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데 카시어스가 불렀다.
“린델.”
이번에는 분명 이름이었다. 이리 오라는 손짓에 린델은 카시어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손을 잡아.”
“폐하?”
린델은 카시어스의 손을 잡으면서 그를 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늘 따뜻했던 그의 손이 이상할 정도로 차가웠다.
얼굴 표정도, 눈빛도 그러했다.
“도대체, 지독히도 말을 안 듣지.”
“제……가요?”
카시어스가 화가 났다는 건 알았는데, 그게 자신 때문인지는 몰랐던 린델은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리고 정말 그러냐고 물어보는 린델 때문에 카시어스는 기운이 빠지고 말았다.
제라르가 낙마를 할 때만 해도 데스탄의 수완에 혀를 찼다. 바보 같은 놈이 어지간히도 앙심을 품었구나 싶었다. 하지만 린델이 제라르를 부르며 펜스를 뛰어넘었을 때부터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린델의 이름을 부르는 게 전부였다. 품에는 칼도, 총도 없었다. 날뛰는 말의 숨통을 끊을 만한 수단이 손에 없다는 사실에 낭패하는 순간에 린델이 제라르를 막아섰다. 그 순간에 모든 것이 끝났다.
결론적으로 린델의 판단은 옳았다. 그가 나서지 않았다면 제라르는 크게 다쳤을 것이다.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순간에 놀란 심장은 아직도 멈춰 있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린델도 휩쓸렸을 게 분명했다.
불안과 초조함을 억누르며 휴식 시간이 되자마자 린델을 찾았다. 자기 목숨 귀한 줄 모르고 제멋대로 굴었던 녀석은 제라르에게 한없이 다정하게 굴고 있었다. 옷을 벗기고 씻겨주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샤트밀 후작 영애를 질투했을 때와는 질이 다른 질척한 감정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화를 억눌렀지만 아무렇지 않게 웃을 여유는 없었다. 그저 차갑게 가라앉히는 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어리둥절 하다못해 딱딱하게 굳은 린델을 보자니 한숨이 나왔다. 린델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그러나 이 순간에 화를 내는 것은 옳은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가까스로 스스로에게 설득시킬 수 있었다.
린델의 손을 잡고 있자니 모든 감각이 선명해졌다. 짜증도, 애틋함도, 떨림도, 사랑스러움도 모두 린델로부터 기인해 그를 향하고 있었다.
자신은 지금 행복을 손에 쥐고 있었다. 좋은 애인은 아니더라도 어리석은 멍청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카시어스는 길게 숨을 들이쉬며 입을 열었다.
“짐의 용감한 연인은 위험한 곳에 뛰어드는 데 망설임이 없지. 감히 내 심장을 쥐고 있으면서 말이야.”
“그건…….”
“게다가 다른 남자랑 시시덕거리기나 하고.”
“?!”
시시덕거린다는 말에 린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시어스가 자신을 걱정했다는 건 알아들었다. 그런데 그다음이 이상했다. 마치 그는 질투를 하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린델은 차마 제라르를 돌아보지 못했다. 정확히는 카시어스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카시어스가 질투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예전에도 제라르와 춤 연습을 하는 것을 보며 질투한다고 했었다. 그래도 그때는 웃기라도 했는데, 지금은 한없이 진지하기만 했다.
그런 게 아니라고 입술을 달싹거리는데 카시어스가 허리를 숙여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의 입술이 뺨에 닿을 것처럼 가까워졌다.
마치 입을 맞추는 것과 같은 움직임에 조용한 천막 안에서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그리고 린델 역시 잠시 숨을 멈춰야 했다.
“허락한다고 해.”
“……뭘 허락해야 하는지 말씀하셔야지요.”
“미리 언질을 달라며.”
카시어스의 낮은 속삭임은 달콤한 밀어처럼 들렸다. 린델은 코앞에 다가온 카시어스를 보며 무엇을 언질해 달라고 했는지 겨우 기억해 냈다.
그러니까 입을 맞추겠다는 소리였다. 천막 안에 있는 사람들이 숨죽인 채 자신과 카시어스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런 적이 처음은 아니지만 그래도 부끄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린델은 슬쩍 얼굴을 뒤로 물리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안 됩니다.”
“너무 단호하게 거절하는군.”
린델이 물러난 만큼 카시어스가 다가왔다. 숨결이 섞이다 못해 온기가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입술이 닿을 듯 말 듯해서 린델은 바짝 긴장했다.
“폐하. 조금만 물러나 주시면.”
“곤란해?”
“예.”
“애인 사이에 뭐 어때서.”
“때와 장소를 가리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린델은 카시어스를 달래듯이 말했다. 카시어스는 마치 단둘뿐인 것처럼 굴었지만, 천막 안에서 자신들을 지켜보는 눈이 열 쌍이 훌쩍 넘었다.
린델의 거절에 카시어스가 가볍게 웃었다.
“고지식해. 이래서야 내가 청혼을 하면 그것도 거절하겠지?”
낮게 속삭이는 카시어스의 목소리는 린델의 귀에만 들릴 것처럼 아주 작았다.
“물론입……니다?”
물론 안 된다고 대답하던 린델은 반 박자 늦게 카시어스가 한 질문의 의미를 파악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카시어스는 여전히 냉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황금색 눈동자는 부드러웠지만 그렇다고 놀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린델은 천사를 닮은 애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게 확실했다.
“맞아. 네가 제대로 들었어.”
정말로 그게 맞냐고 묻기도 전에 카시어스가 먼저 답했다. 뭐라 할 말을 찾고 있는데 멀리서 나팔 소리가 울렸다. 휴식 시간이 끝났다는 신호였다.
