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눈을 떴을 때는 다음 날이었고, 모든 게 끝나 있었다. 작은오라버니는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막냇동생은 실종된 상태였다.
모두가 불행한 사고라고 여겼다. 멍청한 선원이 불꽃놀이 폭죽을 잘못 다루어서, 폭탄 화약에 불이 붙었다고 했다.
“그날 죽은 사람은 모두 다섯이었고 실종된 사람은 두 명이었어. 배에는 수백 명이 타고 있었는데, 그중에 왕자 둘이 죽고 실종될 확률을 따져본 것은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였지.”
리세나 공주는 많은 이야기를 생략했다. 작은오라버니가 죽고, 린델이 실종되자 어머니는 슬퍼하다 못해 마음의 병을 얻고 말았다. 그러면서 부왕의 총애는 점차 멀어졌다. 많은 것이 천천히 바뀌기 시작했다. 부왕의 하나뿐인 아들이 된 큰오라버니의 입지는 단단해졌고, 외가는 파산하고, 외조부는 급사를 하고, 외숙부는 술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뭔가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은 나이를 어느 정도 먹고 나서였다. 조심스럽게 그때의 사건을 조사하면서 이상한 점을 여럿 발견했다. 특히 다섯 명의 사망자 중에 세 명이 작은오라버니와 그의 시종과 시녀였다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불행한 사고로 배가 가라앉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창백하게 질린 린델의 얼굴을 보며 리세나 공주는 웃었다. 15년 만에 만난 동생은 여전히 착하고 순진했다.
오래전부터 복수를 꿈꾸고 있었다. 준비는 대부분 끝났다. 린델이 변수이긴 했지만 결행일이 코앞이었다. 그를 끌어들일 수 없다면 최소한 배제해야 했다.
리세나 공주는 도박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테누안은 한동안 시끄러울 거야. 그러니까 제국에 남아. 황제의 비호를 받으면서.”
“?!”
린델은 리세나 공주가 무엇을 말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반란, 혹은 복수.
사나운 단어를 암시한 리세나 공주는 당황하다 못해 얼어버린 린델을 보며 웃었다. 고아로 신전에서 자랐다고 했다. 황제의 피후견인이자 애인으로 지낸 것은 겨우 몇 개월이었다. 야심이 넘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확실히 해야 했다.
“혹시 네가 왕이 되고 싶니?”
“아니요. 절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느 편에서 서지 말고 지켜보기만 해. 그리고 승자를 지지하면 돼.”
테누안에서 곧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있을 거라는 리세나 공주의 경고는 직접적이었다. 반란이 성공하면 루터 왕세자가 죽을 것이다. 반대로 실패한다면 눈앞에 있는 리세나 공주가 죽는다. 방관자가 되어 형제들이 죽고 죽이는 것을 지켜보라는 무섭고도 슬픈 요구에 린델은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아름답고 화려한 이곳은 비정하고도 냉혹했다.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들은 폭풍이 되어 자신을 흔들어댔다.
“내가 겁을 줬구나. 오랜만에 만난 남동생이 눈 먼 돌에 맞지 않았으면 해서 그랬어.”
린델은 활짝 웃는 리세나 공주에게서 많은 사람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무자비한 권력자인 카시어스를, 다정하고 엄격한 애쉰 부인을, 그리고 스승이자 보호자인 잉그란을 닮았다. 그리고 복수를 꿈꾸던 자신과도 같았다.
모두가 선택을 하고 있었다. 이제 자신도 선택을 해야 할 때였다.
“저는 제국에 남을 겁니다.”
“린델?”
“황제 폐하께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저의 영광을 모두 그분께 드린다고 서약했고, 그 마음은 변치 않았습니다. 만약 테누안의 왕자로서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충성도, 영광도, 그리고 목숨까지도 모두 바치겠노라고 했다. 가족이 생겼다고 해서, 테누안의 왕자가 되었다고 해서 이 마음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카시어스였다.
