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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95/137)

-95화-

사내인 자신은 장미처럼 씨앗을 품을 수 없었다. 그러니 그와 비등한 것을 차지해야 네 입지가 단단해지지 않겠냐는 소리였다. 거기까지 별 어려움 없이 이해해 버린 린델은 자신도 궁정인이 다 되었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사람 인생이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긴 하지요. 그러니 많은 것을 바라지 않으려고 합니다.”

“세상 다 산 노인네 같은 말이구나. 그래서야 라드라비그에서 오래 버틸 수 없어.”

“황제 폐하의 배행 마법사였으나, 안타깝게도 외국인이 그러한 요직에 있을 수 없지요.”

“네가 미리 황제 폐하께 잘 말씀드려 보아라.”

“황제 폐하께 부담을 드릴 수 없습니다.”

“부담이라니? 황제께서 너를 총애하시는데, 그 정도야 괜찮아. 황제께서 너를 가까이에 두고 싶어 하신다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루터 왕세자는 웃고 있었고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분명 질책성 언사였다. 린델은 인상을 쓰지 않으려고 했다. 직접 대면한 루터 왕세자는 카시어스의 경고만큼이나 변변찮은 사람이었다. 나이 어린 형제에게 조언을 하는 것처럼 구는 그의 말투에서 노골적인 의도가 느껴졌다.

그냥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예의 바르게 이 순간을 보내고는 거리를 두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형제라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폐하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린델은 딱딱하게 말했다. 타국의 왕자인 자신이 황제를 따라다니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방법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정치적으로 문제가 생길 건 뻔했다. 카시어스에게 그런 부담을 주기 싫었다.

“이런. 고집스러워졌구나. 어렸을 때는 순했는데 말이야. 이러니까 제대로 된 배움이 중요한 거야. 시골의 신전에서 자랐다니 어쩔 수 없다만.”

“좋은 분을 만나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전하.”

“과거의 일은 이제 모두 잊어버려라. 평민들이랑 엮여서 좋을 것 없어. 지금 너는 테누안의 왕자라는 것을 명심해라.”

루터 왕세자는 린델의 뻣뻣한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최대한 상냥하게 타일렀다. 황제의 애인이라는 린델의 가치는 어마어마했다. 할엔라드의 황제는 평범한 지배자가 아니었다. 그의 결정에 대륙의 정세가 바뀌고, 작은 나라 하나가 잿더미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런 황제의 하나뿐인 애인이 자신의 동생이었다. 제국의 귀족들은 린델이 후궁이 될 거라고 속삭였다.

사내라고 하더라도 황제의 후궁이 되는 것은 영광이었다. 황후도, 다른 후궁도 없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 비공식이긴 하지만 황제는 지극한 총애를 숨기지 않았다. 소문으로는 하늘의 별도 따다 줄 것처럼 굴고 있다고 했다. 그 증거가 바로 자신이 서 있는 백장미 궁이었다. 역대 황제의 밀궁을 린델이 거처로 쓰고 있었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거라고 알려진 황제라도 총애하는 애인에게는 약했다.

린델이 테누안의 잃어버린 막내 왕자라는 소문이 퍼지자마자 주위의 대접이 달라졌다. 옆 나라의 국왕은 대놓고 부럽다고 했을 정도였다.

루터 왕세자는 린델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계산했다. 일생 동안 제 뜻대로 명령을 내리고 살아온 루터 왕세자는 상대의 마음에 신경 쓰지 않았다. 테누안의 왕자인 린델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왕세자인 자신의 명령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고아로 자란 시절은 모두 잊어야 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여겼다.

배려가 없는 가식적인 다정함은 일방적이었고, 린델은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로벅에서의 모든 것을 잊으라는 말에는 저도 모르게 반발했다.

“로벅에서 15년을 살았습니다. 제 인생을 잊을 수는 없습니다.”

“이런. 큰일이야. 정말 쓸데없는 버릇이 몸에 배었어. 너는 형에게 말대꾸하지 않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겠다.”

자신의 말이 무조건 옳다고 믿는 목소리는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린델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대꾸를 삼켰다. 말이 통하지 않아 벽을 마주하는 기분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럴 때 상대를 설득하고 이해시키려 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찍어 누르든가 무시해야 했다.

“피곤하군요. 이제 쉬어야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뵙도록 하죠, 전하.”

“뭐라고?”

“오라버니. 린델에게 백장미 궁을 구경시켜 달라고 해야겠어요. 아름다운 꽃을 보며 천천히 걸으면 린델의 기운도 회복될 거예요. 그렇지?”

린델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지금껏 조용히 앉아만 있던 리세나 공주가 나섰다. 그녀는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 그게 좋겠다. 네가 잘 타일러보거라. 나는 돌아가련다.”

이번에도 린델이 대답하기 전에 루터 왕세자가 결정을 내렸다. 둘이서 이야기를 잘 나눠보라며 자리를 비켜주기까지 했다. 린델은 꼼짝없이 리세나 공주를 에스코트하고는 정원을 걸어야 했다.

산책용 레이스 양산을 손에 든 리세나 공주가 정원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여긴 정말 장미가 가득하구나. 이렇게까지 넓은 장미 정원은 처음이야.”

“예.”

“큰오라버니 성격이 좀 그래.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하시지. 그러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

“감사합니다, 공주님.”

“공주님이라고 하지 말고 누나라고, 아니, 이제 다 컸으니까 누님이라고 해. 괜찮아.”

