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마상 시합은 기사도가 절정이었던 고왕국 시대부터 시작된 전통 있는 행사였다. 완벽하게 무구를 갖춘 기사들이 말을 달려 랜스로 상대를 찔러 낙마시키는 것이 규칙이었다. 마상 시합이 열리면 각지에서 기사들이 몰려들었다. 신분이 낮은, 혹은 무명의 기사가 자신의 기량을 자랑하며 명예와 상을 얻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판금 갑옷을 입고 적진을 돌파하는 기사들의 활약이 줄어들면서 마상 시합 역시 천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총기 보급과 타레놀 칙령이 치명적이었다. 이제 제국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마상 시합은 다섯밖에 되지 않았다.
기사의 힘도, 위상도 과거와 달라졌지만 마상 시합은 여러 모로 인기가 대단했다. 특히 황제가 주최하는 마상 시합은 경쟁률부터 달랐다. 황제와 귀족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뽐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마상 시합에서만 할 수 있는 특별한 이벤트가 젊은 기사들을 끌어모았다.
고귀하신 귀부인과 아가씨들은 시합 직전에 말을 타고 퍼레이드를 하는 기사의 랜스에 손수건이나 리본을 묶어주고 싶어 했다. 한때는 랜스에 묶인 손수건의 개수로 기사의 인기를 실감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유행은 따로 있었다.
높고 푸른 가을 하늘 아래 각양각색의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황제를 상징하는 독수리가, 일곱 신의 꽃이,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마상 시합에 참가하는 기사들의 가문 문장이 그려진 깃발이 자리 잡았다.
화려하게 꾸며진 마상 시합장에 자리한 구경꾼들은 아름다운 리본이 랜스 끝에 묶이자 환호성을 터트렸다.
“와아아아!”
아직 시합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아름다운 아가씨에게서 리본을 얻어낸 젊은 기사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활짝 웃었다.
“이런 건 처음 봤어. 공개 구애라니. 굉장해.”
“네.”
린델 옆에서 박수를 치던 리세나 공주가 신기하다며 속삭였다. 린델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가 좋아하는 아가씨 앞에서 랜스나 팔을 내밀면, 리본이나 손수건을 랜스 끝이나 팔목에 묶어주는 것으로 화답하는 것이 약속이었다.
“저러다 거절당하면 어떻게 하려고.”
“사전에 약속된 거래요.”
린델은 마상 시합에 대해 애쉰 부인으로부터 전해 들은 것을 말했다. 대부분 남녀, 혹은 가문끼리 사전에 약속한 것이랬다. 가끔 용감하게 들이댔다가 면전에서 거절당하는 일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구경꾼들은 그걸 더 기다린다는 것이 애쉰 부인의 설명이었다.
“그래? 그야 그렇게 해야지. 아니면 엄청 민망할 테니까.”
“그렇죠.”
린델은 적당히 대꾸했지만 사실 눈앞의 광경에 집중하지 못했다. 반짝이는 판금 갑옷은 눈부셨고, 마갑(馬甲)을 입은 거대한 준마 위에 올라탄 기사들은 위풍당당했다. 린델이 좋아하는 천마 기사들과 닮은 모습이었다. 평소였다면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을 테지만 오늘은 그러지 못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슬픔은 아직 희석되지 않았다. 따스한 햇살도, 시원한 바람도, 활기찬 분위기도 모두 좋았다. 하지만 잉그란도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자마자 기분이 가라앉고 말았다. 우울함은 쉽게 털어 내지지 않았다. 잉그란 말고도 린델을 괴롭히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린델은 살짝 고개를 돌려 왼쪽을 바라보았다. 황제와 황태후, 황태녀가 앉은 상석을 기준으로 린델의 반대편에 데스탄이 있었다. 자신이 앉은 자리에서는 그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멀리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당장에 달려가 그를 칼로 찔러버리고 싶은 충동을 얼마나 참았는지 모른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쥔 린델은 자신에게 이런 시련을 준 카시어스를 찾았다. 시합장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상석에서 카시어스는 등을 돌린 채 옆에 있는 빅토리아에게 무어라 말을 건네고 있었다. 린델은 혹시나 그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싶어 앞을 바라보았다.
