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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94/137)

-94화-

“영주님은 좋은 분이세요.”

“나도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니야. 너야말로 이제 너무 착하게만 살면 안 돼. 네가 테누안의 막내 왕자님일지도 모른다는 소리는 나도 들었다. 사정이야 복잡하겠지만, 이제 어디 꿀릴 것도 없으니 복수는 네 손으로 하거라.”

델라우드 백작까지 복수를 하라고 권유하는 바람에 린델은 다시 한 번 웃어야 했다. 린델이 아는 델라우드 백작은 전통주의자였고, 그러면서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웬만한 일은 큰 분란 없이 해결하려고 했다. 그런 그가 자비가 아닌 복수를 말했다. 평화롭고 안온한 삶에서 이제 멀어졌다는 것을 실감하며 린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복수해야죠. 그것 말고, 실은 영주님도 위험하실 수 있어요. 영주님도 제 후원자셨잖아요. 밤늦게 다니시지 마시고, 그리고 로벅으로 돌아갈 때도 용병을 고용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백작님께서는 이곳에 연고가 없으시니,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린델에게는 잉그란만큼은 아니지만 소중한 이들이 많이 있었다. 신전 식구들이, 영주님의 가족들이, 마을 사람들이 그러했다. 데스탄이 로벅에서 뭔가를 저지를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닐르에 와 있는 델라우드 백작은 위험한 상황이었다. 특히 로벅으로 돌아가는 길을 조심해야 했다. 황제의 길에서도 도적의 습격을 받을 수 있었다.

조심스럽기 짝이 없는 린델의 제안에 델라우드 백작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네게 맡긴다는 말과 함께 로벅으로 돌아갈 날짜를 조율하고는 자리를 떴다.

델라우드 백작을 배웅한 린델은 다음으로 뒤센트 자작을 맞이했다. 린델은 뒤센트 자작에게 로벅까지 델라우드 백작을 호위할 용병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면서 데스탄의 근황을 전해 들었다. 그는 멀쩡한 모습으로 하례 의식에 참석했다.

복수는 멋진 단어였지만 계획이 있어야 했다. 무엇보다 데스탄은 황족이었고, 카시어스가 이미 손을 써놓은 상황이었다. 린델은 먼저 카시어스와 상의를 하기로 했다.

개인적인 이유로 그란디스 메시스의 둘째 날 행사에 모두 불참한다고 알린 린델은 카시어스를 기다렸다. 카시어스는 바쁜 와중에도 일부러 시간을 내서 만찬 전에 찾아주었다.

“눈이 많이 부었더니 좋아졌구나. 붕어 같은 얼굴을 볼 줄 알았어.”

“한나절이나 지났는 걸요.”

카시어스의 농담에 웃으면서 대꾸한 린델은 신기한 기분이었다. 세상 살기 싫어질 정도로 슬펐는데, 무기력했는데, 일상이 이어졌다.

그리고 카시어스를 보니 웃으면서도 끌어안고 울고 싶어졌다.

“어젯밤에는, 어젯밤에는 정말 죄송했어요. 제가 너무 무례하게 굴었어요. 용서해 주세요.”

린델은 우는 대신에 눈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어젯밤과 같은 장소에서 용서를 구했다.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해도 황제를 상대로 너무 무례했다. 당신 탓이라고 원망하고, 당신이 밉다고까지 해버렸다. 아무리 애인이라고 하더라도 황제 기만으로 죄를 추궁당할 수 있을 정도의 사건이었다.

막 찻잔을 들어 올려 차를 마시던 카시어스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웃음을 터트렸다.

“군주 기만으로 잡혀갈 게 겁나는 모양이지?”

“물론이죠.”

“괜찮아. 고백도 받았으니까.”

사랑한다고도 했다. 린델은 당황스러운 기분에 웃었다. 마음 넓은 애인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델라우드 백작과 만나 결정했던 것들을 전했다. 문제는 잉그란의 시신을 운구할 때 린델이 동행하고는, 로벅에서 치를 장례식에 참석한다고 알렸을 때였다. 카시어스가 단번에 허락하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위험해.”

