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마상 시합에 참가하는 기사들은 모두 시합장 가까이에 자신만의 천막이 있었다. 무구와 무기가 모두 보관되어 있는 천막은 널찍했다.
천막에 도착하자 시종들이 제라르의 갑옷을 재빠르게 벗겨냈다. 간이침대에 누운 제라르의 상태는 심각했다. 오른쪽 다리는 정강이가 부러졌고, 왼쪽은 발목에 금이 갔다. 랜스를 들고 있었던 오른팔은 뼈가 십여 조각이 난 상태였다.
다행히 마법사가 금방 도착했다. 황제가 주최하는 행사여서 치유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제라르의 부러진 곳은 금방 나았다. 일상 활동에는 무리가 없지만 한동안 격한 움직임은 삼가야 한다는 주의를 들었다.
마법사가 돌아가고 제라르가 침대 끝에 걸터앉자 장년의 시종 한 명이 무릎을 꿇고 죄를 청했다.
“도련님,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랜스를 잘 살폈어야 했는데. 제 탓입니다.”
제라르와 시종의 대화에서 린델은 대충의 상황을 파악했다. 며칠 전에 제라르는 시합용 랜스를 새로 주문했다. 시합용 랜스는 안이 텅텅 비어 충격을 받으면 쉽게 부서지도록 되어 있는데, 누군가가 딱딱하고 부러지지 않는 것으로 바꿔치기해 버렸다.
감시를 제대로 못 한 것도, 바뀐 랜스를 알아보지 못한 것도 모두 시종의 실수였다. 그리고 시종의 주인인 제라르의 책임이기도 했다.
무구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상대방 기사에게 상해를 입혔다. 부주의로 견책을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시합은 몰수패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잘못이라고, 반드시 범인을 잡겠다고 고개를 조아리는 시종을 달래어 내보낸 제라르는 린델에게 인사부터 했다.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왕자님이 아니었으면 이 정도로 안 끝났을 겁니다.”
“그만하길 다행이에요. 그런데 랜스가 바뀌는 거 자주 있는 일인가요?”
“제가 알기로는 거의 없습니다.”
“누군가가 제라르 경을 싫어하는군요.”
린델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 그 누군가의 정체는 뻔했다. 그래도 제라르는 그 누군가의 이름을 언급하는 대신에 허탈하게 웃었다.
“부끄럽지만 저를 싫어하는 사람이 여럿 있기는 합니다.”
“그래도 몰수패는 너무합니다.”
“제대로 관리 감독을 못 한 제 잘못입니다.”
“그건 알고 있지만……. 나쁜 놈은 부지런하다더니. 딱 그거네요.”
인상을 쓴 채 데스탄을 욕해 주는 린델에게 제라르는 위안을 받았다. 마상 시합에 쓰일 무구에 누군가가 손쓸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다. 린델이 보는 앞에서 멋지게 이겨야겠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그래서 손 안에 쥔 랜스가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바꿔치기된 랜스는 모양도, 무게도 원래의 것과 똑같았다.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그건 변명거리가 될 수 없었다. 모두 자신의 책임이었다. 억울하다고 티도 낼 수 없는데 린델이 대신 화를 내줘서 고마울 정도였다.
“나쁜 놈의 장단에 놀아날 수는 없지요. 팔다리는 멀쩡하니 제전에 참가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전이라면……. 아.”
그제야 린델은 데스탄이 제라르의 도발에 넘어가서 제전에 참가하겠다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런 일을 꾸미고 있었으니 이길 확률이 없는데도 대결을 승낙했던 것이다. 운이 나빴다면 제라르가 죽을 수도 있었다.
반사적으로 잉그란을 떠올린 린델은 인상을 썼다. 사람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놈이 부지런하기까지 했다. 악연은 빨리 끝내는 게 좋았다.
“악인은 스스로 파멸하는 법이지요. 제 꾀에 넘어가는 것을 직접 봐야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시합은 무리입니다. 뼈는 붙었지만 충격을 받으면 다시 부러질 수 있어요. 분하겠지만 기권하셔야 합니다.”