똑똑해지고 현명해져라. 휩쓸리지 마라.
카시어스의 주문은 여전히 유효했다. 리세나 공주의 복수에 동참하게 되면 카시어스에게 어떤 식으로든 부담을 줄 수밖에 없었다. 가족도, 인정도 모르는 비정한 놈이 된다고 하더라도 린델은 후회하지 않았다.
단호한 린델의 대답은 리세나 공주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제 권리를 포기해서라도 맹세를 지키겠단다. 굳건한 얼굴을 보니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변명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내심 린델이 복수에 동참하길 바랐던 리세나 공주는 잠시 실망했지만 곧 미련을 버렸다. 배신과 기만이 판치는 와중에 고결함은 빛나는 법이었다. 린델을 포섭할 수 없다면 적으로는 만들지 말아야 했다. 리세나 공주는 욕심 많은 큰오라버니의 전철을 밟을 생각이 없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살벌한 이야기만 하는구나. 미안해.”
“괜찮습니다.”
“라우그실리안은, 그러니까 테누안의 수도인 라우그실리안은 아름다운 곳이란다. 봄이 되면 사방에 레몬꽃이 활짝 펴서 레몬향기가 가득해. 그때가 되면 놀러 와. 바다는 에메랄드색에 하늘은 파란색이고, 흰 뭉게구름이……. 어머. 린델리프. 울어?”
“아니요.”
린델은 아니라고 했지만 눈물은 이미 오른쪽 뺨을 타고 흘러내린 후였다. 곧 두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레몬이란 단어에 잉그란을 떠올리고 말았다. 괜찮아졌으면 좋겠는데, 지난 사흘 동안 눈물샘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제멋대로 눈물이 흘렀다.
리세나 공주는 눈물을 닦으라며 허둥지둥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슬플 때는 우는 게 좋다며 다정한 위로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나중에 손수건을 돌려달라고 하면서 떠났다. 혼자가 된 린델은 서탁 앞에 앉았다.
갇혀 있다고 해서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우선은 카시어스부터 설득해야 했다. 의욕적으로 서랍을 열던 린델은 한쪽에 놓인 잉그란의 편지봉투를 확인하고는 그대로 굳었다. 억울함과 분함, 분노와 슬픔이, 그리고 그리움이 가슴을 채우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다시금 눈물이 차올랐다.
“하아.”
고개를 젖혀 천장을 올려다본 린델은 눈에 힘을 주었다. 운다고 해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린델은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퉁퉁 부은 눈으로 편지를 썼다.
셔츠와 바지로 단출한 차림을 한 카시어스가 수련장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연습용 검이 쥐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황제를 찾아 본궁을 헤매다 수련장에 도착한 뒤센트 자작은 이상하기 짝이 없는 광경에 잠시 멈칫거렸다. 황제의 젖형제이자 최측근이 아니더라도 분위기가 가라앉았다는 것을 알아챌 정도였다. 뒤센트 자작은 폐현을 고하는 대신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장에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느냐고 물었다. 시종장은 작은 목소리로 20분째라고 대답했고, 뒤센트 자작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외모와 달리 황제의 검은 진중했다. 정확하게는 패도적이었다. 누구와도 비견할 수 없는 강한 마력을 타고난 황제는 기교보다는 강한 힘으로 앞을 가로막는 것을 모두 베어버렸다. 고급 검술과 함께 마력을 운용하는 법을 배운 뒤로 황제의 검을 단 한 합이라도 받는 이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대인 전투에서 황제는 거의 무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기본 검식으로 몸을 풀 때도 있고, 가상의 적을 상대하기도 했다. 때로는 신입 근위기사를 불러 대련을 빙자한 구타를 일삼은 적도 있었다. 지난 8년 동안 근위기사가 황제에게 두들겨 맞는 것은 신고식으로 자리 잡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그란디스 메시스는 황제가 주체하는 국가적인 축제였고 열흘 동안 황제의 스케줄은 살인적이었다. 크고 작은 파티와 연회, 무도회, 공연, 시합, 만찬 등등. 황궁에서 열리는 대부분의 행사는 황제가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야 했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수련장을 찾은 것까지는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련장 한가운데 서 있기만 한 것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황제의 성격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뒤센트 자작은 황제가 상념에 잠겨 있는 이유를 대충 짐작했다. 황제는 연애 중이었다. 그것도 정치적인 야합이 아니라 사랑에 빠졌다. 처음에는 사람을 가까이 두는 것을 싫어하는 황제가 웬일인가 싶었다. 바늘에 질려도 피 한 방울 날 것 같지 않은 그가 팔불출처럼 구는 것을 보며 사랑의 위대함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감히 황제를 우두커니 서게 만들 존재가 또 누가 있겠냔 말이다.