“그건 아직…… 좀 어색해서요.”

적극적인 어필에 린델은 당황하면서 대답했다. 누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색했다. 린델의 순진한 반응에 리세나 공주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렸을 때는 누나, 누나 하고 엄청 따라다녔었는데. 정말 기억을 모두 다 잃었어? 아무것도 기억 못 해? 부왕이랑 어머니도, 나도? 그런 거야?”

리세나 공주는 루터 왕세자와 달리 15년 만에 만난 가족에게 할 법한 질문을 했다. 그녀의 푸른 눈을 바라보며 린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리세나 공주는 혈육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과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그렇구나. 그럼…… 그 로벅이라는 곳에서 잘 지냈어? 힘들지는 않았고?”

“좋으신 분을 만나서, 그래서 잘 지냈어요. 마냥 편하지는 않았지만, 사는 건 다 그러니까요.”

“큰오라버니 말 중에 하나는 맞았네. 너무 노인네 같아. 그것보다 네 보호자였던 분이 돌아가셨다고 들었어. 유감이구나.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말이야.”

“고……맙습니다.”

흔하고도 다정한 위로였지만 감동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린델은 그녀가 루터 왕세자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장미 정원을 걷는 내내 리세나 공주는 린델이 기억 못 하는 과거의 이야기를 하나씩 말했다. 왕궁에서는 바다가 보인다든가, 진주해의 색깔은 아름다운 에메랄드빛이라든가, 어렸을 때는 두 사람이 너무 많이 닮아서 쌍둥이라고 종종 오해를 받았던 적이 있었다는 등의 별것 아닌 내용들이었다.

그렇게 정원을 반 바퀴쯤 돌았을 때, 리세나 공주가 뒤따르던 시종과 시녀를 일부러 멀찍이 물렸다.

“네가 기억을 잃었고 기억을 못 한다 하더라도, 나는 네 누이야. 그래서 너를 걱정할 수 있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한동안 테누안에 오지 마.”

“?!”

뜻밖의 말에 린델은 나란히 걷고 있는 리세나 공주를 바라보았다. 이쪽을 향한 그녀의 시선과 마주쳤다.

“테누안의 정세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어? 네가 실종된 사고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린델이 테누안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해양 국가라는 것과 기후가 온화하다는 것 정도뿐이었다.

“지금 테누안은 큰오라버니의 세상이야. 그래서 거칠 것이 없지. 어쩌면 네게 말도 안 되는 것을 명령할지도 몰라.”

“말도 안 되는 명령이라면……?”

“나를 손님으로 초대해 백장미 궁에서 머물도록 하게 해서, 황제 폐하가 계신 침실에 날 밀어 넣으라는 것 같은 거 말이야.”

“?!”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린델은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놀란 눈을 하고 리세나 공주를 바라보자 그녀가 활짝 웃었다.

“왜 그렇게 놀라? 황제나 왕이 자매를 취하는 일은 종종 있어. 게다가 난 너랑 많이 닮았잖아. 쌍둥이처럼. 그러니 황제께서 날 좋아하실지도 모르지.”

“그건.”

일말의 가능성에 린델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리세나 공주의 말은 모두 맞았다. 자매가 황제나 왕의 후궁이나 애인이 된 경우는 많았다. 또한 그녀가 자신과 많이 닮기도 했다. 기분이 나빠지다 못해 소름이 돋았다.

“그런 인간이야, 큰오라버니는. 자신의 형제를 도구로밖에 보지 않아.”

리세나 공주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가련했다. 그러나 루터 왕세자에 대한 적의를 감추지 않았기에 린델은 잠시 숨을 멈추고 말았다.

“내 생일에, 그러니까 네가 실종된 날에 있었던 폭발 사고는 사고가 아니야. 누군가 계획한 거지.”

“공주님?”

“누님이라고 하라니까.”

“누님. 그 누구라면…….”

여기서 그 누구란 명백했다. 그래도 린델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큰오라버니가 명령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때 큰오라버니는 열일곱 살이었거든. 그렇게 엄청난 일을 저지를 수는 없지. 하지만 배가 폭발할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건 확실해. 이상하게도 큰오라버니가 부왕 곁에서 떠나지 않았어. 부왕과 사이가 꽤나 나빴는데도 말이야. 덕분에 사고가 났을 때 제일 처음 구조되었지.”

리세나 공주는 그날을 떠올리며 얼굴에 힘을 주었다. 꿈결 같은 생일 파티였다. 왕국에서 제일 커다란 배는 선스톤으로 환하게 빛을 내며 밤바다를 가로질렀다. 멀리 보이는 왕궁과 시가지의 불빛이, 하늘의 보름달이, 별빛이 아름다웠다.

그날의 주인공은 리세나 공주였지만 선상 파티는 어른들을 위한 자리였다. 그래도 리세나 공주는 초대된 친구들과 노느라 지루한 줄 몰랐다.

큰오라버니가 부왕을 졸졸졸 따라다니는 것을 본 것은 머리를 묶은 리본이 풀어져 선실로 이동할 때였다. 두 사람의 사이가 나쁜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언젠가 부왕이 큰오라버니의 실수를 크게 질책하고, 큰오라버니가 화를 내는 바람에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그 후로 큰오라버니는 부왕과 멀리 떨어져 다녔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가 싶었다.

사고는 그때 일어났다. 폭발음과 함께 배가 크게 흔들렸다. 균형을 잃고 넘어진 리세나 공주는 난간에 머리를 찧고는 기절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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