“시간이 됐군.”
카시어스는 숙였던 허리를 천천히 펴며 린델에게서 멀어졌다. 그래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시종장. 마상 시합은 몇 시에 끝나지?”
“오늘은 5시입니다.”
카시어스의 물음에 시종장이 재빨리 고해 올렸다.
“마상 시합이 끝난 후, 테누안의 린델리프 왕자를 초대해 차를 마시겠다. 호수의 방을 준비해라.”
“명 받들겠습니다.”
“이드나카. 대기했다가 린델을 안내해라.”
“폐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린델. 일찍 가서 기다리는 것은 괜찮지만, 늦지는 마라. 5시다.”
제멋대로 약속을 잡은 카시어스는 나타났을 때처럼 재빠르게 빠져나갔다. 천막 안에는 처음부터 있었던 린델과 제라르, 그리고 시종인 존과 뒤늦게 합류한 이드나카만이 남았다.
기묘한 정적 속에 린델은 카시어스가 사라진 입구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젯타스시여.
린델은 제라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한 후에 천막을 떠났다. 대기하고 있던 시종을 시켜 리세나 공주에게 황제와의 약속을 알린 후, 호수의 방으로 향했다.
거울의 방은 본궁에 있는 황제의 사실 중에 하나였다. 튤립의 방이 황제의 개인적인 응접실이라면, 호수의 방은 휴식 공간에 가까웠다.
손님으로 호수의 방을 찾은 린델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향기로운 차와 달콤한 간식이 린델 앞에 놓였지만 손도 대지 않았다. 대신 섬세하게 그려진 찻잔의 무늬를 보며 조금 전에 들은 단어를 되새겼다.
분명히 청혼이라고 했다.
청혼의 사전적 의미는, 말 그대로 결혼하기를 청한다는 것이었다. 로벅에서는 보통 사내가 여인에게 꽃으로 만든 반지를 바친다. 꽃들이 앞다투어 피는 봄과 여름이 되면 청년들은 꽃반지를 만드는 연습을 열심히 하곤 했다. 그래도 결혼이란 집안끼리의 결합이라서, 가족의 허락을 미리 받아놓는 것이 먼저였다.
그러니까 청혼의 뜻은 상대와 결혼을 하고 싶다는 의미였다.
결혼이라니.
린델은 아연한 기분에 오른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가 뺨을 꼬집었다. 인정사정없었기 때문에 뺨이 얼얼했다. 꿈은 아니었다.
황제의 결혼이라면 후궁밖에 없었다. 황태후는 그에게 총비가 되라고 부추겼다. 후궁이 될 거라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돈다는 것을 린델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린델은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카시어스가 네 쓸모는 따로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전쟁터에 함께 갈 거라고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청혼이란다.
만약에 진심으로 카시어스가 후궁이 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그것이 정치적으로 중요하다면 린델은 따라야 했다. 카시어스는 즉흥적으로 일을 저지를 성격이 아니었다. 분명 어떤 복심이 있을 터였다.
자신이 후궁이 된다면 제일 좋아할 사람은 루터 왕세자일 건 분명했다. 그가 얼마나 기세등등할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분란이 일어날 게 뻔한데, 카시어스가 왜 갑자기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린델은 카시어스의 의도를 추측하는 대신에, 생각을 멈췄다. 머리가 복잡해서 열이 오르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차가 식었습니다. 바꿔드리겠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이드나카가 다가와 다 식어버린 홍차 잔을 들었다.
“괜찮아요.”
“따뜻하게 마시는 게 좋습니다.”
싱긋 웃은 이드나카가 잔을 비우고는 다시 차를 따라주었다. 짙은 호박색의 홍차가 잔에 차는 것을 바라보던 린델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세뤤 백작님. 폐하께서는…… 무슨 생각이실까요?”
린델에게는 측근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 없었다. 애쉰 부인도 이드나카도 모두 카시어스의 명령에 따랐다. 그래서 린델은 혹시나 싶은 마음에 이드나카에게 물었다. 카시어스에게 언질이라도 받은 게 있나 싶어서 말이다.
“폐하의 뜻을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달리 들은 것은 없으신가요?”
“예. 없습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결국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카시어스뿐이었다. 린델은 카시어스에게 할 질문을 하나씩 정리했다.
정말 후궁이 되어야 하는지. 필라무트의 제전에서 무슨 일이 생길 것인지. 잉그란의 장례식에 아직도 불참하기를 원하는지.
린델은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카시어스는 5시가 조금 넘어 도착했다.
“신의 축복을 받은 위대한 불꽃의 지배자이시며, 열하나의 강과 일곱 산맥의 군주이시며, 법과 정의의 수호자이신 황제폐하를 뵈옵니다. 빛나는 영광이 무궁하기를 기원합니다.”
린델은 기합을 잔뜩 넣어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절을 했다.
“일어나라, 린델.”
“감사합니다.”
“너무 긴장했잖아. 그러지 말고 편히 앉아.”
편히 앉으라고 한 카시어스가 손짓으로 대기하고 있던 근위시종들을 모두 내보냈다. 단둘이 되어버린 탓에 린델은 제자리를 지키며 섰다.
그러자 카시어스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당장에 무릎을 꿇고 청혼하지는 않을 테니, 신입 기사처럼 뻣뻣하게 굴지 않아도 돼.”
이번에는 확실히 들었다.
청혼.
린델은 정말 청혼이냐는 눈빛으로 카시어스를 보았다. 심각한 모습이 꽤나 귀여워 보였기 때문에 카시어스는 입매를 끌어 올리며 미소 지었다.