“아, 모르시는 겁니까?”
“뭘요?”
“그게……. 폐하께 여쭤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제라르가 어색하게 말을 돌리는 바람에 린델은 인상을 썼다. 데스탄과 관련해 자신은 모르는 뭔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뒤센트 자작도, 세투아도, 그리고 제라르도 모두 입이 무거웠다. 데스탄과 관련된 일을 카시어스에게 직접 들어야 하는 건 맞았다. 하지만 카시어스의 얼굴을 봐야 뭘 물어보든지 말든지 할 수 있을 터였다.
괜히 서러운 기분에 린델은 입을 꽉 다물었다. 그리고 상황을 대충 눈치챈 제라르는 급하게 주제를 바꿨다.
“그것보다는 왕자님. 왕자님 덕분에 목숨을 구했지만, 그래도 한 말씀은 드려야 되겠습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십시오. 오늘은 무사했지만 잘못했다가는 왕자님께서도 휩쓸릴 수 있었습니다.”
도움을 받은 것은 감사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제라르는 린델에게 주의를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린델이 말발굽에 채였을 터였다.
비슷한 패턴의 잔소리를 카시어스에게서 들은 전적이 있던 린델은 그냥 웃었다. 다들 조심하라고 하지만 손 놓고 지켜보는 것은 린델의 성격에 안 맞았다.
“다음에는 어떻게 할지 장담 못 합니다. 그리고 과거로 돌아가 같은 순간이 반복된다 해도 내 친구를 구하기 위해 달려가겠습니다.”
“왕자님.”
내 친구란다. 제라르는 감동과 기묘한 아쉬움을 동시에 느꼈다. 여기서 더 이상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렇지만 린델이 그 마음을 모르고 계속 부추겼다.
“왕자님이라고 하지 말고 그냥 린델이라고 부르세요. 친구니까. 제라르 경까지 왕자님이라고 부르니까 이상해요.”
“그럼 저도 제라르라고 부르십시오.”
“왕자님이라서 좋긴 하네요. 제라르.”
“왕자님을 막 부를 수 있으니 그것 또한 좋군요. 린델.”
어린아이나 할 법한 친구 사귀기였지만 제라르는 마음 편하게 웃었다. 데스탄의 어설픈 계략에 걸려든 자신이 한심했지만, 그래도 린델 덕분에 기분이 나아졌다.
“덕분에 힘이 났으니, 던치 경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야겠습니다.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죄송하지만 자리를 비켜주시지 않겠습니까?”
제라르의 시합 상대는 던치 경이었다. 사정이야 어쨌든 간에 제라르의 실수로 그도 낙마를 하고 말았으니 직접 가서 사과를 해야 했다. 그러려면 옷을 제대로 챙겨 입어야 하는데, 린델이 신경 쓰였던 제라르는 정중히 요청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예? 아니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혼자서 갈아입기 힘드실 거예요.”
“그야 그렇지만. 아, 시종의 도움을 받으면 됩니다. 왕자님께서, 아니, 린델이 하지 않아도 됩니다. 존.”
당황한 제라르는 다급히 옆에 서 있는 시종을 불렀다. 갑옷을 입은 채였지만 흙바닥을 구른 탓에 셔츠도, 바지도 엉망이었다. 옷을 갈아입으려면 바지까지 다 벗어야 했다. 왕자인 린델의 도움을 받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린델에게 맨몸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하니 머리끝이 쭈뼛 섰다. 그러나 린델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쫓아내지 마세요. 갈 곳이 없어 그래요. 이대로 돌아가면 질문이 쏟아질 건데, 조금 조용해질 때까지 여기에 있을 게요. 아, 던치 경께 갈 때도 동행할게요. 존. 씻을 물을 준비해요.”
린델은 제라르가 반대하기 전에 존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대로 시합장에 돌아갔다가는 피곤한 일만 잔뜩 벌어질 게 뻔했다. 이곳에서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가 백장미 궁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왕자님, 아니, 린델.”
