 할 판이었다. 그 전에 권력으로 찍어 누를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안심하지 못했다.

카시어스는 낯선 감정에 웃었다. 애달프고 감미롭고, 그리고 초조하다. 품 안에 있는 린델이 떠날까 봐 불안하고 겁이 나기까지 했다.

“겁이라니.”

부족한 것 없이 제멋대로 살아온 자신에게 어울리는 감정이 아니었다. 변심한다면 발에 족쇄를 채워서라도 곁에 둘 수 있지만, 영원한 상실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죽음은 불시에 찾아오는 법이었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서늘해졌다. 기분이 가라앉으면서 컨디션도 제멋대로 흔들렸다.

“쯧.”

가볍게 혀를 찬 카시어스는 부정적인 생각을 털어내며 이불 밖으로 나온 린델의 손을 잡았다. 보드라운 손은 따뜻하고도 여전히 감동을 선사했다.

카시어스는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자신은 손안에 쥔 것을 놓친 적이 없었다.

다음 날, 린델은 늦잠을 잤다. 퉁퉁 부은 눈으로 일어난 린델은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잠시 당황했다. 애쉰 부인의 도움을 받아 얼음찜질을 해서 붓기를 가라앉히고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델라우드 백작을 불러 잉그란의 장례식 문제를 의논하는 것이었다. 연고도 없는 닐르보다는, 무리를 해서라도 로벅에서 장례식을 치르는 게 좋다고 결론을 내렸다. 델라우드 백작이 장례식 일체를 책임지기로 하면서, 내일 일찍 잉그란의 시신을 로벅으로 운구해 가기로 했다.

로벅의 영주인 델라우드 백작과 사제인 잉그란은 오랫동안 서로 도움을 주고받던 사이였다. 잉그란의 죽음에 애통해 하는 델라우드 백작에게 린델은 진실을 털어놓았다.

“잉그란 사제님을 죽인 범인은 아직 붙잡히지 않았지만, 누가 사주했는지 짐작하고 있습니다. 사주범은 저를 매우 싫어해서……. 저를 괴롭히려고 잉그란 사제님을…… 사제님을 노린 것 같아요.”

“린델.”

“죄송합니다, 영주님.”

창백한 얼굴로 사과를 하는 린델을 보며 델라우드 백작은 위로의 말을 찾지 못했다. 잉그란이 칼에 찔려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만 해도, 사고에 휘말린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란다.

델라우드 백작은 시골의 영주였지만 귀족이었다. 그것도 한 지역을 대표하는 영주였다. 귀족들 간의 암투는 질리도록 보고 들어왔다.

“싫어하는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놈이 있기 마련이지. 그걸 네 탓이라고 여기지 마라. 상대가 누군지 모르지만, 그가 나쁜 놈이다.”

“영주님?”

“나는 널 잘 안다. 당했으면 당했지 누굴 해코지할 만한 위인이 아니야.”

“그래도 제 탓이라는 사실은, 그건 변하지 않아요.”

“그걸로 네 마음이 편해진다면 네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난 그리 생각하지 않겠다.”

50년을 넘게 살아온 델라우드 백작은 린델을 설득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퀭한 얼굴을 한 린델이 우는 것처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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