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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97/137)

-97화-

꽃의 도시라고 불리는 닐르는 제국을 넘어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였다. 치안은 나쁘지 않았지만 타지나 타국 사람들을 보는 것이 당연한 곳이었다. 특히 그란디스 메시스가 열리는 기간 동안에는 더욱 그랬다. 조심만 한다면 백 명의 사내가 숨는 것은 어렵지도 않았다.

이 모든 계획의 시초는 루미아나 공주였다. 반란군의 잔당을 찾아 자금을 지원하고 동부의 대제후인 파슨 공작을 충동질해서 네세리님 용병을 더한 것만 보면 수완이 상당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현명하게도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철저하게 숨겼다. 특히 남부 반란군의 잔당들은 자신들을 지원하는 은인이 루미아나 대공주라는 것을 몰랐다. 그녀는 파슨 공작에게도 물증을 남기지 않았다. 습격이 실패한다 하더라도 루미아나 대공주는 무사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암막 뒤에서 사람들을 조종해서 판을 흔든다. 무엇보다 질이 나쁜 것은 루미아나 대공주에게 황제가 되려는 야심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그저 분풀이를 하려는 것뿐임을 알았을 때 카시어스는 꽤나 황당했었다.

카시어스는 결국 루미아나 공주가 배후라는 물증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습격 계획을 데스탄에게 흘렸다. 정확히는 그의 옆에 심어놓은 이를 통해 충동질했다. 역모가 있을 것이다. 황제의 목이 떨어진다. 영광된 순간을 함께하자, 라는 제안에 데스탄은 손쉽게 넘어왔다. 북관으로 쫓겨났다가 손가락을 잃은 원한 때문인지도 몰랐다.

사실 루미아나 공주가 계획한 습격은 효율적이긴 했다. 소총의 명중률은 형편없는 편이었지만 백 명이 넘는 무력 집단이 일제 사격을 한다면 아무리 카시어스라도 모두 막아내지 못한다.

그래도 루미아나 대공주는 일말의 실패를 걱정해 몸을 뺐다. 반면에 데스탄은 얕은 꾐에 홀라당 넘어왔다. 그의 멍청함이 루미아나 대공주를 몰락시킬 증거가 될 것이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검은 양이 그를 버릴 수도 있지 않습니까?”

“설마. 그리 만만하지 않아.”

자식이 역모를 하다가 붙잡히면 가문이 풍비박산 나는 법이었다. 아무리 대단한 쥴란 공작 가문이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예외가 될 수 있기는 했다. 카시어스의 정보원이 쥴란 공작이었다. 그는 아내인 대공주의 뒤를 캐고는 자비를 구했다. 쥴란 공작에게는 애인이 있었고, 그 사이에서 어린 아들과 딸을 두었다. 쥴란 공작은 대공주를 쫓아내고는 애인과 정식으로 결혼할 수 있기를 바랐다.

대공주와 동부의 대제후 사이에 오간 전서구를 빼돌리라는 명령을 받자 쥴란 공작은 충실히 이행했다. 카시어스는 그에게 충분히 사의할 생각이었다.

황제라면 상과 벌은 명확해야 했다.

“파슨 공작은 어떻지?”

“조용히 지내고 있습니다.”

“제대로 지켜보도록 해.”

“알겠습니다.”

함정에 다시 역함정을 파두었다. 카시어스는 모두에게 보란 듯이 사건을 키울 생각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이야기가 새어 나갔다가는, 특히 데스탄이 내빼기라도 했다가는 모든 것이 헛수고로 돌아간다.

뒤센트 자작은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을 황제에게 알렸다. 대부분 제전에 있을 준비에 관한 것이었다.

“다른 것은?”

뒤센트 자작은 잠시 망설였다. 준비한 것은 모두 전했다. 다만 자작의 어머니인 애쉰 부인이 부탁한 전언이 하나 남아 있었다.

심란한 황제를 더 심란하게 만들지, 아니면 어머니의 잔소리를 들을지 선택해야 했다. 뒤센트 자작은 황제를 심란하게 만들기로 했다.

“어머니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잔소리겠군.”