“맡겨주세요. 저 이런 거 잘해요. 셔츠를 벗게 팔을 벌려보세요.”
“뭘 하시려고…….”
“씻으려면 벗어야죠.”
진짜 옷을 벗기려는 듯 가까이 다가오는 린델 때문에 제라르는 간이침대에 앉은 채 상체를 뒤로 물렸다. 순수한 호의라는 것은 아는데, 그래서 더 난감했다. 린델을 향한 제라르의 애정은 부드럽고 달콤한 솜사탕과도 같았다. 린델 앞에서 옷을 벗는 것도 시중을 받는 것도 무리였다. 제라르는 그러지 말라고 강하게 말하려고 했다.
그 때, 아무런 예고도 없이 활짝 열린 천막 입구에서 황제를 위시한 근위시종들이 나타났다. 황제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천막 내부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제라르였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절을 했다.
“무궁하신 광영의 폐하께 인사를 올립니다.”
린델은 역시 뒤늦게 허리를 굽혔다. 카시어스가 어떻게 여기에 있나 싶었다. 그러다가 마상 시합 중간에 휴식 시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사고가 났으니 직접 살펴보려고 온 모양이었다.
“제라르 가르데니안 위스하텔. 당치도 않은 일을 저질렀구나.”
“송구하옵니다. 모두 다 제 탓입니다.”
“고의냐?”
“아닙니다.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이런 무도한 일을 벌이지 못합니다.”
“제정신이긴 해도 자신의 무기가 바뀐 것도 모르는 멍청이는 맞지.”
멍청이라고 하는 카시어스의 목소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조용히 제라르의 옆에 서 있던 린델은 카시어스의 기분이 별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정확하게는 화가 난 상태였다. 제라르가 마상 시합을 망쳐놓아서 그런 건가 싶었지만, 카시어스는 그런 데 연연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린델은 이상하다고 여겼지만 제라르는 무슨 상황인지 눈치챘다. 안에서 오간 대화를 황제께서 들은 게 확실했다. 오해라고 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린델을 좋아하는 것은 맞으니 이건 중의적인 질책이었다. 이래서야 사랑싸움에는 끼어드는 게 아니라는 성현의 말씀이 맞다고 생각하며 제라르는 고개를 숙였다.
“예. 소신이 멍청하게 굴었습니다.”
“알면 됐다. 몸은 멀쩡해 보이니, 제전에 참가하도록 해라. 데스탄에게 사정을 봐주지 말라고 이를 것이다. 목숨을 부지하려면 버둥거려야 할 게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제라르는 순순히 명령에 따르겠다고 대답했다. 동시에 카시어스를 부른 것은 린델이었다. 죽으라고 하는 것과 다름없는 명령에 저도 모르게 나서고 말았다. 그제야 카시어스의 시선이 린델에게 닿았다. 냉랭하기 짝이 없는 얼굴에 린델은 잠시 숨을 들이켜야 했다.
“린델리프 왕자. 짐에게 할 말이 있는가?”
그 순간에 린델은 심장을 차가운 손톱이 할퀴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자신을 부르는 호칭도, 카시어스가 스스로를 칭하는 단어도 바뀌었다. 공개적인 자리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건 알았다. 그래도 괜히 기분이 이상해져서 린델은 얼굴에 힘을 주었다.
“제라르 경께서는 팔과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마법으로 무사히 회복하였으나, 한동안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실 겁니다.”
“제라르 경은 좋은 친구를 두었군. 경을 걱정해, 감히 짐의 명령을 거두려고 노력하는 친구는 귀한 법이지.”
“황송하옵니다. 귀한 친구가 저를 많이 걱정하여 그랬습니다.”
카시어스의 노골적인 빈정거림에 대답한 것은 제라르였다. 그리고 린델은 어리둥절하다 못해 서러워지려고 했다. 이런 식으로 냉랭하게 구는 카시어스는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