연금이 풀린 것은 5일 만이었다. 그동안에 카시어스를 만나지 못했다. 편지도 없었다.
지금껏 문제가 생기면 해결 방법을 제시한 것은 언제나 카시어스였다. 가끔은 강요와 명령을 오가는 권유에 린델은 난감한 적이 많았지만 카시어스는 거침없이 굴었다. 그게 최선이라는 말에 린델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카시어스의 침묵은 어떤 해결책도 없다는 뜻이었다. 솔직히 제대로 싸운 것도 아니었다. 서로 다른 가치관이 맞부딪힌 것뿐이었다.
너를 잃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심장이 얼어붙는다는 카시어스를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잔뜩 고민했다. 아니, 설득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가 그저 보고 싶을 뿐이었다.
어제저녁 카시어스가 보낸 백합을 받고서는 내심 기대했다. 하르멜라 여신의 꽃인 백합은 화해를 의미하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떴다.
5일 만이었다. 카시어스를 볼 수 있어서 기쁘긴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말을 나누기는커녕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다.
더 이상 황제의 배행 마법사가 아닌 자신은 카시어스의 가까이에 있을 수 없었다. 열흘 전이었다면 그의 뒤편에 서서 시합을 구경했겠지만 이제는 귀빈석 한쪽에 앉아 있었다. 신분은 더 고귀해졌는데 카시어스와는 물리적으로 더 멀어졌다. 한참 떨어진 곳에서 카시어스를 보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제국의 황제가 까마득히 높으신 분이라는 것도, 지금껏 자신이 엄청난 특혜를 누려왔다는 것도 새삼 실감했다. 디비티에가 아니었다면 아무리 테누안의 왕자의 신분이라고 해도 가까워질 수 없는 존재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자신의 쓸모는 정해져 있었다. 그의 곁을 떠날 생각도 없었다. 그러니까 남은 것은 어떤 이름으로 함께할지의 문제였다. 이곳에서는 명분과 형식이 중요했다. 테누안의 왕자라는 이름을 포기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었다.
결국 문제는 하나였다.
“흐음.”
린델은 살짝 한숨을 삼켰다. 사실 카시어스를 설득하는 것 말고도 방법이 있었다. 더 이상 그의 신하도, 마법사도 아니었다. 루터 왕세자나 리세나 공주와 함께 황궁을 나가는 것까지 생각해 봤다. 하지만 그건 멍청이나 할 법한 일이었다.
카시어스에게 할 말이 많은데 기회를 주지 않는다. 한 번도 그와의 관계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카시어스가 황제라는 것이, 그래서 그에게 따지러 가지 못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머나. 저 기사는 네 친구가 맞지? 인기가 많구나.”
상념에 빠져 있던 린델은 리세나 공주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앞선 시합은 이미 끝나고 새로운 기사들이 퍼레이드를 하고 있었다. 그중에 한 명은 제라르였다.
제라르는 사교계에서 인기가 많았다. 귀부인과 아가씨들이 손수건을 흔들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제라르는 그들의 환호에 손을 흔들며 호응만 할 뿐이었다. 리세나 공주가 먼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저래도 되는 거니?”
“글쎄요. 저도 처음이라서 잘 모릅니다.”
린델이 알고 있는 것은 기사가 받는 손수건과 리본의 개수가 인기를 반영한다는 정도였다. 그 때 작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름다운 꽃의 선물을 마다하는 경우는 두 가지뿐이죠. 고지식한 무인이거나, 혹은 마음에 둔 이가 따로 있다는 거예요.”
“제라르 경이 고지식한 무인일 리 없으니, 아마 누군가를 마음에 두고 계시겠다는 거겠죠? 혹시 아시는 것 있으세요? 린델리프 왕자님?”
“두 분께서는 친하시잖아요.”