카시어스가 얼굴을 굳힌 채로 말했다.

“호위를 고용할 겁니다.”

“허락하지 않겠다.”

“폐하. 잉그란 사제님의 장례식입니다. 제가 참석해야 해요.”

린델은 카시어스가 반대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위험하다는 것을 린델도 모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호위 용병을 구하려고 했다. 정 안 되면 상단 무리와 함께 이동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카시어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깟 용병들이 네 방패가 될 성싶으냐? 황금덩이에 배신할 자가 수두룩해. 마차에 불을 지르고, 술에 독을 타고, 야밤에 입에 칼을 물고는 침대 발치에 설 테지. 그것뿐일까. 도적으로 가장해서 습격하는 것은 고전적이지. 네가 아무리 갑옷 마법을 몸에 두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저격수의 공격에서 끝까지 버티지는 못해. 한순간의 실수가 네 목숨을 앗아갈 수 있어.”

“그건…… 그렇게까지는.”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위인들이야. 네 안전을 두고 도박은 하지 않을 테니 그리 알아.”

“너무 부정적인 생각이세요.”

카시어스의 가정은 말 그대로 가정일 뿐이었다. 그런 식으로 위험성을 따지자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비정한 이야기지만, 데스탄이 잉그란을 노린 이유가 너를 황궁 밖으로, 닐르 밖으로 끌어내기 위한 포석일 수도 있어. 그래, 그들은 그런 식으로 표적을 노리지. 만에 하나의 가능성에 놀아날 생각은 없다.”

“그럼 차라리 저를 미끼로 데스탄의 꼬리를 잡는 게…….”

“린델.”

카시어스가 엄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린델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자신이 설득해도 카시어스의 결정이 바뀔 리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하지만 자신은 가야 했다.

“저는 가야 해요.”

“차라리 나를 원망해.”

“카시어스 경.”

린델은 간절했지만 카시어스는 모험을 할 생각 따윈 조금도 없었다. 린델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근위기사단을 동원할 수도 있었다. 요란하게 주위를 끄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카시어스는 린델을 궁 밖으로 내보내기가 싫었다.

“너를 잃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아.”

“저는…….”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한 것 같구나. 이제 돌아가겠다.”

대화는 계속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고,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다. 카시어스는 소모적인 대립을 끝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억울함과 실망이 가득한 린델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카시어스는 린델 앞에서 허리를 숙여 뺨에 입을 맞추고는 바로 섰다.

“당분간 백장미 궁 밖의 출입을 금지하겠다.”

“?!”

“전처럼 손님이 찾아오는 것은 막지 않을 테니 그리 알아.”

“너무하세요.”

“섣불리 움직이지 마라.”

경고에 경고를 거듭한 카시어스는 그대로 사실을 나가버렸다. 충격을 받은 린델은 일어나서 배웅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카시어스가 사라진 입구를 멍하니 바라보던 린델은 인상을 썼다. 연금을 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이번에는 확실히 감금이었다.

린델은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카시어스와 이렇게 의견이 맞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가 불합리하고 무리한 명령을 내릴 때가 종종 있긴 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카시어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이해하는 것과 속상한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위험하다고 평생을 갇혀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아.”

린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카시어스를 설득하나 싶었다. 아무리 봐도 카시어스가 마음을 쉽게 바꿀 것 같지 않았다.

“나쁜 놈.”

이 모든 게 데스탄 때문이라는 생각에 울컥울컥 화가 치솟았다. 원흉은 따로 있는데 카시어스와 싸운 게 억울할 지경이었다. 널뛰는 감정에 메말랐다고 생각한 눈물이 다시금 치솟았다.

“젠장.”

린델은 눈물을 거칠게 닦아내며 욕설을 내뱉었다. 억울하고, 분하고, 서러웠다. 잉그란이 보고 싶었다. 눈물이 흘러넘쳤다.

다음 날, 하늘은 화창했다. 백장미 궁에는 오전부터 손님들이 모여들었다.