어쨌든 정적 속에 서 있는 황제는 무서웠다. 마력은 잘 갈무리되어 있지만, 분위기가 무거웠다. 황제의 기분은 최악인 게 분명했다. 그래도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헛기침이라도 해야 하나 하고 눈치를 보고 있는데 일순 공기가 가벼워졌다.
“오스카.”
황제의 부름에 뒤센트 자작은 단번에 정신을 차렸다. 그는 대기하고 있던 시종장에게 눈짓을 해서 근위시종들이 멀리 물러나게 만든 후에야 황제 곁으로 다가갔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무슨 일이냐?”
“미끼를 물었습니다.”
뒤센트 자작은 조용히 속삭였다. 주어는 없었지만 미끼를 문 상대는 데스탄이었다. 카시어스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잉그란의 피습 소식에도 당장에 데스탄을 죽이지 않은 것은 그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놈이 돌아다니는 꼴을 봐야 한다니 속이 뒤틀렸다.
“검은 양은?”
“본인도 검은 양에게는 비밀로 해야 한다는 걸 아는 모양입니다.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지인의 집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그의 멍청함이 이렇게 도움이 되는군.”
카시어스는 사납게 웃었다. 파슨 공작에게 들은 습격 계획은 놀랍도록 단순했다. 필라무트의 제전에서 거사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란디스 메시스의 기간 동안 공식 일정은 대부분 황궁과 대신전에서 열렸다. 그러나 신들의 은혜에 감사하며 풍족한 결실을 즐기는 행사 중에 단 하나, 전투의 신인 필라무트에게 바치는 제전만큼은 달랐다.
고왕국 시대, 전쟁을 종식시키고 나라 간에 모의 전투를 했던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제국의 초창기에는 각 지역을 대표하는 기사들이 제전에 참석해 전쟁과도 비슷한 수준의 전투를 선보였다. 하지만 타레놀 칙령 이후 개인이 사병을 보유할 수 없게 되자 일종의 검투 대회로 바뀌었다.
수도 닐르에는 사설 검투장이 여럿 있었지만 명예로 따지자면 제전과 견주지 못했다. 기사로, 검투사로 필라무트의 제전에 참석하는 것은 일종의 기회였다. 근위기사들은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그리고 검투사들은 몸값을 높이기 위해 제전에 참석했다.
전투의 신에게 바치는 제전인만큼 상대를 죽여도 불문에 부쳤다. 일대일 대결부터, 대규모 난전까지 종류는 다양했다. 그리고 일반 백성들도 참석할 수 있기 때문에, 제전은 첫째 날의 축제만큼이나 인기가 많았다.
필라무트의 제전은 황궁도 대신전도 아닌, 닐르의 외곽에 위치한 오래된 신전 터에서 열렸다. 잡초가 가득한 장소에 매년 임시 좌석을 설치하고는 제전을 치렀다. 장소가 장소인만큼 보안에 취약한 것은 사실이었다.
남부 반란 세력의 잔당들은 그 취약점을 노리고 닐르에 숨어들었다. 거기에 파슨 공작이 소개시켜 준 네세리님 용병들이 더해졌다. 그 수는 백 명이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