세 명이 한꺼번에 린델에게 말을 걸었다. 린델이 테누안의 왕자라는 게 알려지면서, 그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운 좋게 린델과 리세나 공주의 옆과 앞뒤로 자리를 잡은 이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린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린델을 쓴웃음 짓게 한 것은 왕자님이라는 낯선 호칭이었다.
린델리프 왕자님.
애쉰 부인도, 제라르도, 세투아도 자신을 왕자님이라고 불렀다. 몇 번이고 들었던 것인데도 타인을 부르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린델은 입을 열었다.
“제라르 경에게 직접 들은 건 없습니다.”
“그런가요. 아쉽네요.”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궁금하지 않습니다. 시합이 곧 시작됩니다. 제라르 경을 응원해 주십시오.”
린델은 여지를 주지 않고 대답했다. 누군가가 다시 말을 걸어왔지만 시합에 집중하겠다고 하며 끊어냈다. 옆에서 리세나 공주가 내 동생은 웃지 않는 냉철의 마법사가 맞다며 흥겨운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린델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는 정말로 제라르의 시합에 집중했다.
시합장을 가로로 길게 가르는 분리대의 양끝에 두 명의 기사가 섰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두 기사는 기수가 깃발을 흔들자 말에 박차를 가하며 뛰쳐나갔다. 제라르의 랜스가 먼저 상대방 어깨 방패인 타즈에 부딪히며 산산이 부서졌다. 첫 번째는 제라르의 승리였다. 두 번째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린델이 보기에도 두 사람의 기량 차이는 명확했다. 린델은 세 번째 역시 제라르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다시 말들에 박차를 가했다. 이번에도 제라르가 빨랐다. 하지만 그 순간에 이변이 생겼다.
제라르의 랜스가 산산조각 나지 않았다. 제라르는 힘에 의한 반동으로 그대로 뒤로 튕겨나가듯 낙마하고 말았다.
운이 나쁜 것은 제라르만이 아니었다. 상대의 말이 분리대를 무너뜨리며 넘어졌다. 상대 기사는 멀찍이 굴렀다.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부러진 분리대에 뒷다리를 길게 찔린 말이 날뛰기 시작했다.
모든 게 린델의 바로 앞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제라르가 낙마하는 순간부터 시합장에는 비명이 난무했다.
“제라르 경!!”
린델은 제라르가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커다랗게 소리쳤다. 어디 부러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사고를 인지한 시종들이 뛰어오고 있었지만 거리가 꽤 멀었다. 날뛰는 말은 제라르를 밟기라도 할 것처럼 가까웠다. 저러다가 그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마자 린델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빈석의 펜스를 뛰어넘어 시합장으로 난입해 제라르를 향했다. 웅성거림과 날카로운 외침이 따라붙었지만 린델은 개의치 않았다.
심장은 뛰었지만 머리는 차갑게 식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린델 경. 피하십시오!”
제라르가 옆에 온 린델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하지만 린델은 대답 대신에 쓰러진 제라르의 옆의 땅을 짚으며 빠르게 외쳤다.
“굳건한 버팀. 단·단·한·벽!”
영창과 동시에 아주 약하게 반짝이는 투명한 벽이 제라르와 말을 갈랐다. 타이밍이 좋았다. 제멋대로 날뛰는 말이 벽에 부딪혀 튕겨나갔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제라르가 발에 짓밟혔을 터였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꼼짝없이 죽었구나 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제라르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놀라고 말았다. 전쟁터에서 마법을 몇 번 보았지만, 이렇게 손쉬운 것은 아니었다.
“마법입니까?”
“예.”
린델은 대답을 하면서 한 겹의 벽을 더 만들었다. 수호 마법은 무적이 아니었다. 갑옷과 벽은 버텨낼 수 있는 힘의 양이 정해져 있었다. 말이 두 번 더 벽에 부딪히고 나서야 시종들이 도착했다.
팔과 다리가 부러진 제라르는 시종들의 부축을 받고서야 겨우 일어나 움직일 수 있었다. 린델은 그대로 제라르와 함께 시합장을 빠져나와 천막까지 동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