“꽃을 보내달라고 하셨습니다.”

꽃을 받을 사람은 애쉰 부인이 아니라 린델이었다. 카시어스는 쓴웃음을 삼켰다. 첫 번째와 달리 두 번째 감금은 로맨틱하지 않았다.

대외적으로는 상중으로 두문불출하고 있다고 알려진 린델은 계속 잉그란 사제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싶다고 편지를 보냈다. 카시어스는 답을 하지도, 찾지도 않았다. 편지도, 꽃도 없었다.

그날 이후 닷새 동안 의도적으로 린델을 멀리했다. 연인으로서, 주군으로서 최악의 행동이라는 것을 알지만 카시어스는 바보처럼 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과민하게 굴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상실도, 이별도 신의 섭리였다. 지금껏 셀 수도 없는 죽음을 보아왔다. 어떤 것은 특별했고 또 어떤 것은 그냥 지나쳤다. 그래도 누군가를 잃을까 봐 이렇게 걱정한 적은 없었다.

과보호였다. 또한 자기 방어이기도 했다. 린델을 잃으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본능이 알고 있었다.

그의 죽음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차갑게 피가 식었다. 손끝이, 심장이 얼어붙었다.

카시어스는 손에 쥔 검을 고쳐 잡았다.

“꽃을 보내겠다.”

“다른 전언도 있습니다.”

“말해.”

“낮 동안에는 제라르 경과 세투아 경을 만나 평소처럼 수업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밤에는 베개가 흠뻑 젖도록 울어서, 아침에는 눈이 부어 있다고도 하셨습니다. 부모처럼 따르던 친인을 잃으셨으니 마음고생이 심한 모양입니다.”

애쉰 부인이 한 말을 그대로 읊어대는 뒤센트 자작을 보며 카시어스는 입매를 당겼다. 얼른 찾아와서 린델을 위로하지 않고 뭐 하고 계시냐는 애쉰 부인의 잔소리가 귀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린델이 보고 싶었다. 그를 품에 가득 끌어안고 향기를 맡고 싶어 심장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린델이 원하는 답을 줄 수는 없었다.

“오스카. 쥴리아가 3년 동안 에스컬에 있었을 때 어떤 심정이었지?”

“폐하?”

생뚱맞은 질문을 받은 뒤센트 자작은 눈을 크게 떴다. 쥴리아는 뒤센트 자작의 아내였다. 갑자기 그녀의 이름이 언급되는 이유는 명확했고 그래서 더 놀랐다.

“총에 맞은 새처럼 굴지 말고, 어땠는지 말해 봐.”

“지금……?”

“연애 상담하는 거 맞아. 그러니까 대답해.”

카시어스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당당하게 명령했다. 세상에, 연애 상담이시란다. 어쩌면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뜰지도 몰랐다.

황망함을 느끼면서도 뒤센트 자작은 재빠르게 과거를 떠올렸다. 뒤센트 자작은 열여덟이 되던 해에 카시어스를 따라 장교로 북관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쥴리아를 만나 사랑에 빠져 구애 끝에 연애에 성공했다. 1년 후, 임기를 끝낸 카시어스와 함께 닐르에 돌아가게 되자 그녀에게 청혼부터 했다.

하지만 쥴리아는 죄를 지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북관에서 복무 중인 수인이었다. 제대로 된 기사 수업을 받은 그녀는 나머지 3년을 북쪽 끝의 국경을 지키기로 되어 있었다. 북쪽의 국경 지대는 국지전이 쉼 없이 일어났고, 그만큼 사망자도 많이 나오는 곳이었다. 특히 쥴리아가 부임하기로 한 에스컬이 심각했다.

쥴리아의 아버지는 정치범이었기 때문에 카시어스의 힘으로도 임지를 바꿀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센트 자작은 결혼을 강행했다. 그리고 3년 동안 닐르와 에스컬을 오가며 부인을 뒷바라지했다.

뒤센트 자작이 에스컬에서 쥴리아를 만날 수 있었던 기간은 1년 중에 몇 개월도 되지 않았다. 나머지 시간 동안에 심정이 어떠했냐고 물으면 한마디로 말할 수 없었다.