테누안의 루터 왕세자와 리세나 공주, 그리고 그들과 함께 제국을 방문한 측근들이 제일 먼저 도착했다. 할엔라드 측에서는 법무청 장관과 신전의 사제들, 그리고 마탑의 마법사들이 자리했다. 장미의 심판에 증인으로 참석한 귀빈들이었다.

장미의 심판에는 혈연관계의 가족을 포함해 일곱 명의 증인이 자리하는 것의 보통이었다. 테누안의 왕자를 확인하는 자리였지만 그래도 장소가 장소인 만큼 심판의 집행인은 할엔라드의 법무청 장관이었다.

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권세가인 법무청 장관의 등장은 황제가 이번 일에 얼마나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나타냈다. 린델이 살인 누명을 벗게 된 가면무도회에서도 법무청 장관이 자리했던 것을 기억해 낸 몇몇 증인들은 저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나누었다.

10시가 되자 린델이 나타났다. 일정이 빽빽한 황제는 자리하지 않았지만 그걸 문제 삼는 사람은 없었다.

린델의 얼굴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초췌했다. 그에게 일어난 비운은 이틀 만에 널리 알려졌다. 린델과 안면을 튼 사람들은 저마다 안부와 조의를 표했다. 일련의 인사가 끝나고 나서야 의식이 시작되었다.

먼저 나선 것은 법무청 장관이었다.

“린델 시어드가 테누안의 막내 왕자이신지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비공식적인 의식이며, 테누안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으로 장미가 피지 않더라도 린델 시어드는 어떤 불이익도 당하지 않습니다. 법적 처벌 역시 없을 것을 미리 명시합니다. 이는 루터 왕세자께서도 미리 동의하신 내용입니다.”

법무청 장관이 미리 합의된 사항을 모두에게 전했다. 증명의 장미라고 불리는 마법은 혈연을 매개로 하는 것이었다. 사계절을 가리지 않고 꽃봉오리를 맺는 장미는 마법으로 계약된 직계 자손의 숨결에서만 만개했다. 숨결이 닿지 않은 장미는 꽃봉오리째 바닥에 떨어졌다.

원칙적으로는 증인이 보는 앞에서 장미 가지를 잘라 와야 했지만 이번 경우는 예외였다. 대신 테누안 측에서 공정성을 위해 열 송이가 넘는 장미를 준비했다.

장미의 진위 여부를 증명하기 위해 루터 왕세자가 먼저 나섰다. 그가 꽃피울 장미를 고른 것은 증인 중에 한 명인 사제였다. 루터 왕세자가 장미 꽃봉오리를 입술에 가져다 대고 길게 숨을 내쉬자 꽃잎이 활짝 폈다. 다음은 리세나 공주였다. 그녀 역시 꽃봉오리였던 장미를 단숨에 피워냈다.

이제 린델의 차례였다. 린델은 자신의 손에 들린 장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체적으로 연한 녹색을 띠고 있는 장미는 꽃잎 끝만이 진한 보라색이었다. 색깔 말고는 별로 특별할 게 없어 보이는 장미는 방금 전에 숨결만으로 피어났다. 자신이 이 장미를 피워내면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이 달라질 것이다. 린델은 그냥 해프닝으로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장미 봉오리를 코끝에 대고 향기를 맡았다. 그저 작게 숨을 쉰 것뿐이었다.

린델의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장미가 천천히 피어났다.

“황제께서 너를 총애하신다더니 헛말이 아니구나. 황제의 밀궁이라는 백장미 궁을 거처로 삼게 하시다니 말이야.”

만면의 웃음을 지은 루터 왕세자가 친근한 어투로 린델에게 말을 걸었다. 린델이 장미를 피워내고 테누안의 왕자라고 확인된 후, 루터 왕세자는 적극적이었다. 다정하고 인자한 손위 어른의 모습은 어디 나무랄 데가 없었다.

린델은 새로 생긴 형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조심스럽게 굴었다.

“황제께서 과분하게 돌봐주십니다.”

“황제의 총애란 향기로운 법이지만 한철 장미와 같지. 씨앗을 품지 못하면 다음을 기약하기 어려워. 안 그러냐?”

황제의 측근으로 몇 개월 동안 황궁을 출입한 린델은 은유가 가득한 궁정어를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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