“그녀가 무사하기를 신께 빌었습니다.”

“네 기분이 어땠냐고 물었다.”

“별다를 건 없었습니다. 사무치게 보고 싶었을 때도 있었고……. 악몽을 꾸기도 했지만, 일상을 살았습니다.”

뒤센트 자작은 과거를 떠올리며 덤덤히 말했다. 일상은 바쁘고도 치열했기에 하루 종일 그녀만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당신께서도 그러실 거라고 뒤센트 자작은 소리 없이 전했다. 그러나 카시어스는 뒤센트 자작의 조언을 가볍게 웃어넘겼다.

“글쎄. 아주 높은 확률로 그를 잃게 되면 나는 제정신이 아닐 거야.”

“폐하.”

“침착하게 미친 황제가 세상에 얼마나 해악을 끼칠 수 있을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나?”

“폐하께서는 누구보다 이성적인 분이십니다.”

“그건 장담 못 해. 반지 덕분에 폭주하지는 않겠지만, 어쩌면 반지를 내던져 버릴지도 모르지.”

“!”

카시어스는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뒤센트 자작은 모골이 송연해지고 말았다. 현재 제국은 물론이고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황제의 무력에 맞대응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그가 폭주하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황제가 애인을 과보호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황금 새장 같은 것을 만들면 어떨까 계속 고민 중이야.”

황금 새장은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린델이 순종할지, 반항할지, 체념할지는 알 수 없었다. 미움받을 것은 확실하겠지만 그를 잃는 것보다는 나았다.

“매력적이긴 합니다.”

“그렇지?”

“충언으로 말씀드리자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은 하지 마십시오.”

애쉰 부인이나 할 법한 잔소리를 뒤센트 자작은 조금 더 딱딱하게 말했다. 그가 황제의 젖형제이자 충신이기에 할 수 있는 간언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선택.

카시어스는 그것이 린델의 미움을 받게 되는 것인지, 그를 영원히 잃어버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다. 자신은 욕심을 부리고 있었다. 황제라서, 더 많이 가지고, 더 강해서 린델에게 불합리함을 강요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일방적인 횡포만큼이나 지독한 짓은 또 없었다.

호의를 얻기 위해 부귀와 영화를 주겠노라고 했다. 마음을 빼앗겨 결혼이란 무거운 족쇄를 달아주기로 결정했다. 그러려면 상실의 괴로움도, 이별의 슬픔도 모두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먼저였다.

그렇게 대화가 잠시 끊어지자 시종장이 조용히 다가와 만찬 시간이 촉박함을 알렸다. 대부분의 행사는 황제의 등장과 함께 시작했다. 꼼꼼히 씻고 제대로 치장을 하려면 당장에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카시어스는 서두르지 않고 시종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린델에게 내일 있을 마상 시합에 초대장을 보내라. 자리는 리세나 공주 옆이 좋겠지.”

카시어스는 사흘 전에 백장미 궁에서 있었던 여러 일들을 자세히 전해 들었다. 루터 왕세자는 린델을 겁박하다시피 했고, 리세나 공주는 친절하게 굴었다. 마지막에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적당히 선을 지킨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린델은 고지식하게도 테누안에서 곧 내전이 있을 거라는 것을 그에게 편지로 알렸다. 만약에 리세나 공주가 끝까지 현명하게 군다면, 카시어스는 그녀에게 힘을 실어줄 의향이 있었다.

린델은 더 이상 자신의 배행 마법사가 아니었다. 그의 거취가 결정되는 동안에, 그리고 미래를 생각하면 리세나 공주가 상대하기 좋았다.

“명 받들겠습니다. 다른 것은 없으십니까?”

“그리고 백합을…….”

린델에게 백합을 보내라고 하려던 카시어스는 잠시 멈칫했다. 백합보다 더 좋은 꽃이 생각났지만 그건 너무 일렀다.

“백합을 보내라. 한 송이면 충분하다.”

자애의 여신인 하르멜라는 언제나 한 송이의 백합을 손에 들고 있었다. 굳건함과 희망, 그리고 화해를 의미했다.

린델이 과연 그 뜻을 알아볼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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